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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남명 조식선생 유적지와 대원사


                                                                  남명학 연구원

                       서북쪽으로 지리산 천왕봉 우뚝 솟아 있고 그곳에서 발원한 물이 중산 삼장으로 흐르다가

                       양당에서 합쳐 덕천을 이루면서 아담한 들판을 여는곳에 산천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산천제는

                       남명 선생이 만년에 평생 갈고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한 곳이다 여기서 공부한

                       제자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이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극복의 선봉이 되었다


                                                   남명선생 문집책판각(南冥先生 文集冊板閣) ]

              안내판에는 남명선생의 시문집 제작을 위한 목판(木板)을 보관한 건물로 6책 분량

              185매의 판각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곳에 보관하고 있던 것은 1905년에 발행한

              을사판(乙巳板이었다는데 안은 텅 비어있다. 아마 뒤쪽에 있는 남명기념관으로 옮겨

              관리하는 모양이다.

              남명집(南冥集)은 1604년에 해인사에 간행된 갑진판본(甲辰板本)이 최초이며 이후

              여러 번 수정 간행되었는데 그 시기에 따라 여러 계통으로 나뉘어 진다고 한다.

              1931년에 간행된 신미판(辛未板)이 마지막 발행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산천재 앞의 한 그루 고매(古梅)가 눈길 을 끈다. 이름하여 '남명매(南冥梅)'이다.

          원줄기의 상당부분이 썩어 키높이 만큼이나 길게 외과수술을 받고 약품처리로 검게

          땜질이 되어 있다. 1561년 남명선생이 이곳 산청으로 터전을 옮겨 온 후에 심었다니 

          수령이 450년이다. 여기는 매화가 피기시작 했네

         



                                                  남명선생이 이곳 산천제에서 돌아가시자 선조대왕께서 내리신 제문을새겨 세운 비석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 ]


          남명기념관은 2001년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계기로 추진되어 20048월 문을 열었다.

          기념관 내부는 남명 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외부 공간 서편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神道碑), 선생의 석상(石像)

          있고 우측 후면에는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인 여재실(如在室) 등이 있다.

         남명선생의 묘소는 기념관 뒤쪽에 보이는 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남명기념관 서편이다. 

             왼쪽부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은 남명선생신도비(南冥先生神道碑), 남명선생신도비문

             국역비(國譯碑), 남명조식선생상, 단성소(丹城疎)라고도 불리는 을묘사직소비(乙卯辭職疏碑)와

             무진봉사비(戊辰封事碑)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여기글들은 풀청객님 글 입니다

         우암 송시열의  남명선생신도비(南冥先生神道碑) 맨좌측비

  신도(神道)라는 말은 죽은 이(死者)의 묘로(墓路),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이 신령의 길(대개 무덤의 남동쪽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적어

 세운 비석이 신도비(神道碑)이다. 신도비는 무덤 앞에 하나를 세우는 것이 보통인데 남명선생의

 신도비는 여느 인물과는 달리 5개나 존재한다.

  1609년 남명이 영의정에 추증되자 선생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이 비문을 지어

신도비를 세웠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인홍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자

그의 신도비도 즉각 철거되었다.

  문중(門中)에서는 다시 명사(名士)의 글을 공모하여 새로 신도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은 거절하였으며, 용주 조경(龍洲 趙絅)

오랫동안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비슷한 시기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글이 접수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으므로 입장이 난처해진 자손들은

 허목의 비를 이곳 덕산에 세우고 송시열의 비는 남명의 고향이자 외가인 합천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묘정비(廟庭碑_ 묘당이나 서원의 뜰에 세운 비석)로 세웠다.

  그 후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남명과 정인홍은 집권세력인 서인(西人)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폄하되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 등의 동인(東人)들이 모반을 하였다는 혐의로

 박해를 받게 된 사건인데, 당시에 최영경(崔永慶)을 비롯한 남명 조식의 문인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계기로 남명학파 중심의 북인(北人)과 대립관계에 있던 퇴계학파 계열의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허목은 퇴계학파 계열의 남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명학파는 몰락하였으며 , 경상우도(慶尙右道_ 진주, 함안, 거창, 합천, 함양 등)

호남은 반역향(反逆鄕_ 역적의 땅)으로 분류되어 300년 동안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1926년에 남명 조식의 후손인 덕산 조씨(德山 曺氏) 문중 사람들은 허목이 지은 비문에

 남명선생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며 치워버리고 대신 송시열이 쓴 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자 조상의

 신도비를 훼손한 일과 허목의 글을 없앤 것은 잘못이라 주장하며 진주 향교(晉州 鄕校)가 들고 일어났다.

5년간의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결국 조씨 문중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허목의 신도비는 다시 설 수가

 없게 되었다.

     ■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_ 하동 옥종 안계마을 출신으로 남명의 학맥을 이음

     ■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_ 대표적인 척화론자(斥和論者)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인질로 끌려갔으나 끝까지 청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 된

인물임, 청나라로 끌려갈 때의 심경을 읊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로 유명함




[ 을묘사직소비(乙卯辭職疏碑), 일명 단성소(丹城疎)의 국역비(國譯碑)​ ]

 ​

  단성소(丹城疏)는 1555년(명종 10) 남명선생이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사직하는 이유와 당시의

국정 문란을 질타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인 을미사직소(乙卯辭職疎)를 말한다.

  이 단성소에는 남명선생의 기개와 선비정신이 잘 드러나 있으며, 당시 정치제도나 군신관계로 볼 때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극언들이 포함돼 있다. 왕의 말이 법이었던 조선시대에 절대 권력자인 왕을 ‘

고아(孤兒)’라고 하고, 왕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라고 하여 대비와 왕의

 정곡을 찔렀으며 조정과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국역한 단성소의 내용 중간중간을 옮겨 본다.

  ‘새로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된 신 조식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 60에 가까웠으나 학문이 거칠어

 문장은 병과(兵科)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행실은 쇄소(灑掃_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는 것)의 일도 맡기에

부족합니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00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해 지탱해 나갈 수 없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은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산만 불리는데도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은 자기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대비께서는 생각이 깊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궐 속의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대를 잇는 외로운 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로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소서.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 조식은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렇게 선생은 명종임금이 내린 단성현감 벼슬을 거절하였다. 선생의 나이 55세 때이다. 이것 만이 아니다.

38세에 종9품인 헌릉참봉(獻陵參奉) 벼슬을 거절하였다. 헌릉은 태종왕비 원경왕후의 능이다. 51세에 종부사

주부(宗簿司 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53세에 정6품 벼슬을 내렸으나 눈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퇴계 이황이 편지를 보내 벼슬을 받을 것을 권하였으나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59세에 종6품의 조지서

사지(造紙署 司紙)로 임명받았으나 사양하였고, 66세 때에는 종5품의 상서원 판관(尙瑞院 判官) 벼슬을 거절하였다.

  명종 임금은 선생 나이 67세 때에 승하하였다. 선생은 왕의 부음에 애절한 정을 담은 시를 남겼다.​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西山)에 해지다 하니 눈물 겨워 하노라.

   ■ 삼동(三冬)​_ 어지러운 세상  

   ■ 베옷 입고 _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 암혈(岩穴)_ 집도 제대로 없이 고생스럽게 생활함

   ■ 볕 뉘도 쬔 적이 없다_ 임금의 은택을 조금도 받은 바 없다

   ■ 서산에 해지다 하니_ 명종 임금의 붕어 소식       











                           [ 남명의 무진봉사(戊辰封事) 국역비​ ]


  1567년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는 즉위 초에 선생을 두 차례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선생의 나이 68세 때에도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대신 올린 것이 이른바

 무진봉사(戊辰封事)이다. '봉사(封事)'란 왕에게 밀봉하여 올리는 의견서를 말한다.

  남명이 선조에게 올린 무진봉사의 키워드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이다. 즉, 당시의 서리(胥吏)

폐단을 극렬하게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생은 역대 임금들이 나라 다스림에 실패한 사례를 지적하고서, '나라 다스림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학문과 인격을 닦는데 있습니다.' 라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어린 선조가 정치를

 잘 해 낼 수 있는 바탕을 닦도록 간언(諫言)하였던 것이다.

​  무진봉사의 앞머리와 끝부분만을 간추려 본다.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백성 조식(曺植)은 진실로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아룁니다.

보잘것 없는 신은 더욱 노쇠하고 병이 깊어 입으로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고 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부르는 임금님의 명이 거듭 내려와도 곧바로 달려갈 수가 없고,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임금을 향한 생각은 간절해도 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임금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겠기에 감히 속마음을 다 쏟아 임금님께 아룁니다.

​  (中略)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너그럽게 수용하신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꼭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본 뒤에라야 신을 썼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사람들도 형편을 살펴본 뒤에 벼슬하러 들어간다고 하는데, 전하는 어떤 임금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시면서 한갓 신을 만나려고만 하신다면 헛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사람 알아보는 눈이 밝은지 어두운지에 따라 앞날의 정치에 득실을 예측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임금님께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삼가 상소하는 바입니다."


    ▪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_ 서리(胥吏)란 고려나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딸린 하급 관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피제도(相避制度)라고 하여 자기 고장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것을 피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이 임지(任地)의 사정에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방의 사정에 밝은 서리(胥吏)가

 행정사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들은 지방관을 속이고 일반 백성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군림하며

 민폐를 끼쳤으며 사복을 채웠다.

   남명선생이  서리(胥吏)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분개한 것이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이다.




                                                                                     기년관 전경

​                                                                                  남명선생 영정


                                                                                      [ 신명사도(神明舍圖) ]

 ​

                                           신명사도(神明舍圖)란 남명선생의 마음 수양 방법으로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성곽의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체 내외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선생이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私慾)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또 신명사도는 도덕적 차원에서의 선과 악의 다툼을 전쟁에 견주어서 그린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도덕의 주체인 인간 자신을 선성(善性)의 본체로 위치시키고 밖에서

                                           유입되는 악(惡)으로부터 그 선성을 보호하며, 나아가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미를 잘라내고 악을 극복함으로써 신성을 인간의 생명활동과 도덕실천의 광장으로

                                           확충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선생은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 하려고 애썼다고 하는데, 합천 삼가의 뇌룡정(雷龍亭)은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하며, 산천재가 완성되자 이 신명사도를 자리 옆에 걸어두고

                                           자주 보면서 마음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비도 내리고 갈길도 멀고 묘소와 덕천서원은 패스했다






                              장당계곡 언젠가 이계곡에서 목욕하며 놀던 생각이 난다 여름에는 물이 많았는데


















                                딴 사찰에 비하여 부도전이 초라하다

                             여름이면 발디딜틈이 없는 아름다운 계곡 전에는 물레방아도 있었는데 안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