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학교에서 조금만 걸으면 창경궁 정문 홍화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작년에도 이곳을 통과했는데 금년에도 홍화문으로 들어간다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지어졌고,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그 뒤 1834년의 보수 등 여러 차례의 수리를 겪었으며 1961년 이후의 거듭된 단청공사로 옛 아름다움을 잃었다.
이 문은 정면 3칸(13.35m), 측면 2칸(6.48m)의 2층 우진각지붕건물로, 창경궁(昌慶宮)의 정문(正門)이다.
문 양옆으로 궁장(宮墻: 궁궐을 싸고 있는 돌담)이 이어져 있고, 그 끝에 십자각(十字閣)을 두어 행각(行閣)과
연결하였으며 행각 가운데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각(水閣)을 마련하였다. 물길 한복판에는 옥천교(玉川橋)를
걸쳐놓아 명정문(明政門) 쪽으로 가는 통로로 삼았다.
지붕 위에는 회반죽을 바른 높은 마루를 만들고 용마루에는 용을 돋을새김 한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여 건물의 위엄을 나타냈다.
창경궁 후원광장
창경궁 옥천교(玉川橋)
창경궁(昌慶宮)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안쪽 명당수(明堂水)가 흐르는 어구(御溝: 대궐에서 흘러나오는 개천)
위에 설치한 돌다리로, 1483년(성종 14)에 세워졌다.
물길 바닥은 화강석으로 포장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을 놓아 반원형의 두 홍예(虹蜺)를 받쳤으며, 두 홍예의
사이에는 귀면(鬼面)을 부조한 돌을 끼우고 그 위에 얇은 댓돌을 길게 덮었다.
홍예의 바깥쪽에는 긴 댓돌[長臺石]을 3단으로 쌓아 하부구조(下部構造)를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긴 댓돌을
깔아 바닥[路面]을 형성하였다. 바닥은 다리 양 끝을 낮게 하고, 복판을 높게 하였으며, 이른바 어도(御道)처럼
3부분으로 나누어 가운데 길을 약간 높였다.
좌우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연꽃잎을 소재로 하여 만든 하엽동자기둥 [荷葉童子柱]을 4개씩 세우고,
그 사이에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風穴板)을 끼워 맞추었다. 풍혈판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하엽동자기둥을
배치하고 두 개씩 풍혈을 뚫어놓았다. 난간 양 끝에는 법수(法首)라는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동물 모양의
조각을 새겨서 다리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옥천교 상부
명정문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창경궁 명정문은 창경궁 외전(外殿)의 중문(中門)이며 행각은 문의 좌우로
연결되는 회랑이다. 행각의 앞면 중앙에 있는 명정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이다. 행각은 모두 복랑(複廊)으로 2칸이며 기둥 위에는 새 날개 형태의 장식(裝飾)인 익고(翼工)을
하나 설치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이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려, 1616년(광해군 8)
재건되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가 1986년 복원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정전(正殿) 중 가장 오래되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과 함께 단층으로 건축된
정전이며, 명정문과 그 좌우 행각 · 홍화문 · 창덕궁 돈화문 등과 더불어 17세기 전기의 목조 건축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명정전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이용하였다. 조선 1484년(성종 1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합각지붕건물.
이후 인조 때와 순조 때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무사히 보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행각 등이 변형되었다.
1983∼1985년에 걸친 중창 공사 때 주변 행각(行閣)과 문정전(文政殿)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등 궁궐의 정전이 거대한 규모의 중층건물인 데 비하여
창경궁 명정전은 소규모의 단층건물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창경궁이 왕이 정치를 행하는 곳으로 가 아니라 왕대비(王大妃)가 거주할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좌향(坐向)이 동쪽인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 안팎에 칠한 단청의 색채는 많이 퇴락하였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천장의 짜임새를 보면 한복판에 감입천장(嵌入天障)을 마련하여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조각을
매달아 놓았고, 이 둘레에 꽃무늬를 그린 정방형의 소란반자를 둘렀다.
바깥쪽으로는 한 단 낮게 소란반자를 두른 층단천장(層段天障)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견실하게
짠 공포를 장식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내어 천장의 일부를 구성하게 하였다.
드므(방화수 용기)
무쇠롤 만들었다. 월대 모서리에 설치하고 방화수를 담아 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게 했다.
문정전
편전으로 왕의 집무실의 중심 건물이며 역대 많은 왕과 왕비의 혼전(魂殿)으로도 사용했으며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신주를 모시며 휘령전이라고 불렀다.
휘령전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28세의 나이로 죽게 했다.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문정전이나 일상적으로는 숭문당을 더 많이 활용했다.
기능적으로 창덕궁 희정당, 경희궁 흥정당과 유사하다.
'숭문(崇文)' 뜻은 '학문(文)을 숭상(崇)한다'이다. 참고로 창덕궁 희정당의
원래 이름 역시 숭문당이었다.
현판 글씨는 영조가 직접 썼다.
함인정
창경궁의 정자이다. 명정전의 서북쪽, 환경전의 남쪽에 있다.
함인(涵仁)' 뜻은 '인(仁)에 흠뻑 젖는다(涵)'이다.
왕들은 함인정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주로 왕실 의례나 잔치, 또는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만나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했다. 국상이 생겼을 때는 망곡하고 향을 올리는 곳으로도 이용했다.
참고로 함인정을 가장 많이 사용한 왕은 영조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영조실록》에 함인정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온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었지만, 함인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주변의 행각과 문은 없어지고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후 몇 번의 보수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환경전
창경궁의 침전이다. 경춘전의 동쪽, 함인정의 북쪽에 있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은,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며 환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을 볼 때, 주로 왕과 왕세자 등 주로 왕실 내 최고위급 남성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하다.
환경(歡慶)’은 《시경》 - 〈소아 · 초자〉 편에서 유래한 말로, ‘기뻐하고(歡) 경하(慶)한다’는 뜻이다.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소현세자가 청나라 불모에서 돌아와 머문곳이다
경춘전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경춘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왕비와 왕대비의 공간으로 성종이 생모 인수대비를 위해 마련 이곳에서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났고 사도세자의 정부인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낳았고 세상을 뜬 곳이다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 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을, '춘(春)'은 장수함을 뜻하니 옛날과 지금에 걸쳐
축복하는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양화당
창경궁의 침소이다. 통명전의 동쪽에 있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은 궁이다.
래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때문에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어느 전각을 어느 지위 사람이 썼는지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양화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는 왕실 내 최고위급 인물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하다.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65년(명종 20년) 때는 명종이 양화당 뒤뜰로 유생들을 불러
시와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 시험인 제술(製述)을 보게 하고, 현장에 있던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통명전
창경궁의 침전이다.
사실 창경궁은 대비 등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어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통명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주로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한 듯하다.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서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 전
(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그리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영춘헌
창경궁의 주거 건물이다. 양화당의 동쪽에 있으며 집복헌과 붙어 있다.
영춘(迎春)’은 ‘봄(春)을 맞는다(迎)’는 뜻이다.
원래 이 일대에 후궁 처소가 모여있었으므로, 영춘헌도 본래는 후궁 거처였던 듯하다.
집복헌
궁궐의 건물은 용도에 따라 殿, 堂, 齋/軒를 끝자리에 붙인다.
전은 왕이나 왕비가 사용하는 건물을 말하며 당은 한 단
계 낮은 건물로 전의 부속 건물로서 사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고 재/헌은
왕실의 가족이나 후궁이 사용하는 건물을 말한다.
집복헌은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 씨로부터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 씨로부터 순조가 태어난건물이다.
전각들을 둘러보고 이제 춘당지로 이동을 한다
낙연도 많이 떨어져 있고 이제 단풍이 물들고 있다
이곳이 내전 터다
복자기 나무는 토질에 따라서 색깔이 다른 것 같다 여러 곳에서 본 복자기들이
모두 색깔이 다르다
위는 금년의 풍경이고 아래는 작년의 풍경이다
작년에는 춘당지에 원앙이 많이 있었는데 금년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저기 섬 어딘가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일부만 단풍이 들고 있으며 아직도 푸르름 그대로 있는 나무들도 많다
Sergey Chekalin - 가을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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