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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수승대와 농산리 석불입상

                                 아침부터 지짐지짐 내리던비는 여기까지 올때까지 계속 조금씩 내린다

                                 여기는 몇번을 들렸기에 대충 돌아보고 숙소로 들어갔다


                                                              전에 없던 일주문을 건립하고있다





        요수 선생이 1540년(중종 35)에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1694년(숙종 20) 구연서원으로

        명명되었는데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 등이 배향되어 있다.


관수루 뒤에 있는 구연서원에서는 매년 거창의 자랑인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린다. 구연서원 왼쪽에는 거북 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승대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이면서 빚어놓은 커다란 천연 바위 대다. 높이는 약 10미터,

넓이는 50제곱미터에 이르며 생김새가 마치 거북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라고도 한다.

수승대는 원래 '수송대'라고 불렸다. 백제 국세가 쇠약해져 멸망할 무렵, 백제 사신을 이곳에서 송별하면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근심 어린 송별'이란 뜻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1543년 퇴계 이황이 이곳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으로

고칠 것"을 권해 이름이 바뀌었다. 또 이황은 「사율시」를 지어 신권에게 보냈는데 그 시가 바위 둘레에 새겨져 있다.

                                                  원앙인지 한쌍이 물놀이를 즐기고있다

거북바위는 수승대에서 가장 중요한 경관 요소다.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 하는데,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m2에 이른다. 구연대라는 명칭은 마치 바위가 계류에 떠 있는 거북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비록 키는 작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노송들이

 곳곳에 자라고 있는 거북바위에는 수승대의 문화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다.

 퇴계 이황이 이곳을 수승대라고 이름 지을 것을 권한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는 시와

 이에 대한 갈천 임훈(林薰)의 화답시 〈갈천장구지대(葛川杖廐之臺)〉, 더불어 옛 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 차 있다.


수승대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가운데 위치한 거북바위(龜淵岩)가 중심이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요수정, 계곡의 진입부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는 요수정의 반대쪽에 마주하고 있다. 요수와 관수는 모두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풍류의 멋을 음유하는 말이다. 요수정과 관수루에서는

 거북바위가 위치한 수승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수승대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가운데 위치한 거북바위(龜淵岩)가 중심이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요수정, 계곡의

진입부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는 요수정의 반대쪽에

마주하고 있다. 요수와 관수는 모두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풍류의 멋을

음유하는 말이다. 요수정과 관수루에서는 거북바위가 위치한 수승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요수정 앞의 처진소나무와 아름답게 어우러진 구연(龜淵)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둔 학자로 향리에 은거하며 소요자족했던 요수 신권(愼權, 1501~1573)이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던 요수정(樂水亭)



                                                   뒤에서 바라본 요수정


                                                                      안개낀 솔숲과 구연



거창은 예부터 거열, 거타, 한들, 거창, 아림, 제창 등으로 불렸다. 거창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처음 불린 후 주변 영역과 분할, 합병되면서 여러 지명으로 불려오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크고 넓은 들판'

이라는 뜻인데 분지가 내륙 산악 지대에서 보기 드문 평야이므로 생긴 이름이다. 지금도 거창평야의 일부를

 한들이라 부르는데 대전의 한밭(大田), 한길(大路)과 마찬가지로 큰 들판이라는 뜻이다. 사과, 딸기, 포도, 쌀,

 수박, 버섯, 오미자, 밤, 양파, 배추, 무 등이 특산물로 생산되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

"라고 했다.

실개천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녘(황산 2구)'이라 부르고 서쪽은 '큰땀(황산 1구)'이라고 한다. 동녘과 큰땀을 합쳐

약 150여 호가 있는 마을이며 큰땀은 거창 신씨 1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동족 마을, 즉 집성촌이다. 거창 신씨의

 시조인 신수는 중국인으로 고려 문종 때 귀화해 참지정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신안지가 병부상서를 역임한 이래

 후손들이 거창에 살면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다 신승선(1436~1502)이 이조참판이 되고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딸과 결혼하면서 명문으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딸은 연산군의 부인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신수근(1450~1506)의 딸은 중종의 왕비인 단경왕후가 되어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신 씨의 영광은 거창에도 미쳐 연산군은 거창이 왕비의 관향이라며 현에서 군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나 단경왕후는 폐비가 되었고, 거창은 다시 현으로 강등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다 황산마을이 본격적으로

신씨의 집성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중종 35년(1540) 요수 신권(1501~1573)이 이곳에 은거하며 구연재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한 이후부터다.

신권은 거창의 거유인 갈천 임훈의 매부이기도 한데 소년 시절 한양에서 공부하다 "벼슬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자아는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다. 나는 안빈낙도하면서 오로지 인격 수양에 힘쓰겠다"라며 황산마을로 내려왔다고 한다.


   수승대에서 하룻밤을 묵고 농산리 석불 입상을 보기위해 가는데 오른쪽에 저택들이보여

   들릴까 말까 하다가 자료도 없이 불쑥 들어가니 열려인는 집도 있고 잠겨있는 곳도 있고

    어쨌든 돌아 볼 수 있는 곳만 도둑고양이 처럼 살금살금 살펴봤다



선생의 청렴을 닮은 집 반구헌

 현재 반구헌은 사랑채와 대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변 2칸의 팔작지붕의 민도리집이다.

 이 사랑채를 돌아보고 있노라면 야옹 정기필 선생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우선은 사대부가의

 상징처럼 넓게 두 칸 이상으로 마련하는 대청이 단 한 칸뿐이다. 대청이 좁고 방을 세 개나 둔 것을 보면,

 선생이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찾아오면 기거를 할 수 있는 방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렴한 그의 성품 만큼이

 이 사랑채는 여러 곳에서 색다르다. 우선은 사랑채를 바라보고 좌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높이고 난간을

둘러 개방된 정자방을 만들었다. 이 방에 앉아 앞에 놓인 작은 연못을 보면서 사람들과 교류를 한 것은 아닐까?


 

                                                    개축을 하고 있는중 거주자는 없는 것 같다

                                   반구헌 뒤에도 저택이 있는데 아침이라서 인지 모두 잠겨있어 겉으로만 보고왔다

                                   문간채는 반구헌과 똑같은데 입구에 빨간 글씨로 문간 공 동계 정온지문이라 써있다


이 집은 정온(1569~1632)선생의 생가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부분이 간반(間半) 규모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섭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안채도 남향인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된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의 안뜰인데,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서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이 있다. 곡간 뒤편에는 화장실이 있다.

 마당 동쪽에는 서향한 뜰 아래채가 있는데 4칸 집이다. 사당은 안채의 향원에 삼문을 짓고 그안에 있는데, 전퇴가

있는 3칸 집이다.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부재도 넉넉하면서 장대하고 훤칠해 보인다. 학술적 가치는 집 전체의

 평면구성에 있다.

                                안채는 아침부터 들어갈수 없어서 살짝 드려다만봤다                         

                                                                반구헌과 정온선생댁이 나란히 붙어있다


                                  바위 가운데에서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신기해서 내려오며 다시 돌아가봤는데

                                  아래 사진처럼 틈새가 조금있다





                                                                                  뒷면의 모습 오래된  풍화작용으로 많이 마모돼있다

                                                     이소나무도 바위 틈에서 꽤나오래 살아남아 몇심년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