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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발산리 5층석탑과 최호장군 사당

 

 

             군산 발산초등학교 후정에 우리의 아픈 역사가 숨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시대 군산지역의 대표적 농장주였던 '시마따니 야소야'가 세운 금고건물과 그가 모아놓은

             우리 문화재의 약탈 현장이고스란히 남아 있어 역사의 상흔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제는 곡창지대인 호남에 농장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앞세워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쌀들을

            군산항을 통하여

            약탈해 가는데 몰두하였던 바 지금도 군산지역에는 당시의 슬픈 그림자가 많이 남아있다.

            그 중 '시마따니 야소야'는 부근의 역사 유물과 그림, 서화 등의 수집에도 열을 올렸는데

            일제의 패망과 함께 남겨진 유물들은 지금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발산초등학교 후정에

            놓여진 채 빼앗기고 찢겨진 역사의 슬픈 현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멋있는전북에서

 

 

 

 

                                   -군산향토문화유산 4호

          이 건물은 일제시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농장주였던 '시마따니 야소야'가 1930년대에 세운 금고용

          건물로 시마따니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발산리 석등 (보물 234호), 5층 석탑

          (보물 276호) 등을 불법 수집하였던 인물인데 이 건물은 시마따니가 자신의 수집품 중 서화나 도자기

          등 귀중한 골동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건립한 금고용 건물로서 일제시대일본인에 의한 우리 문화재

          약탈의 실상을 알리는 역사지 가치가 있다.

          건물은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철제 금고문이 달려있고 창문은 쇠창살과

          철판으로이중잠금장치가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 때문에 한국전쟁 때에는 군산에서 주둔한

          인민군들이 우리 지역 우국지사들을 감금하는데 사용하였다.멋있는전북에서

 

 

 

               육각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이 있다. 하단은 눈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상단은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과 함께 높은 중대받침이 있다. 육각의 중대석에는 기둥형태의 우주(隅柱)가

               새겨져있으며 꽃부리가 위로 향한 앙련(仰蓮)모습의 상대석 위에는 낮은 탑신받침이 있다.

               육각의 탑신석은 2개소에 문비(門扉)를 모각하였으며, 4면에는 희미하여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천왕상이 각출된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 아래에는 3단의 지붕돌받침과 함께 부연을 모각하였으며

               상면은 기와를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전체 높이는 175㎝ 내외이다.

               발산리 육각 부도의 본래 위치와 주인공에 대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발산리 육각 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6각이라는 형태가 특이한 부도이다. 일반적인 탑형 부도 양식을 따르면서 그 평면이

               6각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 조형물에서 6각이 등장하는 것이

               고려 시대에 들어 중국 송나라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하여 대략적인 연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평면형의

               특이함과 희소가치만이 아니라 비교적 높은 조각수법과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예술적 조형미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자행한 문화재 수탈이라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석등은 기단석, 화사석, 옥개석을 갖추고 있으나 상륜부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

                하대저석은 현재 전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는 4각으로 각면 2구의

                안상을 새기고 내부에 서로 마주보게 1구씩의 동물상을 조각했다. 연화대석은 방형의

                받침을 두고 그 위에 팔엽 복판의 복련을 조각했는데, 연판의 볼륨감이 좋은 편이다.

                간주석은 평면상 팔각이나 모죽임을 하여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용은 구름 속을

                요동치며 간주석을 휘감아 올라가고 있는데, 머리에는 뿔이 있고 혀를 길게 내밀어

                서기(瑞氣)를 토해내고 있다. 4개의 발에는 각각 4개의 발톱이 있으며 몸통과 비늘이

                모두 표현되었다. 간주석의 하단은 홈을 파서 연화대석에 꽂았고, 간주석 상단에는

                요(凹)자형으로 홈을 파고 상대석 하단은 철(凸)자형으로 홈을 파서 끼워 넣었다.

 

               상대석은 팔엽의 연잎이 조각되었는데, 꽃잎 내에는 소형 화문과 잔무늬를 새겨 넣었다.

               화사석은 간주석과 같이 모서리를 깎아 팔각이지만 사각처럼 조성했다. 화사석에는 4면에

               사천왕상을 새기고 화창을 내었는데, 화창은 타원형에 가깝고 이중의 테두리를 둘렀으나

               문비를 달았던 흔적은 없다. 옥개석은 팔각으로 아래면 화사석과 닿는 면을 팔각으로

               돌출시켰고 외각으로 물끊기 홈이 마련되었다. 지붕의 낙수면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지만

               각 면 합각선이 뚜렷하며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다. 옥개석 상면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옥개석 내부 상단의 연기구멍은 반원형이며 그 위로 구멍을 뚫어 옥개석을

               관통시켰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민족문화 백과사전

 

 

 

 

                                                                  부근에 최호장군 사당이 있다하여 찾아갔다

 

 

 

 

                                                                           제사를 모시는곳

                                                                                     최호장군 부부묘

 

 

                                                                           아버지 아들 손자묘도 옆에 모셔저있다

 

                                                                                         

 

                                         지나면서 진주강씨 효자비도 들려봤는데 지금 수리중이라 밖에서만

                                                       

            탑동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상징인 3층 석탑에서 연유된 명칭인데 탑동 3층 석탑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66호로 지정되었으며 백제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층 석탑이다.

            본래 탑의 북쪽 밭자리에 큰 사찰의 대웅전 앞에 서 있던 탑이었으나 백제시대 사찰이라고만

            전해지는 사찰은 오래 전에 없어져 이름마져 잊혀졌으나 오직 석탑만이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가 도성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익산 금마지역에 미륵사지가 창건되고 인근에

            왕궁이 지어지던 시절 서로 연모하던 총각장군과 처녀장군의 정이 두터웠으며 장난삼아 탑 쌓기

            내기를 하고 처녀장군은 탑동 3층 석탑을 쌓고, 총각장군은 익산의 왕궁 탑을 쌓았는데 처녀장군이

            먼저 쌓았다고 한다. 그런데 총각장군의 탑 쌓는 실력이 너무도 어설픈데 실망한 처녀장군은 그와의

            인연을 끊고 처녀로 수절하며 3층 탑의 수호신이 되어 여장군 탑이라 불렸다.

            얼마 후 마찬가지로 5층 탑의 수호신이 된 총각의 분신인 남장군 탑과 씨름 시합을 하였는데 이때도

            처녀탑이 이기는 바람에 남장군탑은 부끄러움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 탑의 1층 탑신 면적이 열리면

            국가에 중대한 경사가 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8.15 광복절 날 열렸다고 한다.

 

 

 

 

 

                                                           너를 사랑하듯 비는 내리고 고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