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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정순왕후생가와 김용환선생 생가

                            역사속에 정순왕후는 세분이 있는데 고려원종비 충렬왕을 낳은 정순왕후 조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단종비 여산송씨 정순왕후. 여기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생가터다

 

                    정순왕후(貞純王后){2}에 대하여

     1745년(영조 21)∼1805년(순조 5). 영조의 계비(繼妃).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徐氏)가 죽자 1759년(영조 35) 왕비에 책봉된 뒤 가례를 행하고, 1772년에는 예순(睿順)을 

     비롯하여

     성철(聖哲)·명선(明宣)·융인(隆仁)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지만
사도세자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참소가 심하더니, 아버지 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언경(羅彦景)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그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벽파(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

 

     (若鏞)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호는 정순(貞純)이며,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정순왕후는 15세의 나이에 65세인 영조의 계비로 들어가 17년을 함게 살았으며 영조가 승하했을때 32세에 지나지 않았다.
     실록에 나와있는대로 순조를 수렴청정 하면서 상당히 정치적이고 천주교를 금압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 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칸ㆍ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칸․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그 후 이 가옥에서 김홍욱의 4대손인 김한구의 맏딸로 정순왕후가 출생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안채의 건물에 죄우로 각각 3칸씩의 건물을 달아내어 ㄷ자형의 평면을 이룬

     안채 중앙3칸은 넓은 대청을 두고 우측에 고방

     (庫房)과 안방 부엌이 이어져 있고 대청 좌측에 제실, 건너방, 광 등이 있고 광 옆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칸이 나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 사랑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 와담장이며 대문은 평문으로 되어 있다. 화강석

     1벌대 기단 위에 덥벙초석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일고주 오량 집으로 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이다.

 

                               너무 조용해 도둑 고양이 처럼 살금살금 들어가 살펴보는데 현재 거주하시는 김용환선생의

                               양아들 김기흥씨께서 들어와 살펴보시란다

                                                     김기흥씨는 초대 민선 서산시장을 지내셨다한다

       그녀에 대한 일화가 인상 깊었다. 왕비간택 당시 좋아하는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화려한 꽃들의

       이름을 대는 다른 규수들과 다르게 '목화'로 대답했다는 그녀. 그 이유는 그것으로 백성들의 옷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답으로 왕후가 된 그녀는 역사 속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순조를 대신하여 청정하여 천주교를 박해하는가 하면 노론을 옹호하여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때로는 왜곡이 되고, 때로는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 역사 속 이야기인지라 과거로 돌아가 직접

      느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배움으로 옛날 이야기를 전해 듣는 현대인으로서 그녀가 미운 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정순왕후가 살았다는 이곳에 그다지 애착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거실도 양반가 답게 고풍스러운 모습이다

                                                                 둑립운동가 김용환 선생 생가이기도 하다

                                                                  집여기저기 화초들 분재들이 잘 가꾸어져있다

                                                                     창고에있는 여러 생활도구들

 

 

                          독립운동가인 김용환선생의 기념비. 김기흥씨가 이분의 양자로 입적되어 항렬로는 부친이 된다고 한다. 

          생가 입구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는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신 열사 김용환 선생의

          것으로 중국에 있던 것을 생가 터로 옮겨 세웠다. 여느 묘비와 다르게 태극문양이 각인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정순왕후 생가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경주 김씨 가옥인 김기현 가옥이 있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9호로 지정된 이 가옥은 세워진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안채와 사랑채의 건축양식으로 가늠하여 19세기

        중반쯤으로 추측된다. 600년 전부터 이곳 한다리에 경주김씨가 터전을 잡고 살았다는 고증에

        의하면 그동안 타성씨로 소유권이 변경된 적도 있었으나 김기현의 선조가 건축한 것으로

        전해오는 건축물이다.그시절 작은댁이라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ㅣ'자 형의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가 대문을 등지고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특이하다. 보통 사랑채는 대문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들고남을 볼 수 있도록 길가 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김기현 가옥의 사랑채는 수줍은 듯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일부 조사에

       의하면 집을 먼저 짓고 대문을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1층

       기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가공하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후 홑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기와집이다.

     김기현 가옥도 정순왕후생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대롱대롱 처마 밑에

     매달려 말려진 감들과 빨랫줄에 매달린 색색의 빨랫감들이 사람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니 정겹다.

 

     사랑채 뒤로 돌아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안채로 향하는 문과 마주한다. 안채 역시 수줍은 듯

     문 뒤로 몸을 숨기고 있다. 문 안쪽으로 발을 디디고 들어서야만이 안채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가 있다. 문이 살포시 열린 주방에는 한 아이와 어머니가 식사 준비에 한창이다. 현대생활에

     맞게 변화를 준 입식 부엌이 전통가옥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은근히 조화를 이룬다. 그 모습을

     담고 싶지만 다정한 모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슬며시 문을 나선다

 

        2011년 현재 서산 김기현 가옥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김기현이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 민속 문화재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사랑채에는 ‘계암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서산 김기현 가옥은 계암 고택으로

        불리기도 한다. 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원래 담만 있었던 것으로, 과거와는 달라진 사회적 관념과

        생활의 편의를 위해 후에 현재 위치에 설치하였다. 부엌의 작은 문으로 나가면 작은 뜰과 광, 사랑채

        화장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안채의 서쪽 담에 협문이 설치되어 있다. 협문은 정순왕후 생가와 이어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순왕후 생가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서산 김기현 가옥은 살림집에 차양이 설치되어

        있는 흔치 않은 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으나 안채는 동남향,

        사랑채는 서남향으로 배치 구조가 서로 다르며, 충청도 지방의 반가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전통 건축 양식과 당시 부(富)에 따른 건축 재료 사용을 볼 수 있는 등 다양한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어쨌든 대문이 북쪽에 나고 보니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뒷면을 보게된다. 마치 뒷문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또한 사랑채는 안채의 좌향과는 달리 남쪽을 향하게

        되어있어 안채와 평행이 되도록 배치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향을 고려하여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사랑채 전면에는 차양칸(김기현 선생의 말씀으로는 차양칸의 기둥은

        참죽나무라고 한다.)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차양칸은 창덕궁 연경당, 강릉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 그리고 전남 녹우당의 사랑채 등 모두 4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 곳에 차양칸이 설치된

        모습을 보면 모두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이곳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차양칸을 설치하는

        시기에 집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뒤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여기서 당진으로 출발 왜목마을로 들어가려 했는데 날이어두어저 삼일포항에서 탠트치고 하룻밤

                      낙시꾼들 틈새에서 지내게된다

                                                               삼일포항 빨간등대도 불을 밝히고

                                            여기저기 낚시꾼들이 진을치고 있는데 자는건지 낚시를 하는건지

                                                        여기저기 먹자판 벌여놓고 소란스럽다

                                               모두들 낚시하러온 사람들로 초만원 탠트 치는것도 용이하지 않다

                                 시끌벅적 불야성인데 나야 관련없는 사람 하룻밤 자고 가면 끝이다 일찍 잠자리에든다

                                             아침에 눈비비고 일어나니 왠걸 벌써 해가 왜목마을 위로 솟아오른다

 

                                                         삼일포 항에서 바라본 아침풍경

                                        휴일이라 많은 차량들이 들이닥처 주차공간도 없다 길거리도 차로대만원

                                      간단히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때우고 왜목마을로 출발 이렇게 가까운곳이었으면

                                      왜목마을에서 야영하고 일출을 볼걸

 

 

클래식과 함께 하는 잔잔한 휴식 01. 멘델스존 : 바이올린 협주곡 02. 포레 : 시실리안느 03. 슈베르트 : 세레나데 04. 쇼팽 : 야상곡 1번 05.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폭풍 06. 슈만 : 추억 07. 바흐: 사라방드 08. 바흐 : 플루트 소나타 E Flat장조 09. 알비노니 : 아다지오 10. 레스피기 : 시실리아노 11. 리스트 : 로망스 12. 쇼팽 : 전주곡 A Flat장조 13. 드보르작 : 미뉴엣 A Flat장조 14. 차이코프스키 : 현을 위한 세레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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