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월남사지
월남사지로 가는 도중에 늪지대에서 뜻밖에도 철새들을 만난다
차창 너머로 보니 기러기와 고니 같다
큰 저수지나 강가에 철새들이 나타나는 줄 알았는데 이러한 산중늪지대에서도
철새가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네
월남사지
월남사지는 월출산 남쪽 아래에 월남마을의 평지에 위치한 절터로, 전면 175m, 측면 185m 총면적 1만 평에
달하는 사지로 고려 시대 진각 국사 혜심(1178~1234)이 세웠다고 한다.
규모나 지세면에서 인근 무위사보다 컸으리라 추측되나, 지금은 삼층석탑 (보물 제298호)과 진각국사비 (
보물 제313호) 2점의 유물만이 남아있다. 무위사의 사적기에 임진왜란 때 주변의 절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내용이 있어 월남사도 이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사지 발굴 조사에서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금당
중심에 크기가 같은 두 개의 탑을 배치한 형식임을 유구를 통해 확인하였는데, 이런 형식은 대부분 통일 신라
후기 양식으로 고려 시대에 창건된 월남사지의 가치는 학술적으로 매우 높다. 월남사지 발굴 조사 후에
발굴지를 전체적으로 복토하고, 건물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흙을 더 높게 쌓고, 기둥이 있던
자리에는 초석과 적심석을 놓아 건물의 형태를 알아보기 쉽게 표시해 두었다. 주변에는 설록다원강진,
백운동정원, 금릉경포대등이 있어 고즈넉한 정취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진각국사비 앞면
진각국사비 뒷면
월남사는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창건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각국사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혜심(慧諶)으로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월남사 터에 서 있는 이 비는 절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어 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발톱에서 보이는 현실성이나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잘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었으며,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5권에 실려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고종 때로 추정된다.
새로 건설한 대웅전
월남사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 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4면에서 바라본 석탑
동회랑지
건물지 4
집수지
발굴에서 나온 기와 파편들
강당지
동방장지
방장지
전각들이 남아 있지 않아 큰 사찰이었다는 것만 알고 자리를 뜬다
가고파 - 가곡 바이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