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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교회와 배재학당

데미안2 2017. 1. 22. 21:41

덕수궁을나와 그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니 이정표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이정표에 있어

올라가보았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업적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취를 볼 수 있는기회가 이제야 이루어졌다

 

교훈은 '자유·사랑·평화'이며,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번지에 있다.

1886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M. F. 스크랜턴이 설립했고, 1887년 고종황제가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했다.

1904년 중등과(4년제)를 설치했고, 1908년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했다. 1910년 대학과를 신설했고, 1918년

 고등과와 보통과가 이화학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개교했다. 1938년

 보통학교를 폐지하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이화고등여학교로 바꾸었다. 1946년 이화여자중학교(6년제)로

학제를 바꾸고 1950년 6월 이화여자중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했다. 이후 1971년 중학교를 폐지하고

 고등학교만이 남게 되었다.

1986년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1988년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 예원학교 및 서울예술고등학교가

이화예술학원으로 분리되었다. 1992년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94년 〈이화백년사〉를 간행했고,

 1996년 창립 110주년 기념행사를 치렀다. 2003년 도서관을 새롭게 단장했으며, 교육인적자원부 지정 학교도서관

 활용 정책연구학교로서 자기 주도적 학습을 위한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해

 재학중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유관순 기념관의 2층에는 유관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다음백과

1885년 10월 11일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창립했다.

 1887년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처소를 마련하였고 '베셀 예배당'이라 명명했다. 교인수가 늘어나게 되자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1895년 9월 9일 착공, 1897년 12월 26일 예배당 봉헌식을 가졌다.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 건물은 최초의 서양식 교회였다. 1918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개화운동부터 반일 민족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3·1운동 이후부터는 야간학교를

설치하는 등 선교 사업에 힘썼다. 6·25전쟁 때는 예배당 일부와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며 1977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다음백과

한편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했다가 귀국한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청년들의 사회참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했다. 협성회의 주요인물들이 정동교회 청년회에 들어옴에 따라 당시

 어느 단체보다 의식 있는 집단으로 반일 민족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교인수가 급성장하게 되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1895년 9월 9일 착공, 1897년 12월 26일

 예배당 봉헌식을 가졌는데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교회로 평면구조는 성단 부분에 익부가

 달린 십자형이었다. 건물 양식은 고딕풍 양식으로 내부의 천장은 평천장이며, 기둥은 아무런 장식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다.

1918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도 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당시

 제6대 담임목사였던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장로가 참여했으며, 3·1운동 이후부터는 야간학교를 설치하는 등

 선교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1922년에는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기도 했고, 1930년에는 남북한 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한 조선감리교회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8·15해방 후 한때 분열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49년 재건파와 부흥파의 합동총회를 개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해 교단통합을 신속히 이루었다. 6·25전쟁 당시에는 예배당 일부와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76년 문화공보부는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했다. 1979년 4월 15일 붉은 벽돌

예배당 옆에 새로 완공된 한국선교100주년기념예배당은 한국건축가협회로부터 최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1993년 현재 김봉록이 제19대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다음백과

         서울시 중구 정동길 46

<배재학당>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초기부터 영어수업을 비롯한 전인교육을 실천하였고, 초대대통령 이승만과 김소월,

 주시경,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지식인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신문화의 요람이다.

현재는 배재대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중학교가 배재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아 인재양성과 사회봉사에

힘쓰고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916년에 세워져 교실로 사용된 배재학당 동관 건물을 그대로 살려 2008년 개관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서울시 기념물 16호로 지정된 건축문화재다. 역동적인 공간구성과 현대적인 감각을 살린 상설전시장과 매년

 새로이 마련되는 기획전시 및 특강 프로그램들로 일반관람객들과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새로운 시각의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백과

070-7506-0072 서울 중구 서소문로11길 19

배재학당은 구한말 전제군주 체제 아래서 민주교육의 장을 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민족교육을, 그 이후에는

 전인교육을 펼쳐왔다. 19세기 말 정동은 외교, 정치, 종교, 교육, 문화의 중심이었다. 배재학당은 한국 근대의

 심장부였다. 이 박물관 안에는 우리가 일찍이 누렸으나 안타깝게도 지켜내지 못한 전인교육의 한 전형이

 담겨 있다. 종교적인 편견을 버리고 유심히 참관하다 보면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교육 문제의 해법도

 그 실마리를 찾을 듯싶다.

그시대의 책상이었을까?

아펜젤러는 거룩한 교육자의 상징이다. 그는 이 언덕배기에서 어쩌면 평범한 선교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었다. 어수선했던 구한말, 그는 이 땅에서 희망을 보았고 자신의 목숨을 씨앗으로 심었다

. 이 박물관에서 그의 교육철학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면 기적은 우리 앞에서 늘 현재 진행형이다.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이며,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추모비는 배재동창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그는 1884년 미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해외선교부(총무)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27일 아라빅호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잠깐 머물다가

 1885년 4월 5일 미츠비시 배편으로 부산을 경유 인천에 그의 부인과 함께 도착했다. 이 때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

'라는 첫 기도를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등 우리 나라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미국 공사(G. C. Foulk)의 권유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H. G. 아펜젤러 선교사의 주요 활동과 업적을

 요약하면, 첫째, 배재학당의 창설(1886. 6. 8)을 예시할 수 있다. 배재(培材)학교는 고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교회의 설립(1887.10.9)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그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였다. 그리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넷째, 성서 번역사업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 혜론, 스크랜톤 등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에 공헌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다.

 

 고종이 내려준 ‘배재학당’ 현판과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서명한 『서유견문』 학생들이 배웠던 교과서들이

 전시돼 있다. 교과서는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근로 학생들의 작업으로 발간됐다. 수업료를 낼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 안에 일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글과 한문, 영어 이렇게 세 언어를 뜻하는

 삼문(三文) 출판사는 교과서 외에도 「독립신문(獨立新聞)」과 「협성회보」도 인쇄했다. 「협성회보」는 훗날

 국내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每日新聞)」으로 발전한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만나는 교훈이다. 마태복음의 한 구절인데 이 문구는 다른 방문객에게는 다소 겉도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갓 쓰고 하인까지 대동하고서 학교에 다녔던 개화기 양반 자제들과 신분제 사회의 실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렇다. 배재학당의 설립자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는

 이 땅에 최초로 서양식 근대 교육을 연 선교사다. 그는 교육의 출발점을 스스로 행하는 데서 찾았다. 남(하인)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배움의 출발이라고 보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인 그는 동료가 포기한 ‘

모기와 말라리아의 나라’ 한국에 온다. 그것도 학교를 마치고 결혼한 직후였다. 부부는 일본과 부산을 거쳐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가 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함께였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 공사 후크는 ‘지금 서울은 외국 여자가 살 만한 환경이 못 된다’며 아펜젤러 부부를 일본으로

돌려보낸다. 6월 20일 다시 제물포에 상륙한 부부는 7월 19일 서울에 입성해 정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근대를 산책하다에서

감리교 목사였던 그는 전도보다 교육사업에 더 주력한다. 1885년 8월 3일, 집에서 영어 학교를 열고 이겸라(李謙羅),

고영필(高永弼) 이렇게 두 학생을 받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날이 배재학당의 실질적인 개교기념일인 셈인데,

 배재중·고교는 이듬해 고종(高宗, 1852~1919)이 ‘배재학당(培材學堂)’ 현판을 내려준 날짜인 6월 8일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羅稻香, 1902~1926) 등 셀 수 없는 역사적 위인들이 이 배재학당에서 배웠다. 음악, 체육 분야에서도

 선구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인교육과 동아리 중심의 일인일기(一人一技)를 지향하는 배재학당은 ‘배재인만의

 유전자’로 통한다. 그들의 자부심은 입시 교육 위주의 학교들과는 확연히 다른 데서 출발한다.근대를 산책하다에서

 

100년전 배재학당학생들은 타임캡슐에 자기가 담고싶은 물건을담아서 땅속에 묻었다합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공사중에 타임캡슐이 발견되었는데 위물건들이 들어 있었답니다

윌리암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 9. 13-1945. 1. 6)

미감리회 선교사로 한국명 노보을(魯普乙)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스프링데일에서 출생한 그는 1889년

와이오밍신학교(Wyoming College), 1892년 드루신학교(Drew Univ.)를 졸업한 후 1892년 와이오밍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홀(W.J. Hall) 선교사의 권유로 그 해 10월 15일 미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

 교사로 3년간 재직했으며 홀 선교사 별세 후인 1895년 평양으로 파송되어 15년 동안 평양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다. 1896. 3 미감리회 신학당 시작될 때 조직신학과 설교학 강의, 1906 철학박사 학위 수여,

1908~11 평양 및 서울지방 감리사로 한국 감리교 70% 관할, 1910. 가을 남경 금릉대학에서 해리스 감독의

 친일행위 공박, 평양에 주재하면서 한국북지방 감리사로 시무하였으며 1917~1922, 1928, 1932~1934년에

 수원지방 감리사로 시무하였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 합동 시 미감리회 전권위원으로 활약했다.

1933년 2월 11일 한국 선교 40주년 기념식을 원주읍교회에서 가졌으며 1933년 5월 은퇴하였다.

관리자로 2년, 지방 감리사로 40년을 활동한 그는 이듬해 11월 14일 경성지방 교역자회가 마련한

 송별 만찬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송별예배에 참석한 후 귀국하였다.  정동교회에도 깊이 관여한

노블 목사 부부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1934년이고 1945년 1월 6일 사망했다.

1945년 1월 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톡튼에서 별세했다.

피아니스트 한동일(韓東一, 1941~ ), 백건우(白建宇, 1946~ )가 쳤다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1864년 독일 블뤼트너 사가 제작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다. 아펜젤러의 일기와 그의 가족들이 남긴

소품들도 정갈하게 전시돼 있다. 아펜젤러는 1902년 전도 여행을 하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했다.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이 땅에 바친 위대한 영혼의 소망은 2세에게로 이어졌다.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을 이끈

 헨리 다지 아펜젤러(Henry Dedge Appenzeller, 1889~1953)가 잠들어 있다

 

 

 

 

    헨리 다지 이펜젤러가 쓰던 책상괴 타자기라함

 

 

 

 

 

 

 

덕수궁(德壽宮) 돌담을 오른편에 두고 걷다가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서소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배재공원이 아담하다. 공원을 지나면 고풍스러운 적벽돌 건물이 500년 넘은 향나무를

품고 서 있다. 주변에 훨씬 더 크고 높은 건물들이 많은데도 작지만 당당한 풍모가 눈길을 끈다. 배재학당

동관(東館)이다. 1984년 배재중·고교가 강동으로 옮겨간 뒤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쓰인다.

 

 

                 시청역으로가며 덕수궁 돌담길에서 한컷


                 Anne Murray 희망의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