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2호.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1405년(태종 5)에 지어져 광해군 때부터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화재로 몇 차례 중건과정을 거쳤고 일제강점기에 변형을 거쳤다.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이고 궁궐 내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양쪽의 월랑이 'ㄷ'로 감싸고 있다. 마당 안에는 임금이 걷는 길이 있고, 북쪽 끝
중앙 월대 위에는 인정전이 자리한다. 인정전의 동북쪽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창덕궁의 북쪽 터에는 금원이라 부르던 후원이 있다.
창덕궁에 있는 인정전·돈화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선원전 등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문
창덕궁 후원에는 부용정이 있으며 가을 단풍이 아주 좋은 곳인데 오늘 입장 예약은 마감이 되었다고 한다
2022년도에 방문했을 때 사진
상량정
낙선재
조선 제24대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며 창살과 벽체의 무늬,
평원루(平遠樓)의 건축양식 등에서 청나라의 영향이 엿보인다.
낙선재 화계 뒤편에는 칠분서, 삼삼 와, 승화루와 중국품의 육각형 정자인 상량정이 있다.
이들 건물들은 낙선재 뒷편에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속한 건물들로 서적 등을
보관하고, 학문을 논하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도심 속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인증숏을 날리는 사람들 때문에 한참을 기다렸다
석복헌
경빈의 처소였으며 순정효왕후가 기거하던 곳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썼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시던 곳이다. 후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던 곳
낙선재
수강재에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제23대 순조의 왕비)가 거처하였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대한제국의 덕혜옹주가 말년에 폐인이 되어 귀국하여 한 많은 여생을 마친 곳이다.
위는 백당나무열매 아래는 덜꿩나무열매
낙선재(樂善齋)는
임금이 머물던 곳이지만,
궁궐같지 않게 소박하고 검소하며 구석구석 아름다움이 베인 곳이다.
낙선재는 1847년에 지어진 본래 이름은 낙선당으로
창경궁에 속했으나 지금은 창덕궁 건물로 조선 24대 헌종이 1847~1848년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낙선재 권역은 보물 제1764호인 낙선재와 동쪽의 석복헌,
그 옆의 수강재 등 총 9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왕의 연침공 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정각 일원은 세자가 일상생활을 하던 동궁(東宮)이 있던 곳으로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에는 중희당(重熙堂)이 있었고,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차 답사시에는 희우루(喜雨樓) 앞에서 때마침 소나기를 만났다. 기쁨을 주는 비는 아니었다.
좌측 건물들은 선정전과 희정당 우측 건물은 동궁 전
보춘정
성정각 오른편에는 사대부 사랑채나 정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누마루를 세워 놓고 있다.
앞면 1칸 옆면 3칸의 건물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라고 현판을 달았다.
여름 동안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경연이 열리거나 손님을 맞는 장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희정당(보물 815호)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좁은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편전으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의 화재를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건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전면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희정당 앞의 정원에 있는 화살나무
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은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연산군 2년 궁내의
숭문당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되었다.
희정당 내부
대조전은 지금 수리 중
2015년도에 담았던 대조전
희정당 앞 화단에 피어 있는 용담
선정문은 왕이 선정문에 나와 백성과 친히 대화를 나누고 베풀던 문
선정전(宣政殿)
선정 전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창덕궁의 공식적인 편전이다. 이곳에서는 3품 이상
당상관들이 국왕과 함께 정치를 논하는 곳이다. 국왕이 이곳에서 신하들과 정치를 논할 때 사관이 국왕의
좌. 우에서 사초를 기록하였 하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아래에 있던 ‘인경궁’ 건물을
헐어 중건한 것을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한다. 선정 전은 또한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색 유리기 와를 얹은 건물인데, 중국에서 ‘회회청’이라는 안료를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계 공포에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으며, 출입문과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선정전용상
드므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서 화마가 물에 비친 제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 의미가 큰 방화수통이다
희정당 앞에 있는 소나무정원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은 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 선정전 서행각에서 난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 후, 철종 7년 해체·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은 정조 6년에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인정전 용상
인정전 내부 모습
인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813호.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처음 창건된 것은 1405년(태종 5)으로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
이 건물도 1744년(영조 20)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연소되어 좌우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에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숙장문은 왕이 친국을 하던 곳이라 한다
궁궐의 외조 권역에서 내전을 볼 수 없게 만든 문이다.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추어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배치가 경복궁처럼 질서 정연하지 않다. 그래서 돈화문을 지나 진선문으로 들어서면 정전
인정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전 영역이 바로 보인다. 따라서 이를 가릴 담장과 문이 필요하여 지은 문이다
호위청은 인조원년 궁중을 수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군대다
대장은 공신이나 척신 혹은 국구(왕의장인) 맡았다
창덕궁 정청(政廳)은 이조와 병조에 속한 사무용 건물로 ‘정청(政廳)’은
정무를 보는 관청’이란 의미이며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전관(銓官)이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보던 곳이다. 여기에는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병조 당상관(堂上官), 병방 승지(吏兵房承旨), 사관(史官) 등이 참예하여 관리의
전형(詮衡) 임면(任免) 출척(黜陟) 등 인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처리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동전(東銓: 이조)의 정청(政廳)은 사라진 연영문(延英門)
안에 있었고, 서전(西銓: 병조)의 정청(政廳)은 빈청(賓廳) 서쪽을 빌려 썼다고
되어 있다. 동궐도에는 연영문(延英門) 동쪽 행각과 인정문 서쪽 행각에
각각 정청(政廳)이 조성되어 있다
금천교
창덕궁의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중문인 진선문 사이에 위치한다.
금천교 밑을 흐르던 창덕궁의 금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한 '북영천(北營川)'이다.
원래는 지금의 청계 3가 부근에서 청계천으로 바로 합류했다. 그러나 1421년(세종 3년)에 원래 종로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회동천의 물길을, 범람을 이유로 동쪽의 옥류천과 만나게끔 바꾸면서 북영천
역시 회동천에 흘러들었다.
지금은 창덕궁 경내와 원서동 빨래터 일부를 제외한 전 구간을 도로로 덮어놓았다.
창덕궁의 중문이다.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있다
진선(進善)' 뜻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한 말(善)을 아뢰다(進)'이고 다른 하나는 훌륭한 사람(善)을
추천한다(進)이다. 즉, '훌륭한 인재들을 모으고, 이들이 임금에게 선한 말을 아뢰어 좋은 정치를 하기
바란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그 유명한 신문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백성이 두드리면 왕이 직접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고 처리하도록 한 것인데,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 안으로 들어와서 쳐야 하는 문제 때문에 잘 쓰이지 않다가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
궐내객사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객사라고 부른다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등이 중심 시설이다 대부분 건물이 일제강점기에 소멸되었다가
2005년 복원되었다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와 경관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이 밀집
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돈화문 밖 거리의 은행나무
돈화문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완성 7년 후인 태종 12년(1412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원년(1608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되어 있다.
1963년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
돈화(敦化)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는 뜻으로 《중용》 30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임금의 큰 덕으로 백성을
돈독히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돈화문밖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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