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도시의 이름은 19세기말 이전의 현재의 칭다오 스난구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내주부 교주 즉묵현의 평범한
어촌 청도진으로, 마을이 면해있는 만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청도(지금의 샤오칭다오)로부터 이름을 따 왔다.
지금은 칭다오시가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자오저우만 일대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항구 만들기 딱 좋은 위치로,
춘추전국시대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항구도시가 번성하였으나, 대체로 만 안쪽인 교주(지금의 자오저우시),
즉묵(지금의 지모구) 등이 번성했고 만 밖에 있는 청도진은 그다지 번성하지 못하였다

창다오독일총독빌딩 박물관

19세기 말 청도진이 위치해 있던 자오저우 만(胶州湾, 교주만) 어귀가 독일 제국에게 할양되어 해군 기지인
키아우초우가 되었다.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100년 정도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서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칭다오는 키아우초우의 중심지였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신경 쓰지 못하는 틈에 연합군에 군수물자를 팔며
이득을 보던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 가담, 제국군을 진군시켜 이곳을 점령했다.
1927년 1차 산동파병과 1928년 2차 산동파병 등 일제의 중국 침략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 후로 국민정부 아래서 12개 직할시 중 하나로 지정되어서 지역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국민당 정부 시절에 지정된 직할시였지만 산둥성 내에서 성도인 지난시를 능가하는 경제력과
인구를 가지고 전국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기에 은근히 직할시로 승급되길 원하는 시민들이 있다.
이후 중일전쟁에 다시 일본에게 점령되었다가 일제 패망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국공내전 때는 화북지역 국민당 최후의 보루로 버티다가 1949년 6월 2일 공산당에 점령된다.
문화 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 시기 연안개방도시로 선택된다.

총독 관저 입구에는 잎이 무성한 커다란 소나무가 버티고 있다. 설송(雪松)으로 1914년 일본이
인도의 히말라야 산악 지역으로부터 들여왔다고 한다.
그 후 1950년대 육종을 거쳐 묘목을 대량으로 번식시켜 설송을 전국에 보급하게 되었다.
총독관저가 일반인에게 개방된 건 1999년이다.
시장 관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이 박물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공식 명칭은 덕국총독루 구지(舊址) 박물관이다.

인구는 약 1,000만 명에 달한다.
한국인들과 조선족들의 인구수도 꽤 되는 편이며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합치면 대한민국의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 수준은 된다.
면적은 약 11,026㎢이다. 칭다오에서 한국 사람이 주로 많이 사는 지역은 성양구이다

사회주의 핵심가치
번영과 민주주의. 문명과 조화. 자유평등. 공정한 법치. 애국심과 헌신. 정직하고 친절함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 .우리나라 어떤 사람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밝은 대낮에 ㅎㅎ

위에서 본 독일 총독관저 (박물관)
총독 관저는 1905년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축을 시작해 1907년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독일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고, 1914년 일본군의 청도 점령 후에는 일본 수비군 사령관저로 사용되었다.
1919년 국민당 정부가 청도를 수복하면서 청도시장 관저가 되었다.

박물관은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접대, 판공, 숙식 등을 하는 주거 공간이 66실이고, 휴식과 오락 공간이 19실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에는 1층과 2층이 트인 중앙홀이 있다.
입구에 들어가면 총독루 100년을 소개하는안내판이 걸려 있다.
그에 따르면 덕국총독루는 청도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산이다.
1907년 낙성된 4,083㎡의 4층 건물이다.
덕국총독루는 붉은 기와에 노란색 벽을 가진 대표적인 건물로 이후 청도 건축물의 전형이 되었다.
이 건물은 유럽의 건축양식을 토대로, 당시 유행하던 유겐트슈틸(Jugendstil)과 중국의
전통 건축 요소를 결합해 독특하게 만들어졌다.

건설. F.H. 슈미트와 중국인 노동자들
F> H. 슈마트는 1898년에 설립되었으며 함부르크의 알투나에 등록되어 있다
독일전쟁 당시 청도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민간건설회사였다
칭다오에서 F.H.슈미트회사는 행정 교통 군사 유네스코. 산업. 상업. 금융. 주택 및 시립시설등의
분야를 망라하여 다수의 중요한 공공및 민간건물 건설을 맡았다
이 회사는 청도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모집했었다는 내용이다

덕국총독루 구지 박물관은 1897년부터 1914년까지 조차지 청도의 역사 과학 예술 사회 문화를 보여준다.
1912년에는 손중산 일행이 임시 총통의 자격으로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1934년부터 청도영빈관이 되어 중화민국의 송미령, 장경국 등이 이곳을 다녀갔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 주덕, 등소평 등이 이곳을 방문했다.
외국 원수로는 베트남의 호치민, 캄보디아 시아누크가 이곳을 다녀갔다.
1996년 전국 중점보호문물단위가 되었고, 1999년부터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총독서재
총독집무실이기도한 이서재는 내실과 외실로 나누어져 있다
칭다오의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곳을 귀빈으로 맞이했으며 청나라시대의 책상을 선택한
것은 어느 정도 동서양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


휴식실

작은 응접실
작은 접견실은 손님과 비공식적인 만남을 위한 장소이며 주지사 가족이 술을 마시는 장소이기도 하다
1940년 1월 왕징웨이 왕커민 량홍즈 등이 이곳에서 회의를 열어 왕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공모를 했다

마오쩌뚱의 청도 시찰에 대한 간략한 기록

청도 해군기지건설
이 육지는 독일 해군이 직접 관리했다 독일이 청도를 점령한 지 17년 동안 이곳에는 완벽한
군사요새시스템이구축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에서 새로운
해군기지를 찾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청도가 뛰어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1945년 9월부터 10월까지 중국해군은 잇따라 청도에 상륙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8월 2일 마오쩌뚱은 39도의 열이 나자 결국 국무원총리인 저우언라이에게 마오쩌뚱을 대신하여
해군전력을 사열하도록 위임하기로 결정한다 1957년 8월 4일 해군 퍼레이드가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사오진광과 함께 다 가오 3 부두에서 장교들을 검열한 후 어뢰정 245호에 탑승하여 교주로
항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천정을 습도조정과 통풍을 위해서 설계를 했다고 한다

완쯔후이의 이전주소(1934~1940 이산로 37호)
1934년에서 1940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건축 면적은 4108.2제곱미터이다
다이버시티 아키텍처 클래식은 중국건축가 류취안 파와 왕한이 설계했다 원래는 세계적 민자협회의
창도지부가 있던 곳이다 붉은 벽 안에는 로마 중국 궁전 비잔틴 양식의 건물이 세 개의 군으로
늘어서 있는데 이는 민자회의 5 종교통합이라는 개념을 구현하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적 예술적
다양성을 멀리까지 보여준다 2006년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신 중국 수립 후에는 시립도서관과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시립 미술관이다

독일 아파트 옛터(중산로)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축물 중산로에 잇는 초기독일건축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아한 모양 매끄러운 선
각진 평면이 특징이며 굽이치는 곳에 탑이 있다 건축가는 창문에서 나오는 붉은 아치와 벽 공간을 둘러싼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붉은 벽돌의 맑은 물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활용했다 살의 전반적인 스타일이 밝다


화시러우(1930년 황해로 18호)
유럽의 성스타일의 건물로 1930년에 건축되어 1931년에 완공되었으며 건축면적은 800 제곱미터이다
이 건물은 유야오종이 디자인했다 간물은 5층짜리 원형건물과 4층짜리 다각형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외벽은 화강암으로 지어졌으며 정문은 남쪽을 향하고 문양 쪽에 잇는 2층발코니에는 로마식 석조기둥
2개가 지지하고 있다 해방 후 화스루는 중국인과 외국투자자를 접대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지금은 팔대관
풍경구의 랜드마크 건물 중 하나이다

옛 천문대 (1910년 관상 2로 15호)
레오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은 1910년에서 1912년 사이에 지어졌다
독일 건축가 리히터가 설게 하고 천문학자 엘만이 시공했다
본관은 관샹산 정상에 세워졌다 외벽은 화강암이며 지붕은 소몰이 기와로 덮여 있다
구대유럽의 석조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1911년 독일 천문학회는 이곳을 왕립청도
천문대라고 명명했다 1954년에 건설된 중화인민공화국 평준화 원점은 중국의 고도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건물을 짓는데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설계자가 라자로비츠(Werner Lazarowicz)다.
라자로비츠는 지금은 폴란드 땅이 된 그단스크(당시 단치히) 근교에서 1873년 5월 태어났다.
1898년 25세의 나이로 청도에 와 총독부 건설국에서 일했다.
1901년 3월부터는 건축과장 슈트라써(Strasser)의 기술과 사업 부문 조수가 되어 건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총독부 건축의 실무자가 되어 설계를 맡게 되었다. 그는 1914년 베이징으로 떠날 때까지
군수건조비서(軍需建造祕書)로 일했다. 그리고 1928년 4월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실내 디자인은 슈타이너(Aebst Steiner)가 맡았다.
슈타이너는 1850년 슈투트가르트 출신으로 가구회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는 바로크와 로코코 가구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1907년 봄 회사 사장인
볼프(Jechen Wolf) 부부와 함께 청도에 와 가구 구입과 배치 등 실내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시공은 독일 함부르크 알토나에 본사를 둔 슈미트(F. H. Schmidt) 건설사가 맡았다.
이 회사는 독일이 청도를 지배하는 동안 중요한 공공건축의 실내디자인을 대부분 맡았고,
개인적인 주택 시공도 수행했다

원래는 어린이방이었는데 주지사의 책상을 전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주지사와 아내의 침실
이곳은 전형적인 유럽 귀족들의 침실이다 중국식 골동품 선반이 멋을 더한다
1947년 장징궈 베트남지도자 호찌민 알바니아 안데르셰후 그리고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왕자 등 많은 유명 정치 지도자들이 이곳에 거주했었다

침실의 화장대

그래선지 총독 관저 내부의 가구, 카페트, 그림이 독일적인 양식으로 가득하다.
특이하게도 모든 방의 열쇠를 벽장 형태의 가구 안에 보관하고 있다.
목록으로 보아 90개가 넘는 것으로 보인다. 문의 열쇠가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일부 자료실에는
1904년 시공 장면부터 1909년까지 총독부의 모습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지을 때 중국 풍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고산용혈(高山龍穴)과 정해신침(定海神針)의
심오하고 비장한 이론을 적용했다고 한다. 그것은 건물과 주변 환경을 조화시키려는 동양의 풍수관을 따른 결과다.

진영 된 각종 수석들

청도는 1897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 조차지였다. 독일 지배의 중심이 총독부와 총독 관저다.
독일 총독 관저는 신호산 중턱에 있다.
총독 관저는 현재 박물관이 되었다. 관저의 역사와 내부를 자세히 소개한다.

칭다오 독일 총독빌딩 박물관(게스트하우스. 영빈관))
칭다오 구 독일총독부 관저 박믈관은 독일건축과 라차차투이시가 설계하여 1906년도에 건축되어 1907년에
완공되었으며 건축양식은 단시의 스타일과 메리디언 스타일이 결합되었다 이후 이곳은 국민당의 일본수비대
사령관과 친다오 시장의 공식 거주지가 되었다 신 중국 건국 이후 게스트하우스로 지정되어 외국인을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1999년에 국무원은 이곳을 국가중점 문화재로 지정하고 박물관으로 개장을 했다
Alexander Kat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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