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의 마지막 행선지는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이다.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건릉은 10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고, 융릉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정황은 다소 복잡하다.
경종은 후사가 없는 데다 신병이 많아 후계자가 혼미에 빠져 있었다.
이때 노론의 4인방으로 불리는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의 주장에 따라 영조가 세제로 책봉된다.
그러자 소론 측에서는 시기상조론을 들고일어나 노론의 4 대신을 4흉(四兇)으로 몰아 처형했다.
이것이 잘 알려진 신임사화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겨우 헤어난 영조는 왕위에 올라 자신을 왕으로 만들었던
노론의 의리를 정당화하고 소론을 쫓아냈다.
이것이 신임의리다. 정치적 평정을 이루려고 탕평책을 쓰기도 했지만 영조는 노론의 편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당대의 정황을 예의 주시한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치가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는 노론 세력이 보기에 눈엣가시였다. 그런데 세자가 영조를 대신해 정무에 임하자 노론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노론 측에서는 줄기차게 사도세자의 흠을 들추면서 이간질했고, 이들 배경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숙의
문 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자를 제거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자 사도세자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무고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부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불화가 중첩되자 세자는 급기야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다.
정조는 즉위 이후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며 신진 세력을 등용하는 한편 화성 건축을 통해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려 했다.
또 아버지의 죽음에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즉위 초부터 사도세자의 복권에 공을 들였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789년 이곳으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꾸었다.
고종 때 의황제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로 올렸다.
융릉과 건릉을 잇는 길은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산책로로 많은 사람이 연중 찾는다.
향로와 어로 표시
향로(香路)는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며,
어로(御路)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이다.
제실
기신제
해마다 죽은 날 지내는 제사
융릉은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현경왕후
(1735~1815, 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이다.
사도세자는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두 번째 왕자다.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다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원자 정호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한 것이다.
왕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해 3세 때 『효경』, 『동몽선습』 등을
익혔고 글을 쓸 줄 알았다.
이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天地王春)'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다투어 세자의 글을
하사해줄 것을청하니 영조는 기뻐하며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라며
세자의 재간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세자는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10세 때 당시 세마(정9품)였던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는데
그녀가 혜경궁 홍 씨다.
홍봉한이 당시에 급제하지 못하고 세마라는 말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서야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홍봉한은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 어영대장,
예조, 이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는데,홍봉한의 승세는 사도세자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자는 영특하면서도 무인 기질이 강했다.
어릴 때부터 반드시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으며, 병서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한다. 또한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16세 때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 이어졌다.
24세 때인 영조 35년(1759)에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해 『무기신식』이라는
책을 엮었을 정도다. 이 책은 훈련도감1) 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그 뒤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
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늘 군복을 입고 다녔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 25년(1749) 15세 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할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제는 영조의 처신이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도 글 읽는 것보다 무예를 중요시하는 데 불만이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에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실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리청정은 훈련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영조도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에 훈련하려는 의도로 대리청정을 도입했다고 평가된다
영조는 아들을 세자로 명한 후에 이를 양위 파동으로 적절히 이용했다.
왕이 그럴 의사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했고, 국왕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겠다고 고집했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두어졌다.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정치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시기가 매우 부적절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무려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 16년, 20년, 21년, 25년 때로 세자 나이 4세, 5세, 9세, 10세, 14세 때였다.
무엇보다 4~5세의 세자에게 전권을 물려주겠다는 말을 왕이 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양위 파동에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자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영조의 후궁 숙의 문 씨 등이 세자를 무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책하자 그는
화병과 정신병을 얻었다.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동조한 장인 홍봉한은 훗날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병도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했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1761년 정순왕후의 생부인 김한구와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이는 "동궁이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관료들과 20여 일이나 무단으로관서 지역을 유람했다"라는 내용이 적힌 '허물 십조'를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
이를 본 영조는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인가"라고 한탄하며 세자에게 명해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후 자결할 것을 명했다.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니 어서그리하라"라는 나름의 명분도 만들었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자 사도세자는 부모 앞에서 자결하는 것이 효에 어긋난다고 항변했고
, 영조는 당시11세였던 정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도세자를 뒤주2) 속에 가두어 죽게 했다.
그런 후 사도(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라는 시호를 내리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그것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내외에 알렸다. 흔히들 말하는 '사도세자'라는 호칭은 이때 생겨났고 이후 사도세자는
비운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융릉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천하의 명당이다.
이 자리는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하는 등 수백 년 간 풍수가들의 주목을 받아온 곳이다.
뒤로는 광교산, 팔달산, 화산이 둘러치고 앞으로는 겹겹이 둘러싼 봉우리들이 좌청룡, 우백호, 안산,
조산을 이루고 있다.
정조는 융릉 조성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정우태를 초빙해 국왕의 위격에 걸맞은 치장을 명했다. 봉분은 난간석을
생략했지만 인조의장릉 이후 처음으로 목단,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두르고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에는 연꽃을 조각했다.
이는 조선 시대 최고의 연꽃 조각으로 평가된다. 과학문화답사기에서
건릉
건릉은 제22대 정조(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 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인 영조 35년(1759)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출생과 관련해 남다른 이적이 많다.
사도세자는 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가 꿈 내용을 그린 그림을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지만 정조는 초창기 불안했던 입지가 강화되어 영조의
후사가 되는 것은 문제없었다.
그러나 영조 51년(1775) 노병이 깊어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방해해
조정이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정조에 힘을 모아줄 수 있는 위치였으나,
세손인 정조가 그를 탐포하고 무지하다고 멀리하자 원한을 품고 세손의 적당이 된 것이다.
1776년 영조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바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장묘를영릉으로 격을 높이고 생부의 존호는 장헌세자로, 묘소는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했다. 왕통에 관한 정리를마친 뒤에는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70여 명을 처벌해 분란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했다.
정조가 즉위와 동시에 공을 들인 것은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시험을 통해 성과를
확인해 임용,승진의 자료로 삼은 것으로 규장각에서 주관했다.
20년간 10회 시행해 100여 명을 배출했는데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 1) 강시(講試) 제도도
함께 시행했다.정조는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을직접 만났다.
100회 이상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
활용했다.또한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능행 중에
접수했는데 『일성록』과 실록에 실린 상언 2) , 격쟁 3)만 5,000건을 넘는다.
과거 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해 폐단을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 도에서
행해지는소과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이는 국왕이 직접 출제한 것을 현지에서 개봉, 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둔 뒤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채점해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한 것이다.
정조의 한은 아버지가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사망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정조는 당쟁에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탕평책을 계승했다. 그럼에도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싶아(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싶아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전개되었다. 그런데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이들은 북학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정조는 이에 주목하고 북학파의 박지원의 제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등용했다.
정조 대의 시기를 조선 시대의 문예 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 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후반의 화이론에 입각한 조선 중화 의식 등이 고취되면서 조선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의 실현이라는 자긍심이 생겨난 데 있다.
정조는 조선 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 책에 달하는 『홍재전서』다.
일반적으로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 군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화성 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보락』에 보이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에 의하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가 무인 기질을 높이 평가한 것은 그의 정조 3년(1779)의 말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않아서 번번이 행군할 때 조금만 달리면 문득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이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 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데, 아버지 사도세자는 호방한 무인
기질 때문에 영조에 의해 죽임 당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정조의 사망에 대해서는 독살되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룬다.
정약용도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에서 정조의 독살 의혹을 제시했다.
물론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독살의 개연성과 심증이 있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사인은 '등창'이다.
이는 등에 난 종기를 말하며 치료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치료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등창의 고름 환부를 직접 짜기만 해도 되는데 굳이 수은 중독의 위험이 있는 연훈방을
처방했다는 점이다.
특히 붕어 순간에 사관과 승지가 배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조는 대비 정순왕후가 신하들을 물리고 혼자 약제를 들고 들어간 뒤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정순왕후는 당시 정조의 죽음을 예견한 듯 군대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게 했고 약방제조를 물린 뒤
직접 약제를들고 왕의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곡소리가 들렸고, 왕의 사망이 선포되었으며 왕세자(순조)에게 대보가
넘겨졌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는 11세의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친정 식구인 안동 김 씨를 조정에
끌어들여 순조, 헌종, 철종의 60여 년에 걸친 세도 정치의 주역이 된다.
정조의 사망에 대해서는 독살되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룬다. 정약용도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에서
정조의 독살 의혹을 제시했다. 물론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독살의 개연성과 심증이
있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사인은 '등창'이다. 이는 등에 난 종기를 말하며 치료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치료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등창의 고름 환부를 직접 짜기만 해도 되는데 굳이 수은 중독의 위험이 있는 연훈방을
처방했다는 점이다. 특히 붕어 순간에 사관과 승지가 배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조는 대비 정순왕후가 신하들을 물리고 혼자 약제를 들고 들어간 뒤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정순왕후는 당시 정조의 죽음을 예견한 듯 군대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게 했고 약방제조를
물린 뒤 직접 약제를 들고 왕의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곡소리가 들렸고, 왕의 사망이
선포되었으며 왕세자(순조)에게 대보가 넘겨졌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는 11세의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친정 식구인 안동 김씨를 조정에 끌어들여 순조, 헌종, 철종의 60여 년에 걸친 세도
정치의 주역이 된다.
정조의 무덤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 무덤의 동쪽에 모셔졌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여론
때문에 효의왕후가 죽은 후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합장했다. 원래 정조의 묘호는 정종이었는데,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정종역시 정조라 고쳐 왕실의 묘호를 격상했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김시묵의 딸로 영조 38년(1762)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정조와 가례를 올렸고,
1776년정조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 되었다.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효의왕후는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소생 없이 69세로 사망했는데
, 남편의 묘호에 따라 후에 선황 후가 되었다. 능호를 정릉이라 했다가 건릉에 합장되면서 능호를
따로 쓰지 않았다.
능호를 건(健)이라 한 것은 쉬지 않고 가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다.
건릉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아버지의 융릉처럼 장대한 모습은 아니다. 융릉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반면
정조의 능은 그의 사후 유신들이 융릉처럼 만드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왕릉으로서의 구색은 모두 갖추고 있다.
능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넓은 잔디 묘역 중간 왼쪽으로 재실이 있다. 능은 재실 위 높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능에는 석상과 망주석, 문·무인석이 있다.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고 난간석이 없지만, 건릉에는 난간석이 있고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장명등에 새겨진 무늬가 융릉의 것과 같음을 볼 때 한 장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구조는 동릉이 실로 혼유석은 하나만 놓였고 중간에 세운 팔각 장명등의 기단부는 향로와 같은 형태다.
중대의 창호 부분 팔면에 원을 그려 매난국 무늬를 서로 어긋나게 새겨 넣은 것은 융릉과 같다.
혼유석에는 면마다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 무늬를 새겼으며, 방향 표시를 위해 난간 석주에 문자로
십이지를 표시했다. 사실적으로 조각된 문인석은 금관 조복을 입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융릉과 건릉 정자각 앞 제향 공간에는 다른 능과 달리 신로와 어로 사이에 판석이 넓게 포장되어 있다.
이는 두 왕이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능제가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융건릉은 정조의 효행이 깃든
전통적 효 문화 유적으로, 현재 융건릉과 용주사, 만년제(지방 문화재 제161호)를 연계하는 효테마공원이
계획되고 있다. 과학문화답사기에서
건릉
융건릉은 무엇 보다도 나무들이 쭉쭉 뻗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마사토로 걷기 아주 좋은 길이 매력적이다
붓꽃
화살나무
백송
Cecilia - The Prayer (세실리아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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