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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인왕산 자락길과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 올랐다가  이곳 경복궁으로 왔다 

8년 만에 다시 와보는 경복궁이다(10/21)

버스에서 내리니 골목골목마다 한복 입은 관광객들로 만원이다

아마 이곳주위에 한복 대여점이 몰려 있는 것 같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조금씩 물들기 시작을 했다

수문장 교대식이 있는 것 같다 거의 끝나갈 무렵에 도착을 했다

주위에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으면 다 보는데 아쉽다 

지금 퇴장 일보직전이다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

휘 홍력弘曆을 피휘 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복궁을 처음 건축한 1395년(태조 4년)에는 오문午門이라고 했는데 곧이어 정도전이 정문正門으로

개칭한다. 이후세종 8년)에는 집현전 수찬修撰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는데, 영제교일화문월화문광화문건춘문영추문과 함께 이 문의 이름을 홍례문

弘禮門이라고 지었다

외국인들 모두 다 한복을 입었다 

우리가 외국에 가면 옵션을 걸어 몇 개씩 특판을 해주듯

여기서도 옵션으로 한복을 입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보(1985.01.08 지정). 1395년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되었다.

근정전은 2층의 목조건물로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곳이다. 2단으로 된 월대 위에 자리하며, 월대 주위의

돌난간에 새겨진 12 지상은 정전 수호의 의미가 있다. 월대 주위를 둘러싼 직사각형의 회랑은 홍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과 사정문의 좌우에도 이어져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 융문루, 서쪽에 융무루,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과 협의문이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문루인 근정문의 좌우에 일화문과 월화문을 두어 권위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크며,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근정전 용상 (임금이 앉던 자리)

사정전

경복궁 사정전 (景福宮 思政殿)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근정전에서 업무 하지 않을 땐 사정 전에서 하였고 추울때도 사정전에서 했다.

이곳은 원래 아침조회를 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에서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사정 전은 왕이 평소에 거처하며 정무를 수행하는 편전으로 정전인 근정전과 함께 치조의 중요한 건물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당시의 외관이 잘 남아있고, 편전의 위엄을 지닌 공포짜임을 비롯한 구조양식

전반과 기능 충족을 위한 공간구성 등의 면모를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강녕전

경복궁의 건물로,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도 사람이므로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했다.

강녕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쉽게 말해 왕의 이다.
편전인 사정 전의 북쪽중궁전인 교태전의 남쪽에 있다.

조선 초 재상이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강녕(康寧)'은 말 그대로 '편안함'을 뜻한다.서경(書經)》 - 〈홍범〉편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원칙

나오는데, 거기서 언급한 다섯 가지 복(오복: 五福)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에서 따왔다.
'강녕전'으로도 알려져 있다. ''을 '령'으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활음조 현상 때문이다. '寧'의 앞 글자에 받침이 없는 경우 '녕'으로 발음하기 힘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쓰는 것일 뿐이다.

강녕전의 경우, '녕' 앞의 글자 '강'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 강녕전으로 읽는 것이 맞다

강년 전 내부 

교태전

의 건물로 왕비의 정식 침전, 즉 중궁전이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의 북쪽에 있다. 광화문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심축의 제일 끝을 장식하는 건물이다.

이름은 《(周易)》의 64괘 중 '11괘'인 '태괘(泰卦)'의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했다.

태괘는 위에 음(陰)을 상징하는 곤(坤, 땅), 아래에 양(陽)을 상징하는 건(乾, 하늘)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내려가고 올라가면서 만나 교통(交通)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남자, 양)과 왕비(여자, 음)가 서로 잘 지내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후술 하겠지만, 교태전은 원래 중궁전으로 기능했던 곳이 아니다.

조선 초기에 처음 지을 당시에는 임금과 신하가 만나 정사를 돌보고 유희를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저기서 말하는 음양을 여성, 남성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신하와 군주로 풀이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교태전 내부

 

교태전의 외부 담장에는 귀갑문(龜甲紋)과 만자문(卍字紋), 무시무종(無始無終), 회문 양(回紋樣) 등

문양과 장(張)·춘(春)·만(萬)·세(歲)·귀(貴)·부(富)·락(樂)-'오래도록 즐겁게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글자를 새겼다.

자경전 주변에는 공터가 넓어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자경전 꽃담의 그림 속에는 다른 곳과 달리 나비가 많이 등장합니다.

나비는 엄동설한을 지나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에 찾아오는 '봄의 전령사'로서,

자유·사랑·화목·즐거움을 상징을 한다.

흔히 사랑하는 연인을 꽃과 나비에 비유하지요.

그래서 나비는 금슬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자경전과 교태전의 꽃담에는 꽃과 나비를 조합한 화접문양(花蝶紋樣)이

많아 화려한 장식효과가 돋보입니다. 화접문양 속의 나비는 국화·모란·연꽃 등과 함께 등장하여

장수와 자손번창과 부귀영화에 대한 염원을 상징이다. 좋은 사람 호인 님 글에서

 

대비가 거처하는 자경전의 서측 꽃담에는 벽돌을 이용한 문양 이외에 별도로 제작한 8점의 그림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흰색 회벽에 검붉은 소조 편(塑造片)으로 사군자(四君子) 등 초목을 묘사한 것인데, 흰색 바탕에 붉은색

벽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매화 복숭아 석류 모란 국화 진달래 대나무 등이 그려져 있다

 

왕비(王妃)가 거처하는 교태전(交泰殿)과 대비(大妃)가 거처하는 공간인 자경전(慈慶殿)에는

문양과 글씨를 새겨서 아름다움과 함께 장수와 자손번창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염원을 담았다.

자경전 굴둑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둑 같다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자경전의 뒤뜰 샛담의 일부분을 굴뚝으로 만들고 뒷마당을 향하는 외벽 중앙부를

장방형으로 구획하였다. 그리고 여러 개의 벽돌로 십장생 무늬를 짜 맞춘 뒤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 굴뚝은 담장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 위에 벽돌로 쌓았다.

 

그 위로는 중앙에 용문 전(龍文塼)을, 좌우에는 학문 전(鶴文塼)을 끼웠는데 이 학들은 영지(靈芝)를 입에 물고 있다.

윗부분에는 소로[小累]·창방(昌枋)·첨차(檐遮)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이었다.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 굴뚝 위에 꾸밈으로 얹은 기와로 만든 지붕모양의 물건)를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경복궁 자경전(景福宮慈慶殿)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고종 4년(1867년) 대왕대비 조 씨를 위하여 경복궁에 지은

전각으로, 고종 10년 12월 화재로 불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다시 지었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 자경전은 왕비의 정침인 경복궁 교태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大妃)로 승격되어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주로 사용하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재의 자경전은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자미당(紫微堂) 터에 조대비(趙大妃, 神貞翼皇后)를

위해 지은 것이다. 준공 후 고종 10년(1873년) 12월 화재로 인해 고종 13년 다시 세웠으며, 다시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하였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몇 백 년 된 소나무가 치료를 받은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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