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세거지의 역사는 약 200년이 되었고, 유교적인 문화가 남아 있는 씨족 마을이기에 안동마을과 비교가
되곤 하는 곳이다. 문익점의 후손인 문경호가 가족을 이끌고 자리를 잡은 곳이며 그 이전에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이들이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남평문씨만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인흥마을에는 주택 9채, 공공건물 3채가
독특하게도 우물 정(井)자로 된 구획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인흥 마을의 한옥은 고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모두 1910년대에서 40년대까지 지어져서 비교적 새 한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 가옥의 예스러움과 ㄱ자, ㄷ자, ㅁ자 등 다양한 구조로 각자의 멋스러움도 뽐내고 있다.
마을 전체는 200~300년 된 다양한 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마을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더해준다.
문익점 후손답게 집앞에는 목화를 재배하고 있다
수백당守白堂
우당 유창환(愚堂 兪昌煥.1870~1930)
청렴 결백을 지키는 의미 입니다.
우당 유창환(愚堂 兪昌煥.)
"본관은 기계(杞溪). 초명은 명환(明煥). 자는 주백(周伯) 또는 준백(準伯), 호는 우당(愚堂)·
육일거사(六一居士)·홍엽산방주인(紅葉山房主人)·성동초자(城東樵者). 경사(經史)와 백가
(百家)의 책을 익혀 문장에 통하였으며,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있었다 한다.
글씨는 각체를 두루 하였는데, 특히 초서가 돋보여 호건유창(豪健流暢)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번 입선하였다. 필적으로 경상남도 사천의 「침산정기덕비(枕山亭紀德碑)」,
서울의 「이종석송덕비(李鍾奭頌德碑)」·「한규설묘표 韓圭卨墓表)」 등이 있다."(다음 백과)
사백루思白樓
명나라 서예가 문징명(文徵明.1470~1559)의 글씨를 집자
사백思白은 결백을 생각한다(문명박선생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선생의 아호인 수백당守白堂의 백白을
취한것으로 추정 합니다
인수문고로 통하는 유예문(遊藝門)
이문을 통하면 많은 문중의 책을 모아놓은 서고인 인수문고(仁壽文庫)와 중곡서고(中谷書庫)가 있다
대 100년에 걸쳐 이루어놓은 문중문고를 1982년 따로 인수문고라는 현판을 달아 놓았다고 한다
인흥마을에는 중요한 건물이 세 채가 있다. 광거당은 마을의 재실이고, 수봉정사는 손님을 맞거나 공적인
모임을 가지는 건물이다. 그리고 마지막 인수문고는 보기 드문 문중문고로써 민간의 문고 중 질과 양적인
면 모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수문고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한 것은 1910년경으로 일제치하
교육기관이 아닌 문중에서 직접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거의 만권에 가까운 책들이
오동나무함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으며 전집의 역시 한 권도 빠지지 않은 완질본으로 되어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이 마을을 걷다 보면 걷는 걸음과 행동 역시 음전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을의 아름다움과
유교문화의 진수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거경서사居敬書舍
혜사 노재봉(惠史 盧在鳳.1936~). 전 국무총리窮理
거경居敬은 궁리窮理와 함께 주자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뜻이라고 합니다
인수문고에 소장된 서책을 열람閱覽 및 훈고訓詁를 위한 목적으로 1982년에 세웠다
경유당敬遺堂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1880~1930)
경유敬遺는 선현의 업적을 공경한다는 의미.
위창과 수봉정사에 관해서는 맨위 2003년에 겁없이 개인적인 견해를 밝헜습니다
대문에는 거북이 모양의 잠금장치가 있는데 왼쪽에는 곤괘 오르쪽은 건괘가 색여저 있다
장수와 음양의 조화가 아닐까 ?
거북빗장둔테
등에는 새긴 건(乾)괘와 곤(坤)괘를 새겼습니다.
건(乾.三)은 南,火.陽이며, 곤(坤.三+三)은 北,水.陰을 상징합니다.
즉, 거북은 장수,화재 비보 외에도 음양의 조화를 갖춘 집이며,기자(祈子)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갓된다
수백당을돌아보고 마을을 둘러보기위해 골목으로 접어든다
일명 선비나무, 학자나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모습은 노거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좋은곳에 터를 잡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도록 한 입향조 인산재를
기리기 위하여 문경호(文敬鎬)나무라고 이름 지었다광거당(廣居堂)과 밭둑에도 같은 크기의
회화나무가 있어 마을 밖에서도 눈에 띄어 인흥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수백당을나와 첫번째 맞이한 사죽헌(思竹軒)이다 전 대구시장을 역임한 문희갑씨 집이라함
골목에 들어서니 진사님들이 모델을 상대로 샷다를 눌러대는데 들어갔다 어리벙벙 미안해하고 있는데
빨리와서 앞에 앉으란다 졸지에 찍사가되어 덩달아 나도 샷다를 연속으로 눌러댄다
선비와 숙녀 동양과 서양 뭔가는 조금 이상한것도 같고 ㅎㅎ
블친님들 이정도면 그냥 봐줄만하지요 모두들 연속촬영하는데 나는 한장한장 아마추어 수준으로
찍었습니다 삼각대가 있었으면 더 선명할건데 아쉽지요
조선 후기의 전통 가옥 아홉 채와 정자 두 채를 포함하여 총 70여 채 250칸 전부가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
민속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 아홉 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이 살고 있다
. 재산 중에서 인흥 마을의 아홉 채 주택만큼은 현행 법률에 상관없이 반드시 장남에게 상속하고 있을 정도로
장남 상속의 원칙이 현재에도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다. 더불어 문중 내규에 외부인에게 집을 파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는 뜨내기가 함부로 들어와서 살 수 없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1840년 전후 입향조 문경호가 인흥 마을에 터를 잡은 이래로 남평 문씨들만이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대가족 중심의 대규모 집성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광거당(廣居堂)
1873년(고종 9)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 부자가 지은 건물로 문중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
정면 4칸·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ㄱ’자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전면 좌측 3칸에 전퇴가 설치되었고,
우측 1칸 앞으로는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는데 누마루는 툇마루보다 1단 높게 만들어졌다
조선 후기 이름난 서화가이자 문신이었던 석촌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쓴
광거당(廣居堂)’이라는 편액이 전면에 걸려 있고
누마루 바깥쪽에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 누마루 안쪽에 ‘고산경행루(高山景行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수석노태지관'은 추사 김정희 글씨체이며 '고산경행루'는 장건의 글씨체이다
고택들은 거의가 문이 잠겨있고 수백당만 개방되어있다
남평문씨인흥세거지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주황빛을 띄고 있는 황토로 세워진 담에 박혀있는 색색깔의 돌맹이들과 얹혀있는 기왓장은
길이 참 예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게다가 보통은 먼지 방지와 편리라는 미명하에 콘크리트로 포장을 하게 마련인데 이곳은
여전히 흙길이라는 점이 아주 좋습니다
담장넘어로핀 능소화는 많은 진사들의 아름다운 모델이 되고 있다
마을앞 연못에 연꽃도 담아봅니다
조성을 근래에 해서 고풍스런 멋은 없습니다
마을앞 은행나무 아래에서는 해설사가 관광객을 상대로 열심히 설명을하고 있습니다
모델과 촬영진이 타고온 차량들
이곳 인흥골 남평문씨 세거지는 원래 고려시대 인흥사仁興寺라는 절이 있던 폐사지 터였습니다.
인흥사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스님께서 1264년 포항 오어사에서 옮겨와 중창한
사찰인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이 곳 인흥사에서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를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수인의 파랑새의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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