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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길상사

길상사

길상사는 우리가 잘 아는 법정스님이 1997년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말사(대법사)로 등록한 사찰이다.

송광사 서울분원으로 법정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길상사는 1987년 김영한이 법정스님 무소유를 접하고 이에 

감명받아 당시 요정(음식점)이던 대원각 부지 7,000평과 지상건물 40여동을 기증받아 시설물을 그대로 이용하고

변경을 최소화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10/21)

 

대원각 요정을 기증한 공덕주는 본명이 김영한(1916~1999)으로 불명은

길상화 보살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민족사의 암흑기인1916년에 태어나 16세의 나이로 뜻한 바가 있어 금하 하규일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에 입문했다고 한다. 1937년 천재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아명으로

불리웠던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생전에 선가 하규일선생 약전 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1955년 바위사이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였다.

그녀는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법정스님에게

 이곳을 절로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1997년 대원각이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한벌과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았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 뜰에다 뿌려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육신의 옷을 벗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인 한국 조각계의 거장 최종태씨가 불모를 자청해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관세음보살 님으로 불가 2544년 (2000)4월에 봉안

되었다 한다

이곳 길상사에 해국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을 본당으로 삼고 있는

절에서는 극락을 의역한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안양교·안양문·안양루 등을 갖추기도 한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설법전

적묵당

서양등골나물

1000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내놓고도 후회되시지는 않나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얼마나 그사람과 그의 시를 사랑했으면......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였다.

 

23살에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 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 우리사이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가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 밤 부터 도망치기를

여러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 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 하자고 제의 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고 전 한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고 한다.

백석(본명 백기행 1912 -199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 솜씨로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같았다.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

(子夜)만을사랑 하였으며 백석에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잇지 만나지

못하게 된다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 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안았다고 전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햇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올 곱게 간직했던 여인이였다

김영한 여사

사진이라도 몇장 남기고 가시지 겨우 이정도 그래서 더 소중할까?

김영한은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인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 <내 사랑 백석>을 펴냈다. 1997년에는 사재 2억원을 털어 백석문학상을

 창작과 비평사 주관으로 제정하기도 했다.

 

백석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즐겨 읽었고,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슴. 주막. 여우난골.고야, 통영, 남행시초(연작) 등을 발표하였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 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 오면서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 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 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월간 창작과 비평에서 출고 한 자야의 회고록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의 전문에서

 

이제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길상사 한 쪽에 기념비로 남아서 길상화(吉祥華)처럼

길(吉)하고 상서(祥瑞)로운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사랑을 간직하는데는 詩쓰는 일 밖에

없다고 김영한은 말 했다고 전 한다 그녀는 국악계에도 공헌을 했으며 김진향으로 더 알려졌다

 

길상헌

대원각 안주인이었던 '김영한'씨가 마지막 눈을 감는날까지 머물렀던 '길상헌' 입니다.

요즘은 외부에서 객스님이 오실때 묶는 곳이거나 그리고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된다고

투구꽃

층꽃나무 

느티나무는 노랗게 물들어가고 

쑥부쟁이(잎이 좀 넓어요 )?

길상사 7층 보탑 

솔채

지장전(地藏殿),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길상사에서 유일하게 새로지은 건물(2004년10월17일) 1층은 공양간 2층은 도서관

법정스님의 영정이 모셔진곳

법정스님께서 남기고 가신 물품으로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 가셨다

 

먼훗날 / 둘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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