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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과 창덕궁

영등포에서 하룻밤  친구들과 보내고 오후에 강남에서 모임이 있는데 두시간이라는

                                 시간이 남아 창경궁을 둘러볼까하고 혜화동에서 내려 걸어서 창경궁으로 입성







                                                      명정전 내부


         숭문당(崇文堂)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순조 30) 소실된 것이 그해 가을에 재건되었다.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숭문당 옆으로 정전과 내전을 연결하는 빈양문이 있고, 정전까지는 복도를 설치해 놓고

         바닥에는 전돌을 깔아 놓고 있다다.






                                                                                문정전 용상




                       이정자는 본래 함인당(涵仁堂)이었는데,인조(仁祖)11년(1633)에

        이곳에 옮겨 세우면서 함인정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원래 성종(成宗)15년(1484)에

        지은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는데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뒤

        인조가 인경궁(仁慶宮)의 함인당(涵仁堂)을 이곳에 옮겨 세운것이다.그후 순조 30년

        (1830)창경궁에 큰불이나 타 버린것을 3년 뒤(1833년) 다시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인정은 영조(英祖)가 문무과거(文武科擧)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사람들을

        접견하는곳으로 사용하였다고한다

                                  여기저기 뒤저봐도 이탑의 유래를 알수가 없다 어느분의 추측으로는

                                  고려중기 이후에 건립된것 같다는 말씀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통면전





                                     영춘헌 내부







                                  연못 수리중인것 같다



                               세자의 책읽는 소리가 들리던 성정각의 희우루이다. 정조때 가뭄이 극심할무렵

                         저 누각을 중건하자 단비가 내렸고 몇달을 가물다가 저 건물을 완공하자 또

                         단비가 내려 희우루라 이름지었다한다

                                                                              緝熙(편액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창덕궁 성정각 뒷편으로도 꽤 큰 건물이 한 채 있다.


성정각의 북쪽에 있는 관물헌은 동궐도에서는 “유여청헌”이라 하였으며,


정조대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관물헌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최소한 183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 21년(1884)에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편액은 달랑 '집희(緝熙)'두글지만 써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편액 글씨치고는 서툰 글씨이다.


갑자년에 쓴 어필로 표기되어 있다.


갑자년이라면 1864년 고종원년이고 그해 고종은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년왕이 무언가 기념해서 편액을 쓴 듯하다.


"집희"란 "빛남 밝음 인격이 계속하여 오래 빛남이라”는 뜻과 "계승하여 넓힘"이라는 뜻이 있다.


건물 이름 끝자로는 대개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가운데 하나가 붙게 마련인데


단지 '집희'라고만 했으니, 집희전은 아닐테고 집희당이라는 것인지 집희각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건물 이름이 아니라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 오래 빛나기를” 바란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새로 왕이 되었으니 왕위를 계승하여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모른다.


이 건물의 본 이름은 '관물헌'이다.


왕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또는 경연을 열고하는데


어느 한 건물에서 그런 일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건물들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왕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내전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창덕궁의 건물로는 희정당, 성정각, 관물헌이 그에 포함된다.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던 곳으로 인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동궐도'에서는

   "     약방(藥房)"으로 기록하고 있고 또 "내국(內局)"이라고도 하였다.


                                     영현문  현인을 맞이하는곳


             



                                                    일제시대 창덕궁 경찰서로 쓰였다함

                           성정각 동쪽 출입문인 자시문 옆에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

                     자시문(資始門)은 1782년(정조6년) 지어진 중희당(重熙堂)의 서문이었다.

                     훗날 일제가 중희당을 없애고, 그 자리에 후원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그 탓에 본디 중희당의 서문이었던 자시문도 지금은 마치 내의원(성정각)의

                     동문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근왕파를 앞세워서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명성황후가, 구식 군대의 반란(임오군란)으로 상궁으로

                     변장하여 이 문을 지나 피신했다

                                희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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