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대왕암 출렁다리를 건너보고 바로 여기 병산서원 배롱나무를 보러 왔다
몇 년 전에 오후 늦게 와서 내부는 못보고 갔었는데 오늘은 오전에 도착하여
내부에 있는 배롱나무까지 다 보게된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들어 오면서 본 천사의나팔 꽃
입구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전경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서 서애 류성룡(1542~1607년) 선생과 그의 제자이며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5) 공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곳은 서애 선생께서 31세 때인 1575년에 풍산 상리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607년 선생이 돌아가신 후 류성룡을 모신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선생의
위판을 모셨으며, 매년 봄·가을 향사를 받들면서 서원으로 승격됐다
병산서원의 유례는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해 하회마을에 왔을 당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말씀해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고 알려졌다.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고 많은 학자를 배출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이다.
1978년 3월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됐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천여 종과 3천여
책이 소장돼 있다.
병산서원은 낙동강의 은빛 백사장과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병풍을 둘러친 듯한 '병산'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할 만큼 빼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누각 건물인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주변경관은 병산의 자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유생들이
교육을 받던 강당인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건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처럼 병산서원은 자연 친화적이고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본보기가 되는 곳으로, 우리 민족의
절제된 마음과 자연을 지켜가고자 하는 민족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비의 절제된 마음을 담아 낸 인공적인 건축물과 하나 돼 펼쳐 내는 장엄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한옥의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 주사(廚舍) 앞에 달팽이 모양을 한 하늘 열린 통시(화장실)는 또 다른 볼거리로 재미를 준다.
중앙에 강당이 있고 양옆에는 동제와 서재가 있다
동재(동직재)
서재(정허재)
동재와 서재는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돼 있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지내던 방이었다.
좌고우저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
위에서 바라본 만대루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멀리서 보면 카랑카랑한 선비의 기질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만대루의 아름다움은 건물의 위용 보다는 자연스러움이다.
‘건물은 그냥 자연의 일부’라는 우리 조상들의 건축의식을 잘 느낄 수 있다.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목재들은 휘어진 그대로의 모습을 가진 굵은 기둥이다.
기둥마다 각각의 특색이 있어 자연미를 더욱 느낄 수 있다.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도 정질 한번 주지 않은 생긴 모양 그대로이다.
주춧돌로 쓰기에는 황당 할 만큼 큰 돌을 두기도 하고, 기둥을 일부러 주춧돌의 한 쪽 귀퉁이에
세우기도 했다.누마루를 오르는 나무 계단도 눈길을 끈다.
큰 통나무를 도끼질로 서너 곳을 잘라 계단으로 삼아 그 자연스러운 느낌과 발을 디딜 때의
독특한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입교당(立敎堂)
서원 중심 강당으로 ‘입교(立敎)’는 ‘소학(小學)’ 입교편에서 하늘로 부여받은 착한 본성에 따라 인간윤리를
닦아가는 가르침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생들이 배워야할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을 바르게 세운다는 의미이며, 성현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의
몸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선비로서의 사명을 다 하고자 공부했다.
존덕사는 1613년(광해군 5) 정경세가 중심이 돼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신문(神門)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들이 출입했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해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외삼문 중앙 두 기둥에 주역의 8괘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서애선생의 일생과 그 시기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주역의 괘로 풀어서 새겨 둔 것이다.
보호수
배롱나무 수고 8m 나무둘레 0.85m 수령 380년
지정일 2008년 4월7일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이다.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돼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사청 들어가는 문
밖에서 바라본 존덕사
장판각(藏板閣)
장판각은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다.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했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낙동강이 흐르고 백사장도 좋다
관리동
나오면서도 미련이 남아 다시 담아본 배롱나무
달팽이 뒷간
달패이 뒷간은 서원 밖 주사(廚舍)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단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400여 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돼 사적 제 260호(1978년)로 지정됐다.
2003년 보수 작업이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원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백사장
강가에서 담아본 서원전경
서원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매점앞에 은행나무 열매가 탐스럽게 붙어 있고 텃밭에
토마토 가지 고추가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다
빨갛게 익어가는 복숭아도 만나고 꽈리와 풍접초 능소화도 만나며
병산서원의 배롱나무 탐방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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