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달려와 병암정부터 들려봅니다 밭뚝에는 지칭게도 활짝피었습니다
연목이 있고 섬이 있고 절벽이 있는 병암정
연뭇 한가운데는 '석가산'이라 불리는 작은섬이 있다
병암정은 구 한말 명성왕후와 아주 가까웠던 양주대감(이유인)이 용문에 정착하여 1897년 세운 정자라고 하며,
처음에는 옥소정이라 불렀습니다만, 나중에 병암정(屛巖亭)이란 이름으로 개명되었고, 그 뜻은 병풍처럼
바위가 섯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병암정에 올라 오미봉쪽을 올려다보면 용문이 왜 전국의 십승지 중에서도 제일가는 천하의 명당인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라는 내용이 조선시대 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한성판윤(서울시장), 법무대신을 역임하고 주로 명성왕후의 밀명을 수행했던 이유인이 용문에 정착한
사연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이유인은 풍수지리설에 기초한 정감록의 내용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용문에 자리 잡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천신문에서
별묘
별묘의 사당
별묘는 병암정 우측에 있다.
별묘는 3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으로 원래는 인산서원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되자
사당만 이곳으로 이건 하여 권맹순, 권오기, 권오복, 권용은을 봉사하는 벌묘로 사용되고 있다
국수나무도 만개 했습니다
양주대감(이유인)이 용문에 들어와서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강제 부역등 횡포를 많이
부려 지역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명성왕후 사망(1898년) 이후에 정치적인 권력의 힘이 쇠퇴하고,
1907년 사망한 이후 옥소정은 완전히 방치된 상태에서 예천권씨들에 의해 병암정으로 개명되고,
예천권씨 조상을 모시는 별묘 건물이 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병암정은 금당실의 양반가문인 예천권씨의 조상을 모시는 별묘가 있는 관계로 일반인
들의 접근이 다소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최근에는 병암정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긴 하나, 이곳을 찾는 이유가 병암정이 최근에 `황진이'라는 TV드라마
촬영장이였다는 사실만 알고 찾아온다는 것은 병암정의 역사적 의미는 전혀 도외시된 부끄러운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예천신문에서
KBS 드라마 ‘황진이(2006년)’의 주요 촬영무대였던 병암정(문화재 자료 제453호) 특히 병암정에서는 황진이
(하지원 분)와 김은호(장근석 분)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명장면들이 많이 촬영되었는데, 김은호와 황진이의
첫 키스 장면과 김은호가 반지를 실에 끼워 황진이에게 전하는 장면 등이 모두 이곳 병암정에서 촬영되었다.
현재 병암정에서 드라마 세트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감동만은 아직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눈앞에 병풍 같은 병암이 우뚝 서있다. 의젓하고 빙하처럼 차가운 바위다. 그 위에 담장으로 몸을 가린 건물
한 채가 놓여있다. 병암정이다. 이유인은 구한말 중인 출신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업고 경상감사
, 한성판윤, 법무대신 등의 요직을 맡아 승승장구했던 인물로 일본과 맞선 항일 운동가였고 덕수궁의 수리를
맡았던 건축가이기도 했다. 병암정은 그가 낙향하여 지은 것으로 그때의 이름은 옥소정이었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고종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는 귀양살이 도중 의문사했다고 전해지는데 고종의 죽음을 들은 후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꽤 경외심과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입신출세와 재산형성
과정에서 수많은 의혹과 지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옥소정 건립 과정에서 강제로 부역을 동원하는
등의 권력행사로 원성을 샀다고 한다. 그가 죽자 예천 권씨 문중에서 옥소정을 사들여 병암정이라 이름을
고쳤고 독립 운동가였던 권원하가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곁에는 별묘를 세워 선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병암정 절벽 아래는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아주 자그마한 섬이 있다. 몇 해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황진이’에서 이곳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섬에는 정자가 서있었고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다.
황진이는 이곳에서 첫사랑인 도령과 처음 만나고, 첫 키스를 하고, 반지를 받았다. 다리와 정자는 철거된
상태다. 그때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오늘, 병암정 연못은 경악스럽고 허탈하다. 물과 섬은 가장자리가
작도되어 돌덩이들로 꽁꽁 매여졌다. 연못은 목욕탕 같고 섬은 밥그릇에 담긴 고봉밥 같다.
유혜숙님글에서
경북 예천군 용문면 성현길 22-39
초간정은 1582년 조선 선조 15년에 초간(草澗) 권문해 선생이 세운 정자다. 초간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분으로 총 20권에 달하는 책의 완성에는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 완성이 1589년, 그러니 초간정은 선생의 그 길고 치열한 작업과 시간적으로 함께하면서 공간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내려두는 휴식처이자 수양처로 자리했을 것이다. 긴 시간 뒷수발을 감내했던 부인이 사망하자
1591년 초간 선생도 세상을 뜬다.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동운부군옥’고본과 초간정은 소실된다.
초간정은 1612년에 중건되었지만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탔다. 그 사이 ‘대동운부군옥’은 필사본으로만
남아 땅에 묻혔다. 그것이 빛을 보게 된 것은 1790년 7세손이 판각 작업에 나서면서부터다. 1836년에는
8세손에 의해 46년 만에 677장의 판목이 완성된다. 그리고 1870년 고종 7년에 초간정이 중창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그때 중창한 것으로 선생의 원고 등을 보관하기 위해 후손이 기와집으로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계류가 바위를 감돌아 흘러가는 모서리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초간정은 마치 계류에 한쪽 팔을
늘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계자난간 바로 아래로는 수직의 석벽이 있어 이곳에
기대면 계류가 한눈에 보인다.
초간정은 풍류나 안식을 위해 지은 정자가 아니다. 조선시대 정자는 보통 관직에서 은퇴한
사류가 노후의 안식을 위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세와 탐욕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은일하고자 하는 은둔자에 의해 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이나 은일과는 전혀 다른 학문과 집필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 정자가 있다. 오롯이
묵향으로 가득 찬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초간’이라는 뜻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시 〈저주서간(滁州西澗)〉의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
(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관향이 예천이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그는
유년 시절에 아버지 권지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았다. 초간의 행장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글을 읽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총명함이 넘쳤다고 한다. 일례로 역사서를 읽으면 눈에
한 번 스친 것은 모두 기억하는 능력을 지녀 인물의 성정, 문장, 내용의 높고 낮음에 대해
일별로 모두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우 문연(文淵)과 함께 용문사에서 공부할
때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혹독하게 매진하여 늘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모자랐다고 한다.
가학에 통달한 권문해는 1546년 한서암(寒棲庵)으로 가서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다.
총명한 두뇌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그는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며, 명종 15년(1560)
별시문과에 병과로 대과 급제한다.
권문해는 명종조부터 선조에 걸쳐 벼슬길에 나갔다. 우부승지, 좌부승지, 관찰사, 목사
등의 중앙관료와 지방수령을 역임했다. 그는 공주목사직을 사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기 위해 초당을 짓는다. 이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1582년 그가 49세 되던
해 완성한 초간정은 그의 종가에서 약 2km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금곡천 계류가에
조성되었다.
노구의 권문해는 초간정에서 집필에 몰두하여 56세 되던 1589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되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완성한다. 초간은 일찍이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잘 모르고 있어 이를 한탄했었다. 이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물건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의 남의 것만 주시하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우리나라 역사와 사적을 담은
백과사전을 만들 뜻을 일찍이 품은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은 20권 20책으로 은나라 음사부의 《운부군옥》을 본떠 단군에서
조선의 선조까지의 사실을 지리, 역사, 문학, 철학, 인물, 예술,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총망라한 방대한 저작이다. 초간은 이외에도 초간정 원림에서 《초간일기》, 《초간집》
, 《선조일록》, 《신묘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긴다. 《대동운부군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쓰인 것으로 선조 이전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 책의 판각이 보물 제8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때쭉나무
대동운부군옥》
현존하는 유일한 초간본이다. 책명에서 ‘대동’이라는 말은 ‘동방대국(東方大國)’, ‘운부군옥’은
운별로 배열한 사전이라는 뜻이다.
초간정의 형태는 매우 특이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로서 진입하는 마당 방향에 2칸이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4칸은 대청마루로 온돌방을 두르고 있다. 이 마루는 밖에서
보면 마치 누마루와 같은 느낌을 준다. 마루의 가장자리에는 계자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누마루에서 밖을 바라보면 암반을 굽이쳐 흐르는 계류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는 계류에 바로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다. 정자의 북쪽 편액에는 석조헌(夕釣軒)이라
쓰여 있는데 ‘저녁 무렵 낚시하는 마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종일 집필에 몰두하고 난 후
석양에 낚싯대를 계자난간에 걸쳐놓은 초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초간정의 정문 방향에는 초간정사(草澗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사란 학문에 정진하는
집을 뜻하는 말로 초간정의 본래 이름이 초간정사였다. 정자를 지은 후 대사간을 지낸 박승임
(朴承任, 1517~1586)이 정자의 이름을 ‘초간정사’라 지어 직접 글을 써서 보냈는데 지금 정자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초간정과 별채 사이에는 담으로 가로막아 엄격하게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학문을 위한 공간인 초간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이 잠겨있어 밖에서만 들여다 봤네요
환상적인 송림과 함께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초간정을 부러 멀리하며, 정자의 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끔흘끔 보일 때까지 내려간다. 그 즈음 개울을 가로지르는 좁은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한 사람만이 지나갈 정도의 너비다. 다리 위 한가운데에서 물과 바위와 숲과 초간정의 조각을
바라보고 다시 숲을 크게 휘돌아 초간정이 선택한 자연과 자연이 허용한 정자를 이리보고
저리 본다. 이곳의 본질적인 사명은 매혹하여 평온을 주는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머리와
가슴 잔잔하여도 반하고 탐하는 데 부끄러움 없었다. 유혜숙님글에서
기암 위에 절묘하게 지어진 초간정은 정자가 조망 대상으로서 아주 빼어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초간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재건되었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탄 것을 고종 7년(187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정자가 불탔을 때 초간정사의 현판이 정자 앞 늪에 파묻혀 있다는 말이
전해졌는데, 늪에 오색무지개가 영롱하여 종손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현판이 나왔다고 한다.
사라브라이트만노래 2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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