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두물머리와세미원
수종사에서 두물머리로 오는데 물의 정원에 먼저 들어가려 했더니 만차라서 주차를 할 수가 없어
먼저 두물머리로 가는데 좌회전을 해서 다리부터 정체가 되어 20여분 가다 서다를 반복 겨우 두물머리
쪽으로 우회전은 했는데 이곳은 조금 빨라 시간당 2km 속도로 전진을 한다 중간에 공용주차장이 있지만
모두 만차라고 손사례를 친다 조금더 전진하니 고가도로 안으로 들어가라 한다
빠져나가는 차가 있나 살펴보며 옆지기 내려서 자리 확보 겨우 주차를 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어본다
두물머리도 이번이 4번째 방문이다
어느 정치인이 자의반 타의 반이라 했는데 내가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곳을 오게 된다
두물머리 느티나무와 도당제
두물머리 느티나무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마치 한 그루처럼 보이는 두물머리의 상징이다
두물머리에는 원래 도당할아버지와 도단할머니로 부르는 두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으나
1972년 팔당댐이 완공되며 도당할머니나무는 수몰되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느티나무에는 큰 구렁이가 살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등
국난이 있기 전에 밖으로 나와 국난을 에고 했다 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군인이 이 나무로
총을 만들고자 베려해ㅛ으나 베려던 사람의 손이 갑자기 부러지는 바람에 나무를 베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평온을 위하여 매년 9월 2일이면 나무에
도당제를 올리고 있다
이곳은 두물머리 물안개 쉼터이다
두물머리는 아침 물안개가 특별히 아름다운 곳으로 드라마 영화 CF촬영지 두물머리 사진작가들의
촬영명소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두물머리 물안개 쉼터에서 잔잔한 강물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풍경을 감상할 수가 있다
두물머리 느티나무
남한강과 북한강 줄기가 만나는 양서면 양수리 일대는 큰 물줄기 둘이 머리를 맞대어 두물머리라고 한다
서울로 오가던 사람들이 주막집에서 목을 축이고 냇물을 건너 말에 죽을 먹이며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예전에는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이곳에 위치한 높이 30m 둘레 8m의 두물머리느티나무는 사람들의 든든한 쉼터로 400여 년 동안 자리를
지켜왔다 여기에 2004년 국내유일의 조선장인 김귀성 씨가 건조한 황포돛배가 강과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황포돛배와 물안개 쉼터
팔당호의 모습
용이되지 못한 이무기(두물머리 나루터)
옛날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하늘로 올라가 용이되고 싶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까지 물을 타고 가면
하늘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여긴 이무기는 한강을 거슬러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까지 갔다
그러나 물은 거기서 끊겼고 이무기는 끝내 용이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 두물너리 나루터는 그 검룡소에서 시작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이 만나
하나 되는 곳이다
두물머리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두물머리 나루
두물머리 나루는 광주시 남종면과 양평군 양서면을 이어주는 나루일 뿐 아니라 남한강 수운의 하항이기도 하다
두물머리 나루 근처에 40호가량의 사람들이 거주하던 시절에 배가 30척 넘게 있었다고 한다
두물머리 나루에서 유통하던 물품은 무 등 마을에서 직접 생산한 것은 일부분이었고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들은
주변의 산판에서 생산된 땔감들이었다 이들이 운반하던 땔감은 양서면 목왕리나 증동리 서종면 등에서 나오는
것들이었고 때로는 북한강 줄기 청평댐 바로 아래까지 배를 타고 올라가서 땔감을 싣고 서울의 광나루나 뚝섬
마포 용산 등지로 운반하였다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이 양수리 족자섬 앞의 큰 여울 즉 족 잣여울로도 불리는 독백탄 그림을 재구성한 것으로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물머리를 맞대는 가운데 강줄기를 갈라놓는 긴섬 위로 수종사가 자리한 운길산이 보인다
강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은 현재의 조안면 능내리이며 그 앞의 긴섬이 바로 족자섬이다
이 족자섬 사이를 지나는 여울목이 족 잣여울 즉 독백탄인 것이다
이렇게 18세기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뽐냈던 이곳은 현재까지도 한 폭의 생생한 산수화를
보여주듯 그 찬연한 풍경을 뽐내고 있다. 겸재 정선의 독백탄
세미원 배다리로 가면서 담아본 두물머리 풍경
세미원으로 가는 배다리
배다리의 역사
배다리에 관한 최초 기록은 중국주나라 문왕 때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다양한 사료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전국 곳곳에 배다리라는 지명이
전해지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선조들이 세운 교량 가운데 배다리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789년 정조께서 한강에 설치한 배다리로써 설치규모의 웅장함과 화려함
교량의 설치 기법 등에서 단연 세계최고로 꼽힌다 정약용선생등이 참여하는 주교사가 설립되기도 했다
세미원 쪽에서 바라본 두물머리 느티나무
고니의 사랑 하트
이곳은 예봉산에 있는 기상레이다 기지다
아주가
장독대 분수는 지금 멈추어 있다
장독대 중앙에 구멍을 뚫어 분수대를 만들었다
하얀 철쭉이 만개한 모습
아직 모란이 남아 있긴 한데 지금 꽃 잎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물고기를 형상화한 분수대
이조 백자를 이용한 분수대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은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옛 말씀 관수세심 관화미심에
근거를 두어 마련한 연꽃정원이다
흐르는 한강물을 보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자는 상징적인 의미로 모든 길을 빨래판으로 조성하였고 한강에서
끌어올린 강물이 연꽃 수련 창포가 자라는 6개의 연못을 거쳐 중금속과 부유물질이 제거된 상태로 흘러가도록
설계하였다 100여 종의 수련을 사시사찰 만날 수 있는 세계수련원 연꽃을 많이 그렸던 프랑스 화가 모네의 흔적을
담은 모네의 정원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를 재연한 새한정 등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매년 7월부터
8월까지 연꽃이 활짝 피면 그윽한 연꽃 향기로 가득 차는 곳이다
풍기대
우리 조상들이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살피던 기후관측기구이다
보물 847호로 지정된 창경궁의 풍기대를 본떴다
용준분수
조선왕조의 자긍심을 나타낸 발톱이 다섯 달린 용을 그려 넣었다
용두당간분수
당간은 대개 사찰에서 깃발을 다는 깃대의 일종이다 여러잔식에 따라 용머리의 용두당간 여의주를 모형한
보주당간 봉황을 머리로 한 봉황당간 등이 있어지기(地氣)에 따라 형태가 달랐다고 한다
용두당간의 경우에는 화기가 넘치는 지형에 수기(水氣)의 상징인 용두당간을 세웠다고 한다
물 관련 문화재의 복원차원에서 국보 136호로 지정된 청동용두당간의 현태를 취하였고 재질에는
하천지역을 감안해 도자기를 사용하였다
세미원은 연꽃이 필 때가 가장 아름다운 정원인데 지금은 연꽃도 수련도 볼 수가 없으니
별 감응이 느껴지지 않는다
진달달래꽃/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