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북경 이화원

북경을 경유 여강 호도협과 옥룡설산 트레킹과 여행을 겸한 4박 5일 나들이다

이번에는 부산 일요산악회에서 주관 하는 코스다

먼저 북경에가서 1박 하기에 이곳 이화원을 먼저 돌아본다 

오늘 북경의 날씨는 비가 내리고 무척 흐려서 시야가 좋지를 않다 

 

동궁문(東宮門) 아래
이화원의 정문으로 앞에는 1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 세 글자의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 8소(東八所)가 있었다.

이화원 

청나라의 여름 궁전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황가원림이다.

원나라와 명나라 때 물 저장고로 사용하면서 서호(西湖)라 불렀다.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룩한 건륭제 눈에 들면서 황실원림인 청의원(淸漪园)을 조성한 것이 시초였다.

원명원이 완공되었을 때 건륭제는 더 이상 국고를 낭비하면서까지 원림을 조성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스스로 어겼다.

1750년 어머니 황태후의 60세 생신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청의원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1764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화원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886년 서태후에 의해서다.

폐허가 된 원명원을 복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태후가 해군 창설을 위해 마련된 예산중 은 2,400만(청나라 1년 치 예산의

약 30%를 투자 했다니 청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냥을 유용해 자신의 여름 궁전을 조성했다.

이곳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다고 한다.

청일전쟁의 패배를 무력한 해군 탓으로 보는 중국 입장에서 서태후는 개인적인 탐욕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한 인물로 꼽힌다.  

반면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이화원은 ‘옛 중국인들이 건축에 품은 이상’을 여실이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옛 중국인 관념 속 지상 낙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화원을 통해 알 수 있다.

부지의 4분의 3을 차지한 곤명호(昆明湖)를 비롯해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던 궁전 구역, 아름다운 누각, 우람하게 자란

고목, 관상용 태호석, 아치형 다리, 종교적인 건축물이 조화롭다.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황실원림으로 ‘황실 정원 건축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여행자들은 주로 동쪽의 동궁문(东宫门)과 북쪽의 북궁문(北宫门)을 통해 이화원으로 들어간다.

어느 곳을 통해 입장해도 관계없다. 여기서는 정문격인 동궁문을 기준으로 볼거리를 소개한다.

수양회화나무

중국에만 있는 나무인줄 알았는데 우리나라 화명수목원에도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접 붙였다고 했었다

기린

사슴의 몸 .용의머리.몸에는 비늘. 소의 꼬리로 중국전설 속의 상상의 동물

여기서 유래된 기린의 뜻은 슬기롭고 재주가 있는 젊은이 수재들을 의미한다고 함

수석

인수전(仁寿殿)

동궁문을 통해 들어오면 곧바로 궁전구가 나타난다.

이곳에 궁전구가 조성된 이유는 원명원과 거리가 가까워서 황제가 두 원림을 오가기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전구의 첫 번째 건물인 인수전은 황제가 조회를 열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옥좌가 마련되어 있다.

한마디로 광서제를 수렴청정한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곳이다. 내부는 자금성의 황궁처럼 꾸몄지만, 대전

앞뜰에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고 태호석으로 장식해서 원림 분위기를 살렸다. 대전 앞에 용과 봉황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원보경

안에는 부인협수라는 4자성어가 있다 

상서러움과 어짐이 어우러져 장수를 이룬다는 뜻이다

용은 황제이고 봉황은 서태후다 

서태후는 수렴청정으로 황제를 손아귀에 넣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봉황은 크고 당당하지만 황권을 상징하는 용은 작고 여의주도 없다 

서태후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했던 시대상을 나타낸다

 

잡상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 신상(神像)을 일러 잡상이라 하는데 이는 소설 ≪서유기 西遊記≫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土神)을 형상화하여 벌여놓아 살(煞)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

영춘화

서태후는 이화원을 다시세우며 1880~1895년 사이 북대서양함대의 해군예산을 전용하여

무너진 이화원을 재건 사실상 자신의 별궁으로 사용하였다

군비유용으로 해군력은 약화되고 결국 청일전쟁은 패하고 보상금을 지불하고 이후 급속도로

청이 무너지기 시작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낙수당(乐寿堂)

서태후가 기거하던 침궁이다. 앞으로는 곤명호가 펼쳐지고, 뒤로는 만수산(万寿山)이 버티고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건륭제가 최초로 건립했던 건물은 함풍제 때 파괴되고, 1887년 서태후가 재건했다.

공개된 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정면에 걸린 ‘만수무강(萬壽無疆)’ 넉 자가 적현 편액이다.

서태후의 장수를 기원한 듯하다.

옥란당(玉澜堂)

청 · 일 전쟁의 패배로 큰 충격을 입은 광서제는 1898년 무술년에 정부, 행정, 교육, 법률, 경제, 군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칙령을 내렸다. 친정도 거부하는 광서제가 두려웠던 서태후는 의화단을 지지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결국 야심가 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시켰는데, 그 장소가 바로 여기이다.

광서제는 이곳에서 10년간 유폐 생활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내부를 공개하지 않아서 여행자의 발길이

상대적으로 뜸하다 .황제가 기거하던 곳

폐가석이라 해서 절대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나는 사진을 찍었다

덕화원(德和园)(사진을 담지 못해서 캠 처한 사진)

경극을 좋아하는 서태후를 위해서 경극 공연장으로 꾸민 대희로(大戏楼)가 있다.

건륭제가 지은 것을 서태후가 자신의 취향대로 개조했다. 3층으로 된 덕화원 맞은편에 서태후가 앉아서 경극을

관람했던 이락전(颐乐殿)이 있다. 그녀는 이화원에 도착한 다음 날에는 반드시 경극을 보았다고 한다.

후궁과 공주들은 가까이 동석시키고, 광서제는 복도 쪽 자리를 내주었다고 전해진다.

덕화원은 자금성의 창음각(畅音阁), 피서산장의 청음각(清音阁)과 함께 ‘청나라 3대 공연장’으로 꼽힌다.

여행객들을 위해 하루 6회 짧은 공연이 열리니 시간에 맞춰 관람하면 좋다.

요월문

이화원에서 곤명호 연안 회랑구역으로 연결되는 대표적인 정문 달을 맞이 하는 문

이화원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 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

는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배운전(排云殿)

만수산을 오르는 길목 정중앙에 위치한 배운전은 건륭제가 황태후 60세 생신을 맞이해 지은 황실 사찰이었다.

대보은연수사(大报恩延寿寺)라 불렸던 사찰군의 대웅보전에 해당하는데, 1860년 영 · 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했을 때 잿더미가 되었다. 1886년 서태후가 사찰 대신 궁전건물을 짓고, 자신의 생일에 축하 인사를 하러 온

문무백관과 황족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내부에는 3개의 계단 위에 서태후가 앉았던 의자가 놓여 있다.

전시되어 있는 물품들은 그녀가 70세 생일날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

곤명호(昆明湖)

항저우의 시 호를 닮은 이화원 최대의 호수이다. 호수의 면적은 220만㎡로, 이화원 총면적인 290만㎡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화원에 들어와서 곤명호를 처음 마주하면 바다처럼 거대한 모습에 입이 벌어진다.

호수의 둘레는 6.4km에 달한다.

 

곤명호는 원래 원나라와 명나라 때 물 저장고로 이용하던 시 호(西湖)를 건륭제가 확장 공사를 해 조성했다.

호수에서 나온 흙으로는 만수산을 더 높게 쌓았다. 호수를 3개 수면으로 나누고 인공섬도 3개 만들었으며,

긴 제방을 쌓았다. 항저우 시 호에 매료된 건륭제는 그곳에 있는 다리를 모방해서 6개의 다리를 제방과

연결시키고, 이름을 곤명호로 개명하였다.

여름에는 이화원 북쪽 구역을 모두 관람한 후, 석방에서 유람선을 타고 동남쪽 남호도(南湖岛)에서 내려 십 칠공교와

동우를 감상하면 잠시지만 더위를 식힐 수 있다. 겨울이면 꽁꽁 언 곤명호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시민들을 볼 수 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 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

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했다.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으로 개칭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겨우 복구했지만 1900년(광서 26)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상륙한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다시 훼손됐다. 이미 이때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청나라는 여유가 없었고, 1902년 피신했던

서태후가 베이징에 돌아온 뒤에 전산(前山)과 원내의 동쪽 부분만 재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호도와 십찰 공교

남호도와 동제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아치 17개가 있다. 길이 150 m, 너비 8m이고 난간에는 돌사자 조각 544개가 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이화원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남았다가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북평시가 접수해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중국이 성립한 후 1951년부터 수차에 걸친 자금조달과 보수공사를 통해 원내의 대부분의 전각과 정원이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했다. 1961년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이후 문화 대혁명 시기에 불향각

내부가 홍위병들에게 훼손이 되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화원 자체는 무사했다.

이때 훼손된 문화재도 이후 복원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십 칠공교(十七孔桥)(캡처한 사진)

이화원 최대의 돌다리로 무지개처럼 생긴 아치형 다리이다. 길이가 150m에 달한다. 동쪽 제방과 남호도를 연결한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장소라서 연인과 가족들로 북적인다. 난간에 500여 마리에 달하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각각의 크기와 생김새가 달라서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장랑(长廊)

궁전구를 벗어나 호수 구역으로 가는 길이다. 낙수당을 지나면 728m에 달하는 긴 복도가 나타난다.

양쪽이 훤히 트인 누각식 복도는 들보가 아름답다. <홍루몽(紅樓夢)>, <서유기(西遊記)> 등 고전 소설 속

대표 장면과 동식물들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무려 14,000폭에 달한다. 장랑 밖으로 펼쳐진 곤명호를

바라보는 것도 일품이다.

장랑에는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래서 화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통하는 길을 회랑이라 부르는데 조금 다른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청안방(清晏舫)(캡처한 사진)

서태후의 정치적 야욕을 상징하는 돌배로, 석방(石舫)이라고도 부른다. 장랑의 서쪽 끝 곤명호에 떠있다.

대리석으로 조각해 만든 배의 길이가 36m에 달한다. 배 위에는 역시 돌로 만든 2층 누각이 있다.

영원한 권력을 갖고 싶었던 서태후는 순자(荀子, BC 298~238)의 경고가 두려웠다. ‘수즉재주 수즉복주

(水則載舟水則覆舟)’, 즉 물은 배를 띄울 수 있고, 뒤집어 가라앉게도 한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떤 물결에도 뒤집히지 않는 돌배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돌이 물 위에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4개의 지지대가 밑에서 돌배를 받치고 있다.

지지대가 붕괴되면 배는 언제든 가라앉기 마련이다.

민심에 귀를 닫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청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향각(佛香阁)

배운전 뒤로 만수산에 우뚝 솟아 있어, 이화원의 중심이자 나침판 역할을 한다.

1891년에 은화 78만 냥을 들여 지은 것으로, 이화원 내 최대 공사로 꼽힌다.

밑에서 보면 황금색 유리기 와가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산 위에 세워져 더 웅장해 보인다.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곤명호가 드넓게 펼쳐지고 원림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편전쟁 때 숭실돤 탑을 서태후가 재건 서태우의 무병장수를 꿈꾸며 재건한 불향각은 천수가늠상 

얼굴 12개 눈 36개 팔 24개로 이루어져 있다

태호석 

석가루(夕佳樓)(좌측 2층건물)
옥란당과 의운관 사이에 있으며 호숫가에 자리한 2층 건물이다. 청나라 황제와 황후들이 만수산고 곤명호의

경치를 완상 하며 휴식하던 장소였다.

서태후가 수로를 이용하여 낙수당에 드나들 때 배에서 내려 곧바로 들어가는 선착장

곤명호에는 오리 물닭 원앙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만수산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이호수를 만들기 위해서 흙을 파내어 만수산에 쌓아 저렇게 큰 산이 되었다고 하니 그 시절 운반도구도 시원찮았는데

국력을 저런 곳에 낭비를 했으니 나라가 온전히 굴러갈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베이징 왕실정원

여름궁전 1998년 12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문화유산에 등재

 

 

서태후 (1835년 11월 29일~ 1908년 11월 15일 72세)
함풍황제(咸豊皇帝: 1831~1861)의 의귀비이자 동치황제(同治皇帝: 1856~1875)의 생모이다.
산시 성 장치현 서파촌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소 겸(王小謙)"이었다.

4세 때 장치현 상진촌의 송사원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로 바꾸었으며, 12세 때 다시 노안부 지부

혜장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난아" 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1852년 예허나라(葉赫那拉) 혜진의 딸로 입양되어 예허나라씨 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어 17세의 나이로 입궁하였다.

1856년 서태후는 아들 재순(동치황제)을 출산하여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인을 거쳐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정권욕도 점점 커져 어린 동치제의

섭정을 시작으로 74세까지 48년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궁녀시절 서태후는 원명원의 어감내시들을 포섭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다.

산책을 하던 황제는 은은한 노래소 리에 이끌려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 서태후는 왕자를 출산하게 된다.

황후에게서 후사가 없이 함풍제가 죽자 6살의 아들인 동치제를 즉위시켜 그 생모로써 황후로 올라간 서태후는 황제의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을 한다. 선황제의 본처인 동태후(자안태후, 慈安)는 원래 어질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서태후의 전횡을 걱정한 함풍황제는 죽기 전에 동태후한테 밀서를 내려 서태후가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면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고 하였다. 이 밀서의 존재를 안 서태후는 꾀를 내어 동태후가 감기를 앓고 나은 후 팔에 붕대를 감고

문병 가서는"언니가 몸져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피를 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라고 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하면서 함풍황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그 자리에서 불에 태워 버렸다. 그 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급변하여 동태후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태후는 서태후가 보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아들 동치황제가 어린 나이로 병들어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동치황제의 황후를 죽인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3살밖에 안 되는 광서황제를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한다. 1898년 성인이 된 광서황제는 유신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고 "유심변법"으

실시하였다. 이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켜 광서황제를 영대에 유폐시키고

담사동 등 유신파 핵심인물 6명을 처형한 후 다시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광서황제는 여름에는

죽기 하루 전에 서태후에 의해 독살되고서 태후가 4살의 푸의 황제(마지막황제)를 황제에 즉위시키나 손문에 의한

신해혁명(1910)으로 폐위되고 만다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에 들어오는데 함박눈이 시원스럽게 내린다 

부산에서는 1년 내내 보지 못한 눈을 북경에서 구경할 줄이야 

우리 일행 젊은 사람들 펑펑 내리는 눈에 신바람이 났다

호텔 로비 곳곳에 이러한 감귤이 꽃도 보이고 열매가 많이 달려 있다

숙소 안 내실에 이러한 온천 시설이 있는데 타임으로 조절 두 번 물을 채울 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한 번으로 만족을 했다 

우리가 묵을 침실 안마 의자까지 비치가 되어 있다

온천탕 외에 샤워실과 세면대 변기가 별도로 조성이 되어 있다 

Rasel Hits - Moon veil

'해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도객잔에서 차마객잔으로 트레킹  (34) 2026.03.27
북경에서 여강 호도협으로  (35) 2026.03.22
다음 날 유후다케산 산행  (0) 2026.03.03
일본 아소산 가는길  (58) 2026.03.01
카자흐스탄  (0)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