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전
덕숭산 수덕사
데미안2
2021. 8. 16. 20:52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
청련당(靑蓮堂)‧염화실(拈花室)‧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심우당(尋牛堂)‧황하정루(黃河精樓)‧
천왕문‧금강문‧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코끼리석등
중국의 승려.
본명은 계차(契此)인 중국의 승려인데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찡그리며,
배는 늘어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포대화상의 환한 미소를 보니 잠시라도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중국에는 사찰뿐이 아니고 관광지에가도 포대화상이 많이 있다
황하정루
원담 진성스님 글씨라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49호 이다)
대웅전은 안동 봉정사 극란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다음으로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3번째로
오래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수덕사 대가람은 임란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대웅전만 살아남았다.
괘불掛佛이란?
괘불은 ‘걸 괘掛’와 ‘부처님 불佛’자를 써서, 걸어놓는 부처님 그림이라는 뜻이다.
괘불은 보통 5, 6미터에서 크게는 14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걸개그림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약 80여 점 남아있다고 전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여 한번 움직이는 데
장정 20여 명 이상이 필요하다. 이렇게 큰 크기의 대형 불화를 대대로 조성하여 다량 보유하고
있는 전통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수덕사 노사나불 괘불탱
높이 10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초대형 괘불이다.
거대한 노사나불이 정면으로 서서, 양 팔은 접어들어 손바닥을 위로 가게 손목을 꺾어 양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설법인’의 수인(손모양)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장대한 몸은 다채로운 영락 구슬로 아름답게 장식되었습니다. 머리에 쓴 보관에서는 신비스러운
기운이 뻗어 나오고 그 끝에서는 부처님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몸에서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하양의 오색찬란한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부처님 양 옆으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 온갖 보살님들이 모두 출동하였다.
그림 상단 양쪽으로 십대제자, 그리고 하단 양쪽 가장자리는 사천왕이 나뉘어 그려져 있다. 주존 부처님을
협시하는 보살·제자·천왕 등의 구성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 영산회상의 협시 군중을 아우르고 있다.
그러니, 노사나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기도 합니다. 또 보관 한 가운데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얹었으니, 비로자나-노사나-석가모니의 삼신(三身)이 모두 상통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