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몸담았던 산악회 총무가 성지곡 수원지 만남의 광장으로 10시까지 오라는 호출을 받고 집에서
9시에 출발 어린이 대공원에서부터 가벼운 트래킹은 시작된다
버스에서 내리니 이런 가족상이 보인다 둘만 낳아줘도 좋을텐데 이제는 결혼도 아이 낳는것도 다들 싫어하니
세상 많이 변했다 둘만 낳아 잘기르자는 표어가 생각이난다 나는 셋을 낳았는데 막내는 세금공제 혜택도 못받았다
50년도 못내다보는 안목이 어떻게 100년지대계를 설계할 수 있을까?
어린이대공원 조형물을 뒤로하고 수원지로 진입한다
박목월님의 시비도 만나고
나그네
강나루를 건너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나그네
서시와함께 많이 읆었던 윤동주 시인의시 아깝게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만들었으니 잔인한 일본인들의
만행에 소름이끼처진다
푸쉬킨의 삶 사춘기에 한번쯤 되뇌지 않았다면 정말 거짓말이 아닐까
조지훈 시인도 우리나라의 10대 시인중에 들지 않을까 ?
우리나라 최초의 돌붙임 콘크리트 중력식 댐인 성지곡 수원지는 집수와 저수, 여과지로 향한 도수로 등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2008년
국가 문화재로 등록되었는데 바로 이 수원지로 인해 어린이 대공원은 한때 성지곡 수원지로 불렸다.
어린이 대공원 안에는 성지곡 수원지를 비롯하여
수변 공원과 산림욕장, 놀이동산 등이 있는데 특히 산림욕장은 울창한 편백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Daum백과] 서면 어린이 대공원
잠시 걷는데 매미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옛날에 자장가 정도로 듣던기분은 영 아니다
초입부터 삼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피톹치트를 발생하고 있나보다 마음부터 상쾌해지니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오를 수 있도록 계단과 평평한길 휠체어도 얼마든지 오를 수가 있다
날이 더우니 쉬엄쉬엄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평평한 지그재그길로 오른다
수원지 댐아래 웅덩이 눈도 즐겁고 시원한 풍경을 담으며 내방식대로 오른다
돌과 콩크리트로 견고하게 쌓은 댐
아름다운 동행 힘든 나들이지만 둘이서 대화를하며 웃음이 가득한 부부 계속뒤따르며 두분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 보며 수원지까지 나도 동행을했다 이더운날에 나도 저렇게 옆지기를
위해서 기꺼이 나설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며
사통팔달 이리저리 이어지는 데크길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한번 오기가 어렵다
중간중간 벤치도 있어 쉬어가기 좋은곳 여유롭게 산책에 들어간다
날은 가물었지만 수원지의 물은 그대로 전에는 이물을 식수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공업용수로 사용하는것같다
수원지 댐위도 한번 걸어보고
우측에 불태령도 날씨가 좋으니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인다
뒤로보이는 백양산아래 바람의언덕 그리고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최고의 산책코스
저 벗나무는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가격한 아주 못된 벗나무다 아니 사람이 받았겠지 ㅎㅎㅎ
어찌생각하면 배어버려도 되렸만 식물사랑일까 머리조심 명품 벗나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부자간의 산책하는 모습도 담아보고
편백숲 쉼터도 담아보고
이런분의 동상을보면 항상 생각나는게 후손들은 잘살고 있을까이다
친일파 족들은 호의호식하고 잘 살고 있는데 군대도 않가고
나이어린 학생들이 헌병대에서 약식 교육을받고 겨우 방아쇠를 당기는 연습으로 군번도 없이 출병하여
많은 희생을 했으니 어찌 가슴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그 부모님들은
사명대사(泗溟大師)[1544~1610]는 직지사에 6년간 머물렀으며 주지를 지냈다. 1575년(선조 8) 왕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휴정의 곁에서 도를 닦다가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悟道)하였다. 그 뒤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입어 강릉부의 옥에 갇혔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이듬해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①천자와 결혼할 것
②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하게 할 것 ⑤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제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 열렸는데, 이때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 5조약의
모순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제2차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다.
문장이 웅려하고 논조가 정연한 토적보민사소는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실천 방도를 제시한
상소이다. 그 내용은 첫째 모든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으로 적을 격퇴해야 하고, 둘째 교린하여 적을
돌려보낸 뒤 백성을 안위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하여야 하며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1595년(선조 28)에는 장편의 을미상소를 올렸는데,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한 면을
보여 준다. 즉 민력을 기르기 위하여 목민관을 가려 뽑아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소탕할 것, 일시적인 강화로
국가 백년의 대계를 망각하지 말고 국세 회복에 만반의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하여 천한 사람일지라고
나라에 쓸모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면 적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 국가 기강을 쇄신하며 문란한 기풍을 뿌리
뽑고 민력을 북돋우어 군정(軍政) 확립의 본을 보일 것, 소[農牛]를 매호하여 중농 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여
산성마다 군량·마초·방어 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일반 백성과 동일한 처우를 하여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선조 37)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선조 37)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 간
3,00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불교계와 나라에 많은 업적을 남기신 사명대사상과 광장도 돌아본다
여기는 어린이 둘이서 이리뛰고 저리뛰고 처다보는 학부모는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다
여름에 어린이들의 천국 워터파크 몇몇 어린이들과 학부모들만 눈에 띤다 주말 생각만해도 아찔해
화단에 피어 있는 비비추도 이제 꽃이 생명을 다하여 시들어가고 있다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며 길거리에 핀 맥문동 꽃도 담아봅니다
수원지를 지나 약속장소 만남의 광장으로 오르기 시작 제법 여름산행 치고는 가파른 구간이다
이리 올라야되나 갈등도 생기고 어차피 능선까지 가도 연결되니 그냥 전진한다
수원지부터 이렇게 계속 걸어 올라도 옆에는 편백과 삼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만남의 숲으로 가야되는데 만남의 광장으로 오라해서 여기까지왔다 전에는 만남의 장소라 했는데
요즘은 만남의 숲이라하니 해갈려 만남의 숲으로 다시가야한다
숲길을 걷고 또 걸어도 온통 삼나무와 편백나무 그늘이 계속이어지니 더시원한것 같다
해운대 신시가지와 중앙에 금련산 오른쪽으로 황령산 매일 이렇게 날씨가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올라오면서 거처왔던 성지곡 수원지
중앙에 배산과 멀리 해운대
날씨가 좋으니 남산봉도 시원하게 보입니다
나는 달랑 김밥한줄 사왔는데 여성분들 뭘 많이도 준비해왔다 식사후 과일에 과자에 커피에
완전 포화상태다
시원하게 즐기고 있는데 정수기 수리하러 온다고 연락이와 하필이면 오늘이야 투털대며 3시에 하산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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