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2
2021. 5. 29. 19:51
세계 식물원을 출발해 비가 내리는데 포승 전망대에 올랐다
우산을 쓰고서 사방이 캄캄하니 방향감각이 없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 안 간다
포승전망대는 평택항 홍보관이다
포승전망대 건물에 도착하니 문이 닫혀있고 냉냉하다
계단을 타고 옥상 전망대에 오르니 흐미하지만 서해대교와 마린센타가 보인다
앞에 보이는 곳은 평택항과 저쪽 바다 건너에는 부곡산업단지 인 것 같다
줌인해 봤지만 서해대교만 크게 보이고 선박들도 정박해 있지만 흐미하게 보일뿐 분간하기는 어렵다
위와 아래의 모습은 포승산업단지이다
포승전망대에서 평택호 관광단지로 왔다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는 평택호대교와 아산방조제다
평택호 관광단지 오리배와 유람선이 보이는데 비도 내리고 관광객은 나뿐인 것 같다
관광 안내소가 있지만 들어가 문의 하기도 그렇다 볼거리가 있어야
자세한 설명을 들어 보는데 주위를 돌아볼 엄두도 않나고 또한 실내는
페쇄가 돼 구경할 수도 없고 아래 광광 지도를 살펴보고 홍학사 비각을 찾아 간다
포의각
홍익한
본관은 남양.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로 끌려가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큰아버지 대성에게 입양되었으며,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사서·장령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청나라가 제호(帝號)를 쓰면서 사신을 보내 모욕적 조건을 제시하자, 상소를 올려 사신들을
즉각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의 화의론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사위 등은 모두 난중에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화친을 배척한
자들을 내놓으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반청의 자세로 버티다가 다른 2명의 학사와 함께 사형당했다.
홍익한은 사도세자 부인 혜경궁홍씨의 숙부이다
평택 홍학사 비각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있는 홍익한(1586∼1637) 선생의 비를 보호하고 있는 건물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1964년 처음 지었고 1982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포의각이라고도 한다.
선생의 묘소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앞쪽 부분에 1964년 비각을 세울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홍익한 부부의 묘
오달제(吳達濟)
1609(광해군1)∼1637(인조15)
팽성객사
평택 팽성읍 동서촌로 101-3(객사리)에 위치한 팽성객사는 조선 성종 19년(1488)에 지어졌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일제시대에는 양조장과 주택으로 사용되다 1994년 해체·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양 옆에 동ㆍ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달에 두번 절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붕도 동ㆍ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ㆍ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됐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지난 1989년 6월1일 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