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대마도 히타카츠 항에서 이즈하라로

데미안2 2025. 5. 16. 10:09

대마도는 일주 한번 히타카츠 한번 이즈하라 한번 도합 세 번을 갔는데 이번에 서울 여행팀과 같이 또 가게 되었다(5/12)

아침 7시반에 가이드와 미팅 9시에 출항이다 

우리가 타고가는 배는 니나호다 362톤이며 정원 440명이다

아침시간이라 출국장에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우리가 왕복 이용할 니나호다(약 1시간 반이 걸린다)

히타카츠 국제여객터미널

쓰시마섬

한반도(부산광역시)와의 최단거리는 약 49.5km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이키섬과의 거리는 약 47.5km, 일본 본토

중 하나인 규슈(사가현 가라쓰 시 하도 곶)까지의 최단거리는 82km로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와 더 가깝다.

심지어 국내의 민간인들이 무인기로 대마도를 촬영하는 게 가능할 정도이다. [단독] 北 뺨치는 무인기 제작·운용…

대마도 촬영도 성공 엄밀히 따지자면 쓰시마를 이루는 군도 중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섬은 가미시마 북쪽 인근의

작은 섬 미츠시마이며 그다음은 우니섬이다.

히타카쓰항(比田勝港)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가미쓰시마정에 위치하고 있는 지방 항만이다. 그

러나, 항칙법으로 보면 상용 항만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검역항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부산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항구이기도 하며, 부산항에서 뱃길로 약 58km이면

히타카쓰항에 바로 닿은 지리적 이점을 가지게 된다. 여객 통계 수치로는 2015년을 기준으로 13,775척이

입항하였고 수용된 물량은 총합 653,633톤 규모이기도 하며, 인원수 역시 294,125명이고 국제선의 비중이

281,576명으로 대부분 중 약 97% 이상이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가장 많다.

곤겐 산 

형편없는 항구 특성상 히타카쓰항은 이즈하라항과 달리 국내선보다는 국제선을 전용하는 여객터미널답게,

근거리 연안여객선에 준하게 되는 국제노선이기도 하는 특성을 둔다. 국제선 노선이 실질적으로 국내선

역할을 하는 것과 비슷하며, 운항 노선은 보통 부산항으로 향하는 노선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2019년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인 마찰로 발생된 일본 불매운동과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2020년 3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국제선 이용객이 없었다.

도착해서 바로 점심식사 가락국수집이다 김밥과 가락국수 회 몇 점이다

쓰시마섬(対馬島, 쓰시마토)은 일본 나가사키현의 섬이다.

행정구역은 쓰시마시 1시(市)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로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쓰시마'라고 표기하며, 일본의 지역 중 드물게 

한국 한자음 독음인 '대마도'로 통용된다

면적
섬의 면적은 총 695.74㎢로 부속 섬을 포함하면 708.7㎢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섬 제주도(1,850㎢)의 약 38%, 두 번째로 큰 섬이자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섬인 거제도(379.5㎢)의 1.8배 정도 된다. 일본에서는 본토 4개 섬을 포함해 여덟 번째로 큰 섬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 동서로 18㎞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3%이며, 섬 전체 면적의 대부분인

80~90%가 산지이다. 섬의 인구는 2024년 기준으로 약 26.000명이다.

구성

원래 가운데가 잘록한 하나의 큰 섬이었으나 에도시대인 1672년에 오후나코시 운하, 메이지시대인 1900년

만제키 운하가 건설되어 3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쓰시마는 아소 만과 만제키 운하로 섬이 양분되는 지형이기

때문에, 크게 북쪽을 가미 지마(上島, "상도"), 남쪽을 시모지마(下島, "하도")로 부른다. 그 외에 유인도 5곳을

포함해 부속도서 100여 곳이 있다.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마을은 좁은 시가지가 해안지대를 둘러가며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이즈하라(厳原),

미스시마(美津島), 도요타마(豊玉), 미네(峰), 가미아가타(上県), 가미쓰시마(上対馬)로 6개의 정(町)이 있었는데

2004년 모두 합병하여 통합 쓰시마시로 개편되었다. 이들 마을 중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곳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직항 편이 있는 남쪽의 이즈하라와 북쪽의 가미쓰시마의 히타카츠이다.

한국전망대

예전에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는데 지금 새로 건설을 했다 

해상자위대 건물이 보인다

부산에서 대마도가 11월에서 2월사이에 해무가 없을 때는

잘 보이지만 이렇게 해무가 끼인 날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도 부산은 현재 보이지 않는다

와 나우라 

쓰시마의 최북단에 위치한 국경의 마을 와나우라는 바다와 산이라는 대자연에 둘러싸여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한국까지 약 49.5km의 거리에 위치하여 한국전망대에서 이웃나라

한국의 부산시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히토스바타고(이팝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5월 초면 3천여 그루가 꽃을 피워 와 나우라 산전체가 새하앝게 물들인다고 함

 

조선통신사순난지비

통신사

통신사는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이다.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 한다. 명·조선·일본 간의 사대교린 관계에서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으로서

상호 간에 사절을 파견했다. 사절의 명칭은 조선 측은 통신사, 일본 측은 일본국왕사라 했다. 태종 때부터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화되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조·일 양국

간 우호교린의 상징이었지만 임진왜란 등 정세에 따라 변동을 겪었다. 외교만이 아니라 학술·사상·기술·예술 등

문화교류의 통로이기도 했다.

1703년 조선통신사 112명 일행이 대마도 해안에서 갑작스러운 파도로 순국한 명단이다

백정화 

본토와 마찬가지로 대마도에도 산에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많다 

본디 일본에도 소나무가 많았는데 제선충으로 거의 고사를 해서 경제림으로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1960년도부터 심기시작 산에는 많은 편백과 삼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삼나무가 꽃이 필 때면 알레르기가 심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으나 약으로 치료를

하며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솔잎해란초 

구실잣나무 

테크아웃 마르쉐 사토

아이스크림과 커피 전문점 커피 아메리카노 300엔 아이스크림 250엔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인데 나는 커피로 선택을 했다

독특한 화장실이어서 담아봤다

바로 앞에는 만제키바시 (만관교)가 있는데 다음날 돌아올 때 본다고 한다

이 운하가 쓰시마섬의 상도와 하도를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경계선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관통하는

 국도 노선인 국도 제382호선이 이 교량을 관통시켜 주는 만제키바시(万関橋)가 놓여 있다.

이즈하라 시내 외에는 이러한 마을이 가장 큰 마을에 속한다

학재스민

이즈하라에 도착 골목투어를 시작한다

나카라이 토스미 생가를 포함하여 거리 전체가 돌담으로 싼 방호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거리를 걷다 보면

다른 어떠한 지역 보다 돌담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준다.

1659년 대화재 때 이즈하라에 있던 1000여 채의 목조건물이 불에 탔다고 한다 

목조건물이라 불이 나면 순식간에 옮겨 붙어 손을 쓸 겨를이 없다고 한다 

1821년에는 호재 대비책으로 집집마다 방화벽을 설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나카라이 도스이관

이곳 사무라이 동네 중간지점에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 '춘 항전(春香傳)'을 최초 일본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나카라이 토스가(半井 桃水)'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데, 긴 돌담 중간지점에 생가로 들어가는 대문이 자리하고 있다.

나카라이 토스이

​나카라이 토스 이는 만 엔 원년(1860년) 12월 2일 아버지 '나카라이 탄 시로'의 장남으로 쓰시마 후추(현 : 이즈하라)

에서 출생하였는데, 본명은 '키요시'이고 어릴 적 이름은 센타로, 기쿠아미, 토스가 지시 등으로 불려졌다.

집은 대대로 '소(宗)' 가를 섬기는 의사 집안으로 아버지가 근무하였던 부산의 왜관에서 일을 하다가 귀국한 후

메이지 8년(1875년)이 되는 16세 때 본토로 상경하여 영문학 학원 '공립학사'에서 공부를 하였다.

토스 이는 메이지 15년(1882년)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병사의 반란)의 현지 보도를 보낸 계기가 되어 메이지

21년(1888년) 도쿄 아사이신문사에 입사를 한다.

토스이는 이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가 되는 메이지 22년에 아사이신문에 '오시쓴보(啞聾子)'를

발표하고 이후 시대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유려한 필체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때 그의 사무실에 소설가 지망생으로 '히구치 이치오(樋口 一葉)'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아가씨 한 명이

찾아오는데, 그녀는 1872년에 출생하여 패결핵으로 인하여 1896년 25세로 단명한 아가씨이다.

그녀가 방문한 시기는 메이지 24년(1891년) 4월 15일로 토스가 나이가 32세이고 이치오의 나이가 20살이었는데,

그때 토스 이는 도쿄 아시히신문사에 '코사후 쿠카제'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토스 이를 연모(然慕)하는 이치 오는 그날부터 매일 니키(日記)를 썼지만, 그녀는 1896년 25세이라는 매우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일기가 세상으로 알려지면서 일본의 모든 여심(女心)을 울렸다고 한다.

그 후 토스 이는 다이쇼 15년(1926년) 11월 21일 향년 67세로 사망을 하였는데, 한국에서는 5만 원 권에서 신사임당

얼굴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일본에서는 5.000엔 권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전시관의 평면도

에도시대 번의 의사의 집 2006년에 아낌없이 해체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카라이 토이스 유품들

 

일본 5.000엔에서 볼 수 있는 '히구치 이치오'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토스이의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는 메이지(明治) 시대 최초의 여류소설가로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졌고, 2004년에 발행된 5000엔 지폐에 새겨진 인물이다.
히구치 이치요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토스 이를 찾아 왔을 때는 이치요가 20살이었고 토스이가 32살이었다.

토스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게 된 이치요는 25살로 요절할 때까지 짧은 생애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사실은 사후에 발표된 일기에서 밝혀졌다.
타고난 감수성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여성의 감성을 표현한 천재작가인 히구치 이치요의 대표작으로는 섬세한

여성 심리를 묘사한 <매미> <십삼야> <나 때문에> 그리고 유곽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성장과 사랑을 그린 <키재기>

 창부들의 삶과 의식을 다룬 <흐린 강> 등이 있다. 특히 17세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와

<나 때문에> <해질 무렵 무라사키>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히구치이치요

히구치이치바(하치바의 사계절)모리마유미의 이와나미 신서에서 발췌)

히구치이치바 이름은 나츠.나츠코.메이지 5년 3월25일 우키유키마치에서 도꾜부청에 근무하는

하구치 노리요시어머니 티키의 차녀로 태어난다 노리요시 아버지 나가노이즈미타로에

앞에서 차형 토라노스케는 집을 나와 여자상속호주로서 어머니를 섬기고 여동생을

지키고 여자 3명으로 전전했다 신장은 오척이 부족하고 머리카락은 희미하고

미인은 아니지만 눈에 빛이 있었다

문학에 뜻이 있어 메이지 27년부터 대 쓰고 모리 타케쿠리베 니고리에 13 밤 우리 룹부터를

잇따라 발표 기적의14개월로 평가된다 메이지 29년 11월 23일 폐결핵에 의해 혼고 마루야마

후쿠야마초 4번지에서 사망

서재 

기념관외부의 모습

아름다운 음악 / Romantic Mu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