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부산초량이바구길

데미안2 2025. 2. 27. 12:32

요즘은 구장도 잔디 보호라고 4월 25일까지 휴장이라 운동할 기회가 없다 

때로는 마을을 한바퀴 돌기는 하지만 오늘은 치과에 가는 날이라 가면서 어디라도 

들려보고 싶에 10여 년 전에 돌아봤던 초량 이야기길을 2~3시간 걷고 병원으로 가려고 

점심시사 후 길을 나서 부산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 텍사스촌을 거쳐 초량시장을 통과 

초량교회부터 168계단으로 해서 유치환 우체통까지 걷기를 한다(2/25)

초량전통시장 낮시간대라서 인지 시장도 한산하다

반대편의 모습 경기탓도 있겠지만 너무 조용하다 

오래전에 와봤지만 많이 변해서 이교회를 찾는데 주변 사람에게 물어서 찾았다 

예전에는 남선창고와 백제병원터로 올라왔는데 많이 변해서 찾지를 못했다 

 

한강이남의 최초의 교회라고 한다

1892년 11월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裵偉良)에 의하여 부산 지역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다.

 영서현(英署峴)에 있던 서당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삼았으며 초창기 교인은 정준환 등 4명이었다.

영주동으로 이동 되었다가 다시 초량동으로 왔다고 하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님이 여기 오셔서 예배도 드렸다고 한다

1937년 4월 10일에 초량공립보통학교로 동구 초량동에서 개교하였다. 1941년 4월 1일에 일제에 의해

초량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광복 이후 1945년 9월 27일에 초량국민학교로 재개교하였다.

1996년 3월 1일에 초량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나훈아 이경규 박칼린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예전에는 차이나타운-텍사스거리-구백제병원-남선창고-초량전통시장-소림사-초량교회로 왔으나

이번에는 이번에는 2곳은 지나처왔다 

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방언이다

세상의 숱한 길들 너머로 사람 살아가는 마을길이 있다. 부산 동구 초량동의 초량이야기길을 걸으며

타임머신을 탄 듯 과거로 여행을 떠나본다. ‘이바구’란 ‘이야기’의 부산 사투리. 초량이야기길은 일제강점기

 부산항 개항부터 해방 후 50~60년대, 가히 한국의 산업혁명기라 할 만한 70~80년대 굴곡진 역사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다. 부산 사람들이 그 길에서 겪어낸 세월의 아픔과 기쁨을 길 따라 풍경 따라

엮어 본다

이곳은 경상도말로 까꼬막이다 

경사가 아주 심해서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모두가 6.25 피난시절 지어진 천막과 임시가옥들이 변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5~60년대에 고달팠던 삶 퇴근하며 대포집에서 막걸리 한잔하고 귀가하는 장면이다

공동수도에서 양동이를 순서대로 놓고 물을 받아가던 시절이다

최민식작가가 담은 1963년의 풍경이다

공동우물을 사용하던 시절 

1984년 그 때는 설탕을 녹여 만든 달고나라는 것이 유명했었지 

1960~1970년대에 달고나는 국자 위에 깍두기 모양을 한 하얀 설탕(포도당) 덩어리를 얹고 연탄불로

녹인 뒤 소다가루를 넣어 휘저어 먹던 어린이들의 인기 먹거리였고, 뽑기는 설탕을 녹인 것에 

소다 가루를 조금 넣고 납작하게 눌러서 만든 먹거리였다. 달고나는 설탕을 녹인 상태로 그냥 먹지만

이와 다르게 뽑기는 철판에 부어서 둥근 철판으로 눌러 납작하게 만들어 먹는다.

이때 납작해진 반죽을 별이나 하트 등의 모양틀로 눌러 모양을 새긴다

지금은 어였한 포장한 산복도로지만 그 시절 이러한 길이었다 

좌. 독립운동가 소해 장건상(1882~1974) 우. 의사 박기출(1909~1977)

독립운동가. 박종혁(1895~1921) 정치가. 박순천(1898~1983)

정치인 허정(1896~1988) 의사 장기려(1911~1995)

시인 유치환(1908~1967) 시인 김민부(1941~1972)

가수 나훈아((1947~  ) 코미디언 이경규 (1960~  ) 음악감독 박칼린(1967~  )

이바구정거장 

옛날에는 마을 거점시설로 주민공동체 활성화를 위해서 운영하는 이야기길 안내소 

어린이 도서관으로 운영을 한 것 같은데 카페로 변모를 한 것 같다 외벽색체가

완전 검정색으로 변했다

이 계단은 168 계단 아래 계단인데 계단이 잘 정비되어 있다 

아기자기한 계단을 오르면 바로 이 168의 가파른 게단이 나온다

이야기 정거장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처럼 오른쪽 모노레일은 수리 중이라

운행정지 무릎이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난간 같은 곳에 페인팅을 하고 있고 김민부 전망대나 168도시락 집

달고나와 문방구들도 사라지고 없다 

길은 꼬불꼬불 골목을 헤매며 아기자기한 길을 내다가 문득 가파른 계단을 내놓는다. 168 계단이다.

이 계단 앞에서는 누구라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 길을 밤낮으로 오갔을 사람들에게는 이 계단 역시

 아침저녁으로 맞닥뜨리는 생활의 한 부분이었을 테다. 계단은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찬다. 누군가는

노동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렸을 계단, 누군가는 학교에 가기 위해 고사리 같은 손 오므리고

 다녔을 계단, 누군가는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올랐을 계단, 그 계단을 오르며 앞서간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현재를 걸으며 과거를 만나고, 과거를 바라보다가도 문득 현재와 맞닥뜨리는 것.

이것이 사람 사는 골목을 걷는 맛이자 묘미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오르다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무대 같은 야외 공간이 있어 잠시 쉬며 주위를 담아본다 

이곳은 부산항대교다

영도 봉래산 쪽이다 

부산일보사와 문현동 방향이다

아침 신문배달을 하는 조형물로 보인다

168계단을 올라 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스라이 보인다 

이바구공작소는 부산 산복도로의 생활자료관으로, 산복도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1층에서는 전시되어 있는 레트로한 교복을 대여해 체험해 볼 수 있고 2층에는 넓은 창으로 ‘산복도로의

풍경’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산복도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로

꾸며진 공간이 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오르막의 산까지 판자촌 마을이

형성되어 ‘산복도로’가 탄생한 이야기부터, 생계를 유지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사진과 자료로

알 수 있다. (출처 : 부산광역시 교육청 홈페이지)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바구공작소 옥상 

장기려박사

기독교인 품성의 롤모델이라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로, 부산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설립자 겸 초대 원장, 제2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장 겸 병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설했다. 1977년 의무의료보험이 출현하기 이전 임의가입의료보험의 체제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의료보험조합이며, 이는 이후 대대적인 언론보도를 통해 전국적인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청빈과 봉사하는 삶을 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별명으로는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작은 예수 등이 있다.

장기려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현 룡천군 신암리 두 바위골)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운섭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 영세(崔永世)의 딸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의사양반 역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의 수제자로 송도고등학교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현 충남대학교병원) 외과장 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아마도 백인제는 자신이 퇴임한 후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장기려가 이끌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장으로 부임한다.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시에 한설야, 남일, 리문환,

리순근, 리동화, 호남히, 이병제, 정준택, 계응상, 태성수와 함께 고등교육원 내에 설치된 최고과학

기술평의회 성원으로 위촉되었다. 그 이후 평양의학대학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張家鏞)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란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다

북에 두고 온 가족과 부인을 그리워하며 남한에서는 결혼을 안 하고 홀로 살았다. 같이 남하한 둘째 장가용

박사가 있다

위에 사진 산복도로공사 중이라는 사진의 모습이 현재는 이렇게 변해 있다 

장기려박사 기념관에서 이곳까지는 까꼬막길로 오르락내리락 1km 거리 산복도로변

전망이 좋은 곳에 있다. 유치환우체통 전망대다. 외국인 두 명이 전망대를 살펴보고 나온다

 

유치환 (1908-1967) : 호는 청마(靑馬). 경남 통영(統營) 출생.
유명한 연극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1905-1974)은 청마 유치환의 실형(實兄)이다.
청마는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 마 중학교에 다니다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延禧專門)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와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영도 (1916-1976) :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북 청도(淸道) 출생.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정운은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청마는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다.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피가 뜨거운 서른여덟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리움 1 /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측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주의 기(旗)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2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아있는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고 한다.

 

James Last - Spring Song 봄의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