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계단을 힘겹게 오르다보면 중간에 이런 장난감 가게가보입니다
입장료는 고마 됐다 사진은 O K 주인은 안나오게 이해가 가는 문구다
타자기화분이 인상적이다
좁은공간에 많은 장난감들과 골동품들
이 곳을 거닐다보면 옛 풍경이 이랬구나.. 느낄 수도 있고, 실제로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파는
'다락방 장난감 박스' 라는 가게가 있습니다. 콩알탄, 구슬 등 다양한 장난감들을 판매하고 달고나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주변 마트나 문방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옛시절의 물품들이 가득하다
그유명한 달고나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아이들
모타부품 철근과 철판으로 만든 조형물 울타리
작은 공간에 쉼터도 있습니다
신문 배달을하는 조형물입니다
많은 인제들을 배출한 부산고등학교가 아닐런지?
바다를 향해 뻗은 '168계단'은 산복도로 서민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계단은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이어주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누군가는 아이를 업고 장바구니를 든 채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 또 누군가는 계단에 앉아 부산항에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뛰어 내려갔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탄 듯,
계단 위에 멍하니 서서 당시 모습을 상상해본다. 숨을 고르며 오르내렸을
가파른 계단, 지금은 모노레일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2016년 5월부터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모노레일이 가동돼,
동네 주민과 여행자의 수고를 덜어준다.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골목투어를 계속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당산.
작은 동네에도 '당산'이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을 모시고 있는 곳인데,
매년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 아침에 당산제가 열린다. 당산제가 열리는 날에는 동구청장을 비롯하여
초량2동장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빌고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
평상시에는 무속인들이 와서 제사를 올리거나 일반인들이 와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고.
초량 이바구길, 이야기 충전소
초량 이바구길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 나간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바구충전소>는피난민들의 삶과 애환이 느껴지는 양철집을
형상화하여 만든 외관이 아련함을 자아낸다.
'이바구충전소'는 탐방객을 대상으로 공방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숙소(3실 11명 수용)제공 및 여행 안내를 한다.
부산 동구 초량동에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구수한 옛 이야기와 막걸리·빈대떡, 시락국·도시락 등
토속 풍물을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동구청이 문화특화 융·복합 노인일자리사업으로 마련된 ‘이바구 충전소’는 고령자
사회 참여 종합지원사업의일환으로 맞춤형 노인일자리 창출 공모사업에
선정돼 전국 최초로 운영된다
산복도로 위 우리 살던 이야기
김민부 전망대를 둘러 가면 168계단도 금세다. 계단을 올라 이바구공작소에서 잠시 멈춘다.
이곳은 누구나 부담 없이 들렀다 갈 수 있는 갤러리이자 여행자들의 쉼터다. 해방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월남 파병의 역사를 간직한 산복도로 이야기를 그림과 사진, 전시 등으로 풀어내고 있다.
산의 배를 둘러 길을 냈다고 해서 산복도로다. 그 산복도로 위에서 사연 많은 삶을 살아냈고,
지금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그려낸다.
이바구 공작소 영상실입니다
산복도로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이바구공작소'
유치환우체통에서 민주공원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이바구공작소'를 만난다. 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
이곳에서는 풍경만으로 알기 힘든 산복도로의 속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산복도로 사람들이 펼쳐놓은
<요강 이바구뎐 >을 비롯해, 산복도로의 풍경을 펜으로 그린 작품이 전시된다.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부산의 독특함을 만나고 싶다면 산복도로에 가야 한다.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는 시원한 풍광도 좋지만,
그곳에 부산의 어제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산복(山腹)은 산허리를 뜻하며, 산복도로는 경사지를
개발하면서 맨 위쪽에 자리한 도로다
부산은 평지가 좁고 산이 많아 땅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살 곳이
마땅치 않아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하나둘 생겼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이 봇짐을 지고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광복 당시 28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100만 명이 훌쩍 넘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산비탈이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산에 움막을 짓고, 깡통을 펴 지붕을 올렸다.
힘겨운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몸집만 한 물통을 이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물을 길렀고,
마을 사람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했다.
팍팍한 삶이지만, 산동네는 피란민에게 안식처이자 희망의 터전이었다
산동네에도 길이 필요했다. 1964년 10월 산동네를 연결하는 첫 산복도로가 열렸다.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 앞에서 동구 초량동 입구까지 1820m 구간에 걸친 망양로다.
이후 구봉산과 천마산을 비롯해, 부산 곳곳에 산복도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부산은
'산복도로의 도시'가 되었다
반지하 공간에는 교복체험장입니다 중 장년들이 주로 교복체험을 하고 있네요
공작소를 지나면 이내 장기려 박사를 기념하고 박사의 뜻을 십분 살려 주민들의 복지시설을
들인 ‘더 나눔 센터’를 만난다.
국내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 장기려 박사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가난했던 시절 약 대신 “닭 두 마리를 처방하라”는 박사의 어록은 요즘같이 팍팍한 시절에
마음을 울리는 유명한 일화다.기념관 안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청년의사 장기려 "평생 가난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신 성산 장기려 박사님은 독립정신을 가르친 의성학교를 설립한
부친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조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의사의 꿈을 품고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의 모태)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지원은 했지만 당시 조선인을 1/3밖에 뽑지 않았던 경성의학전문학교였기에 합격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지원후에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 제가 의사가 되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있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하늘도 그 마음을 아셨는지 이윽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하게 되고 입학후에는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셨던 백인제 선생님의 제자가 됩니다. 또한 1932년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구요.
이후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진료를 보며 주말이면 자전거에 왕진가방과 약품을 챙겨 시골과 산속의
동네를 찾아 가난한 이웃들을 진료하셨습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아내와 5남매와
헤어져 아들 한명만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됩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의 침대 머리맡에는 젊은 아내의 모습과 훗날 80대 아내의 모습을 담은 두 장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않고 재혼하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평생 혼자 지냈다.
피난터 부산에서 피운 봉사와 희생의 진료
피난 후 장기려 박사님은 부산 육군병원에서 전쟁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진료하셨지만 의사와 병원이
부족하여 많은 환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만 했습니다. 그때 마침 미국 유학 중 귀국한
전영창(거제고등학교 설립자)과 한상동 목사와 함게 구호병원 설립의 뜻을 모으고 부산 영도에 창고를
빌려 무료진료소인 복음진료소(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모태)를 세웠습니다.
당시 천막으로 진료소 세 동을 지은 후 사과상자를 모아 수술대를 만들고 전기가 모자란 당시라
수술을 할때면 촛불을 켜서 수술을 하였습니다. 선교회에서 받은 500불이 운영비의 전부였던
무료진료소에는 40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직원들을 위해 월급을 직원에 딸린 식구수대로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식구가 2명이었던 장기려 박사님은 제일 작게 월급을 타 간거죠.
여보시오, 그냥 도망가시오. 가장인데 집에가서 일해야 할 것 아니오."
또한 장기려 박사님은 환자의 진료비 전액을 자신의 그 작은 월급으로 대신 지불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장기려 박사님의 월급은 항상 모자라게 되었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운영마저
어려워지자 병원 진료부장회의에서 앞으로 무료환자에 대한 모든 것은 원장님 임의로 못하고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진정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 장기려 박사님은 어려운 환자가 나타나면 야반도주를 시켜주었습니다.
치료는 끝났지만 치료비가 없어 걱정하던 사람에게 "여보시오. 그냥 도망가시오. 우리병원
어디에 울타리가 있습니까? 그냥 뒷문으로 나가시오. 가장인데 어서 가서 일을 해야 할 것 아니오.
"라고 뒷문을 열어주곤 했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가난한 환자들을 돌본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40년째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이동기씨(74)의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이 계시던 복음병원에 왔을때
7년간이나 무료로 입원시켜주고 오갈데 없는 그에게 직접 집을 지어 주며 30년을 한결 같이
도와 준것입니다. 한편 "나의 소명이 의사이듯이 당신도 그런 몸으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소명이지 않겠는가?"라는 장기려 박사님의 말을 듣고 감동한 이동기씨는 이윽고
누워서라도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이후 시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의료보험의 효시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장기려 박사님에게 점차 불우한 이웃들의 건강을 지키고자 뜻을 가진 분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장박사님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4명이 뜻을 모아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낯설었지만 " 건강할때
이웃돕고, 병났을때 도움받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2년동안 22만명이 의료보험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1979년에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간질환자를 위한 "장미회", 지역사회 복지를 위한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생명의 전화, 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를 설립하시는 등 끊임없이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시며
어려운 이웃을 돌봤습니다.
간연구의 개척자 그리고 스승으로서의 삶
2006년 장기려 박사님의 이름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간연구에 미치 공적이 인정되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에서 간연구에 개척자로 불리게 된
이유는 1943년 평양에 있을때 이미 간암환자의 간 일부를 떼어낸는데 성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1959년에는 국내 최초로 간의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하여 간외과 발전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이어 간암에 대한 연구로 1961년에는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봉사와 함께 장기려 박사님은 제자를 가르치는데도 열정과 사명감을 발휘하셨는데 우리말로 된
의학서적이 거의 없었던 당시 손수 외국책을 번역하여 교재로 만드셨고 고신대 뿐만 아니라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에서도 강의를 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할배님 글중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게스트하우스와 민박촌이 나옵니다
이바구 캠프 체크인 장소입니다
피난민의 삶이 묻어나는 풍경입니다 피난민 뿐이 아니라 5~60년대는 서민 거의가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유치환 우체통으로 가는 산복도로위 친환경 전망대 입니다
친환경 스카이웨이 전망대
그리움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입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망양로의 랜드마크 '유치환우체통'
최근 산복도로 재생 사업을 통해 부산의 애틋한 역사를 품은 산복도로가 새롭게 조명된다.
산비탈에 숨은 이야기를 만나고,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부산의 보석 같은 경치를 볼 수 있도록
구석구석 정비했다. 먼저 망양로(望洋路)에 가보자. 이름처럼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길로,
발길 멈추는 곳이 모두 전망대다. 황홀한 풍광에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망양로의 랜드마크는
'유치환우체통'이다. 파란 바다와 대결이라도 하듯, 빨간 우체통이 바다를 등지고 섰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하는 시 <행복 >이 머릿속에서 흐른다.
유치환우체통은 부산과 인연이 깊은 유치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편지를 넣으면 1년
후에 배달된다
유치환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오후 아래에 있는 카페에서 냉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갈증을 풀고
마지막 코스 까꼬막으로 향한다
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곧 게스트하우스 까꼬막이다. 언덕배기에 있어서 이름이 ‘까꼬막’이다.
'유치환의 우체통에서 300m 정도, 도보로 6분 정도 걸으면 '초량 이바구길'의 종착점인 '까꼬막'이 나온다.
'까꼬막'은 경상도 사투리로 「산비탈」을 의미.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까꼬막 게스트하우스'
어르신 스토리텔러를 통해 문화적, 역사적 얘기를 듣고
산복도로를 체험하며 부산항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이다
까꼬막 쉼터 전망대 두 젊은이가 멋저보인다 나도 저런때가 있었지
까꼬막이라 전망도 좋다. 옆으로는 마을 카페 ‘천지빼까리’가 있다. .
천지 삐끼리 카페는 휴무인듯 문이 잠겨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바다가 검푸른 빛깔로 몸을 바꾼다.
서서히 부산대교와 부두에는 불빛이 들어오고 있다
배도 고프다 오늘의 초량 이바구길 여행을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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