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점인 추령터널(추원마을) 입구에 '왕의 길' 이정표가 보인다.
신문왕
재위 681∼692.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자는 일초(日招). 문무왕의 장자이며
664년(문무왕 4)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고 왕비는 김씨로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일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아들을 못 낳은 데다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년(신문왕 3)에 다시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의 활동
신문왕대는 태종 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波珍飡) 흥원(興元),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반란의 원인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신문왕비인
그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실과 모반사건 바로 전에 진복(眞福)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사실에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연루되었는데 신문왕은 주동자 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하게
숙청하였다.
문무왕 때 상대등이던 이찬(伊飡) 군관(軍官)의 경우 반란 모의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살해되었다. 반란사건에 대한 불고지죄(不告知罪)로 군관과 같이 막중한 지위의 귀족을
숙청한 것은 근거가 미약해 보인다.
신문왕이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가 위해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한 조처로 여겨진다.
이러한 신문왕의 의지는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 반포된 교서(敎書)에 잘 반영되어 있다. 682년에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도 위의 모반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만파식적에는 김흠돌의
반란과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전제왕권하의
신라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같은 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卿) 1인을 두었다. 진덕여왕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大舍)라는 관직을 설치함으로써
국학설립을 위한 준비가 착수되기 시작했고 신문왕대에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늘어난 중앙관서의 업무와 영역이 확대된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位和府令)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또 공장부감(工匠府監)과 채전감(彩典監)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例作府卿)
2인을 두었다.
687년에는 음성서장(音聲署長)을 경(卿)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船府卿)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舍知)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史)와 함께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 통치제도의 경우 689년에 왕경(王京)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해 위하여 685년에 서원소경
(西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을 설치했다.
한편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주)으로 바꿈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해 온 군정적(軍政的) 성격의 주(州)도 685년에
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와 청주(菁州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 영토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州制)를 비로소 완성하였다.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군·현을 정비하였다.
중앙의 군사조직의 경우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백제·보덕국 및 말갈인을 두루 포섭하여
9서당(誓幢)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동시에 689년에는 관리에게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歲租)를 차등 있게 지급해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은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이와 같은 중앙 및 지방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해 전제왕권 중심의 통치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687년에 직계조상인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廟制)를 확립하였다. 이는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뜬 것이다.
692년에는 당나라로부터 무열왕의 묘호(廟號)인 태종(太宗)이 당나라의 태종에 저촉된다는 외교적
간섭이 있었으나, 무열왕의 업적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라 논함으로써 문제를해결하기도 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낭산의 동남에 있다.백과사전에서
모차골을 따라 걸으면 군데군데 이정표가 길을 알려준다.
토함산은 불국사를 품은 경주의 동악(東岳)으로, 함월산과 마주 본다. 두 산 사이를 구불구불
넘어가는추령은 예부터 경주 시내와 동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다. 신문왕 호국행차길의
출발점이 바로 추령터널 앞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지 골짜기에 펜션이 몇군데 있다
신문왕 호국행차길 안내판이 서 있는 곳에서 본격적인 오솔길이 시작된다.
왕의 길 이정표를 따르면 좁은 시멘트 길이 나온다. 여기가 모차골인데, 마차가 들어올 수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길은 인자암 앞에서 호젓한 흙길로 바뀐다. 숲으로 들어서니
비밀의 화원에 온 느낌이다. 길섶에 서어나무, 느릅나무, 오리나무, 까치박달 등 활엽수가
늘어섰다. 그 사이를 유유히 걸으면 왕이 된 기분이다. 조붓하고 정겨운 오솔길이 졸졸 흐르는
계곡을 끼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수렛재를 넘는다
수렛재로 가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호젓한 오솔길이다.
신문왕은 수레에 올라 수렛재를 넘었다. 덜컹거리는 수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681년 무렵 정국은 어지러웠다.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고,
백제와 고구려의 독립을 꿈꾸는 세력이 끊임없이 활동했다. 수백 년 동안 신라를
괴롭혀온 왜구의 준동도 늘 두통거리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도 나누어 먹고
산에는 나무잎도 다지고 나목의 앙상함만 남아있다
수렛재 일대는 울창한 활엽수림이 펼쳐진다.
신문왕은 여러 재난을 극복하고 백성을 통합할 새로운 신화가 필요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아버지에게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문왕은 682년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감은사를 완성하고, 이듬해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대왕암을 찾기
위해 행차에 올랐다.
수렛재에는 마지막인듯한 단풍나무 한그루가 붉은색으로 버티고 서있다
국수나무의 단풍도 이렇게 곱게 물들었다
신문왕 호국행차길의 최고 절경인 용연폭포
신문왕이 아버지가 잠든 대왕암(문무대왕릉)을 찾아간 '신문왕 호국행차길' 걷기는 신라를
새롭게 만나는 방법이다. 그 길에는 통일신라 격동의 역사와 만파식적 신화가 담겨 있다.
궁궐을 출발한 신문왕의 행차는 토함산과 함월산 사이 수렛재를 넘어 천년 고찰 기림사에
이른다. 수렛재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오르는 유순한 길로, 울창한 활엽수림이 장관이다.
중간에 만나는 용연폭포는 용의 전설을 품고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수렛재를 넘으면 시원한 용연폭포를 만날 수 있다.
다시 길을 나서 완만한 길을 내려오면 시원한 계곡 소리가 반갑다.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에는 높이 15m나 되는 바위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용연폭포가 쏟아진다.
폭포 양쪽에 거대한 절벽 바위가 감싸 더 웅장해 보인다.로이님의 글중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인증도하고
아직 산에는 붉은빛이 가시지 않고
빨리핀 억새는 꽃씨를 날려보내고 있다
내려오니 이렇게 검붉은 단풍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왕의길을 끝내고 이제 기림사 경내로 진입한다
끝이 없는길 -박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