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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1

이중섭의 100년의신화 전시회

 

 


  • 관람시간 및 요금
  •   (부산시립미술관)

    전시기간 2016년10월20~2016년 12월26일 

관람시간

관람시간
화, 수, 목, 금, 일휴관일
오전 10시 ~ 오후 6시오전 10시 ~ 오후 9시
매주 월요일 휴무
* 입장마감은 종료 한시간 전입니다. (오후 5시, 8시)
관람요금

관람요금
구분성인초·중·고교생
개인7,000원4,000원
단체(10인이상)6,000원3,000원
무료
※ 「부산광역시립미술관운영조례」 제5조의2에 해당하는 자
o 7세 미만의 어린이와 65세 이상인 사람
o 장애인 및 동행하는 보호자 1명 
o 국가유공자증 및 국가유공자유족증 소지자
o 독립유공자증 및 독립유공자유족증 소지자
o 5·18민주유공자증 및 5·18민 주유공자유족증 소지자등 

기    타* 문화가 있는 날 : 성인 4,000원 초·중·고교생 2,000원

  

 

 

 

                        종이에 연필로 그린소 개인이 소장 하고 있슴

 

                 애들과 물고기오 게 종이에유채 국립현대미술관소재

 

                 멋도모르고 샷타를 눌러대는데 직원이 촬영금지란다 저작권보호라며 예전에다들

                 찍어서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닐텐데 그저 소형카메라로 흔적만 남기는데 악법도

                 따라야지 어쩌랴 조명도 어두워 나쁜 내눈으로는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 잘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대충 둘러보는데 옆지기는 꼼꼼하게 하나하나 다 살펴본다

 

                        아래 그림과 설명은 빌려온글입니다

 

                              

 

그러나 이중섭은 그에게 고통을 안겨준 6.25 전쟁의 아픔을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 때문에 그림 그릴 종이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담배 은박지에 그의 꿈을 새겼다.

 

이 은박지(은지화) 그림은 한국화가로는 처음으로 현대미술의 정상급 미술관인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MoMA)에까지 소장됐다.

 

불행한 현실에서 꿈의 세계를 구현한 이중섭의 그림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것은 이중섭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중섭의 그림 중에는 정통회화(正統繪畵) 타블로(tableau)작업인

캔버스에 그린 유화(油畵)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전시 작품중 향도”(1939년 일본 유학 시절 작품)를 빼고는 모두 종이나 은박지에

그린 것이다.

 

내 손녀가 할아버지 집에 놀러 오면 색연필로 이면지(裏面紙)TV에서 본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을 생각나는 대로 그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이중섭은 캔버스 대작(大作)을 못 해본 열악한 조건의 화가였다.

 

이중섭 그림을 보면 마치 피카소 그림을 연상케 하는 난해함을 느낀다.

그것은 이중섭 그림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화풍이라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는 일명 전위예술(前衛藝術)이라고도 하는데,

 

전위예술(前衛藝術)이란 약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일어난 예술혁신운동으로 기존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의 개념을 추구한 것을 말한다.

 

전위예술(前衛藝術)은 기성예술의 도식적(圖式的) 양식(樣式)이나 프레임(frame)

특정 유파(流波)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새로운 경향으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신문기사에서 미술 전문가들은

이중섭 예술의 본질은 김소월의 시()에 비견할 만한 그리움이라 하였다.

다만 차이점은 소월은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면, 이중섭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기 때문에 더욱 애절하다고 하였다.

 

이중섭의 그림 속에는 남자와 여자, 아이 할 것 없어 모두 발가숭이로 노닐고 있다.

발가벗고 있는데도 아무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우리도 눈을 가릴 필요가 없다.

 

이중섭 그림속의 가장 진실한 존재는 어린아이였다.

그림 속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물고기 위에 올라타서 뒹굴고 있다.

환한 달빛 아래 팔다리 쫙 뻗고 마음 편한 표정으로 누운 어린아이가 보인다.

어린아이들의 맑은 세상, 이것이 이중섭이 꿈꾸던 파라다이스가 아니었을까?

 

이중섭 그림의 핵심은 라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

소는 옛날 우리 농촌에서 효자(孝子)였다.

아침 일찍 밭이나 논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일을 하고 석양에 돌아와도

아무 불평 없이 주인 말을 따랐다,

꾀부리지 않고 묵묵히 농사일을 도와주어 농부에게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누런 황소 !

덩치는 크면서도 맹수와는 다르게 부리부리한 눈은 온순하다.

한편으로는 그 큰 눈이 촉촉하게 젖은 듯 슬퍼 보이기도 하다.

전쟁에 비참해진 우리국민을 상징한 것일까

 

이중섭의 소는 곧 민족이었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의 시 소의 말중에서).

 

얼마전 TV에서 현재 일본에 있는 이중섭의 부인 마사코(95세 한국이름 이덕남)

여사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에선 당신 그림들이 덕수궁에 모여 관람객을 맞는다지요.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당신 그림을 알아볼 거라는 내 믿음은 옳았어요.

그래도 초등학생까지 다 아는 국민화가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요.

이토록 기쁠 수가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꿈속 당신은 서른 그대로인데 나는 이렇게 늙어 버렸네요

6·25피란 때 화구(畵具)부터 챙긴 당신

다시 태어나도 함께할 거예요우린 운명이니까

폭격 뚫고 간 서울 반도호텔

삶은 계란과 사과를 들고 당신도 원산에서 달려왔죠

꿀 같은 사과맛, 따스한 품70년 지나도 생생하답니다

 

전시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못 찍게 한 것이 매우 아쉽다.

특히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아래 사진은 필자가 책이나 신문 TV 화면 등에서 정리한 그림이다.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라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든다.

1916평안남도 평원의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1956년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연고자가 없는 환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중섭을 민족 화가” “100년의 신화

라는 말을 듣게 한 것은 그의 작품의 미술적 수준보다도 그 그림 내용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사람 이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국장님 글중에서

 

 

                      이중섭의 은지화입니다.  (2015.2.7. 원본 촬영)                                                                                            

은지화는 전쟁 중 미술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기에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었던 담배갑

이 은지화는 2015년 2월 7일 서울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원본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때는 촬영을 허가 했었는데 이번 덕수궁 전시에는 촬영을 금지 했습니다. 이 작품도 없었고요 

 속의 은박지를 펴서 못 등으로 긁어내 물감을 입힌 이중섭이 착안해 그린 그림입니다.     

서울미술관에 전시했던 은지화 세 점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Love) 이란 제목의 은지화입니다.                                                                              

알몸의 두 사람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입 맞추고 있는 모습이 외설적으로 보이나요. 그림 윗 쪽에  

손가락은 또 무었을 뜻하는 걸까요.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이중섭은

그림의 일부가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 되는등, 전시회의 실패로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부인을 

만나려던 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실의 속에서 결국은 병을 얻어 죽게 됩니다.   

 

 

           

                  복숭아 밭에서 노는 가족"이란 은지화입니다.      

          

       

추모" 란 작품입니다. 1950년대 작품으로 은지에 새겼습니다.

       

꽃과 아이들" 이란 은지화 작품입니다.

 

이중섭의 편지 글                                                                                                         

 태현 군 훌륭한 사람 태현군의 편지 고맙다. 덕분에 아빠는 감기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학교에서 모두 같이 가서 본 영화는 재미있었니?  아빠가 한 달 후면      

도쿄에 가서 자전거를 꼭 사줄께, 안심하고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와 태성이와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는 하루 종일 태현군과 태성 군, 엄마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단다.  

이제 곧 만날 테니... 아! 아빠는 기뻐요.   아빠  (인용,출처 : 이중섭의 사랑 가족

 

   

          태현군,태성군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 아빠는 오늘 종이가 떨어져서 한 장만 그려 보낸다.   

      태성, 태현 둘이서 사이좋게 보렴. 다음에는 재미있는 그림을 한 장씩 그려서 편지와 함께

보내줄께. 태현군, 태성군. 둘이서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가 가서 자전거 사줄께.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마다 보고픈 태성 군 건강하지? 아빠가 있는 경성(서울)은 날씨가     

신선해서 편안하고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모두와 사이 좋게, 그리고 건강하게,    

 좋아하는 걸 열심이 용감하게 해주기 바란다, 얼마 안 있으면 아빠가 너희들이 있는 미슈쿠로

 갈 테니 태현 형과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는 또 태성, 태현이 게 물고기와 노는 그림을    

    그렸단다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이중섭의 사랑,가족에서 옮김)                                        

나의 귀여운 태현군. 언제나 보고 싶은 착한 아이. 나와 엄마의 태현군.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    

공부 잘하고 친구와 활기차게 운동 잘하고... 아빠는 하루 빨리 태현 군과 만나고 싶어서 빨리      

그곳으로 가려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아빠는 아픈데 없이 건강하니 태현 군도 건강하게

아빠를 기다려다오.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이중섭의 사랑,가족에서 옮김)                            

 태성 군(태성), 나의 귀여운 태성 군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니? 요전엔 엄마와 태현 형과 셋이서      

 이노카시라 공원에 산보를 갔다 왔더구나. 동물원의 곰이라던가 원숭이라든가 학. 모두 재미       

있었지?  아빠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보트 태워줄께. 건강하고 얌전하게 기다려다오 아빠는       

감기에 걸려 누워 있지만 이젠 아주 건강해졌단다. 그럼 건강하게 지내라.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대향은 매시,매분 귀여운 그대로 부터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요.  대향 중섭 구촌                         

그대가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 아고리" 님은 머리와 눈이 더욱 초롱초롱해지고 자신이 넘치고,        

넘치고 넘쳐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와 눈빛으로 제작, 제작 표현 또 표현을 계속하고 있어요.            

한없이 멋지고 ... 한없이 다정하고 ... 나만의 멋지고 다정한 나의 천사여 ... 더욱더 활기차고 더욱더 

건강하고, 힘내요. 화공 이중섭 님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어진 아내 남덕 님을 행복의 천사로  높고

넓고 아름답게 돋아 새겨 보이겠습니다. 자신이 넘치고 넘칩니다. 나는 그대들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또 커다란 표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만세. (아고라는 이중섭의 일본식 별명)     

    제주도 풍경" 제주도 피난시절 이중섭의 행복한 일상이 들여다 보이는 작품입니다.                            

게를 잡으며 노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보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정감 있게 표현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절로 즐거워 지네요. 어려운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 많이 잡아먹은 게와 조개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중섭의 그림에는 유난히 많은 게를 등장 시켰다고 합니다. 바위솔님의 글중에서

 

      

한 지인이 이중섭의 전기를 조사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참 아팠다.
1.
이중섭은 일본유학을 한 사람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유학을 할 정도였으니 북한의 원산에서 행세깨나 하던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유학시절 만난 일본여자가 북에서 그림 그리면서 소일하고 있던 이중섭을 찾아 전쟁통에 북까지

 보따리 하나 들고 찾아와서 이중섭과 결혼한다.(그 여자는 임신중이었다)
그리고 이중섭은 일제말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정면으로 휘말린다. 문제는 이중섭이 너무 순수하고

 착했다는 것이다.
북에선 부르조와 화가라고 의심받는다.
싸우는 소 그림에서 어느쪽이 북조선 소냐는 심문을 받는다.
그리고 자유시인들의 시집에 삽화를 그려주었다고 사상검증 당하고 추궁받는다.
그래도 그나마 소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도 있다고 평가받아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전쟁 후 남에선 빨갱이 취급을 받는다.
이중섭이 그린 그림 중에 공장의 굴뚝을 그린 그림이 있다.
이걸로 이중섭은 공안기관에 잡혀간다.

공안기관은 왜 굴뚝만 그리고 행복한 노동자와 꽃밭은 그리지 않느냐고 이중섭을 닥달한다.
이중섭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언제부터 국가가 화가에게 그림지도까지 했냐고 항변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이중섭은 미쳐버린다.

이중섭은 너무 순수하고 착했기 때문에 처세에는 빵점이었다.
돈도 없었고 간혹 그림값을 좀 받으면 친구에게 뺏기고 또 그림값을 제대로 받은 적도 거의 없었다.
항상 돈에 무심했고 자존심이 높았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일본인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건너가 버린다.
이중섭은 혼자 후배의 판자집에 얹혀살면서 전시회도 열지만 또 공안기관에서 들이닥쳐 자신의 작품과

 동료화가들의 작품을 압수해간다.
드디어 이중섭은 어느순간 정신을 잃어버린다.
이중섭은 말년에 정신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2.
이중섭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뉴욕에서도 이중섭 모르게 이중섭 그림이 전시회에 걸린 적도 있고 러시아, 유럽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모양이다.
한국의 전시회 때 이중섭의 그림을 본 어떤 외국인이 이중섭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중섭의 소그림이 스페인의 투우소처럼 힘이 있다"

이 말에 이중섭은 노발대발하고 좌절한다.
난 한국소를 그렸는데 그렇게 보이나..
그 외국인은 그냥 한 말이라고 사과했고 또 이중섭의 그림을 꼭 사고 싶다고 했으나 이중섭은 팔지 않는다.

3.
가정생활엔 빵점 아빠.
이중섭은 가족을 잘 돌보지 못했다.
해방이후 일본인 아내를 뒀다는 이유로 식량배급에서도 차별받고 제주도에 건너가 막일을 해주고 남의

 집에서 얹혀 살았다.
네 식구에 이불 하나.. 난방 이런 건 아예 없었다.

하지만 이중섭은 아이들을 매우 사랑했다.
아이들이 갯펄에서 놀고 있으면 조개껍질에다 아이들의 그림을 그렸다.
이불 하나밖에 없는 단칸방 바닥의 비료푸대에도 그림을 그렸다.

일본에 간 아이들을 항상 그리워하며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려고 발버둥쳤으나 결국 사주지 못한다.
일본에서도 힘들게 살던 일본의 처가 이중섭에게 어렵게 돈을 부쳐주고 전시회를 열라고 했으나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전시회 이후론 이중섭은 일본가족에게 편지를 보내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아이들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 그리고 사회의 탄압에 더 이상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한 것이다.

4.
이중섭은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잘 생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당시 어떤 부자가 이중섭이 일본에 아내가 있는 걸 알고도 딸과 돈을 주고 그림 그리는 걸

후원하겠다고까지 했다.
가슴아픈 일화들이 참 많다.
이중섭이 남쪽으로 피난갈때 북엔 어머니만 남았다.
집을 지켜야 했으니..

그런데 이중섭은 어머니가 앉았던 방의 장판을 동그랗게 오려온다. 어머니 보고 싶으면 어머니 엉덩이가

 놓였던 장판을 안겠노라고.. 그리고 그 장판지에 그림도 그린다.
이중섭은 평생 극빈자로 살았다.
아이들은 항상 영양실조를 겨우 면한 상태였고 부두에서 노동자 생활을 한 적도 있다.

이중섭은 낭만적이었던 사람이다.
생활고 때문에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부산에서 대구로 이사 가라는 지인들의 권유에 아내가 있는

 일본보다 멀어져서 싫다고 말한 사람이다.
5.
이중섭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런데 당시 예술폐인들이 문예사조가 어떻고 외국의 유행이 어떻고 떠들 때 그런데 휘말리지 않은 사람이다.
특별히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이 좋아서 그림만 그린 사람이다.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격동의 시대에 희생된 희생자다.

이 사람이 얼마나 순진한지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일본에서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아내가 이중섭이 파를 싫어해서 안 먹는 것을 알고 이중섭에게 "파를 코에

 넣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진지하게 농담을 한 적이 있는데 다음날 이중섭이 코가 다 헐어 있었단다.
다음날 일본인 아내는 이중섭이"머리는 맑아지는 것 같은데 코가 헐어 아파죽겠다"는 이중섭을 보고

두 손 두발 다 들고..
다음은 이중섭의 시 [소의 말]이다.
시;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당시 이 시를 본 이중섭의 조카가 "삼촌 시도 써요?" 하니까
이중섭 왈 "그냥 소가 말한 걸 옮겨적었지.." 한다.
조카가 웃으며 "소가 조선말을 참 잘 하네요" 하니까
이중섭은 "조선 소니까.."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근데 소눈이 예전 같지가 않아 전쟁을 겪어서 그런지 흐려졌어"

전쟁통에 뭔들 흐려지지 않겠는가..박봉팔님글

 

 

George Skaroulis (2000 Generations) - 09. My New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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