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에서 16시출발 홍교공항에17시도착(한시간 시차) 상해 한인거리 식당으로이동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신정에 도착
식당 내부
저녁식탁 한식인지 중식인지 그저 그렇다
식당밖풍경인데 사진은 별로다
저녁식사를 하고 영파시로 가는도중 항주대교를 건너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영파 포에버 피스 호텔에서 하루밤을 묵고
계구: 절강성 영파시 봉화시관할 하에 있다. 아름다운 산들과 맑은 강물로 둘러싸인
옛날부터 “세외도원”이라고 불리우는 국가 5A급 관광지이다.
지금으로부터 1700년전에 설두사라는 사찰이 지어지면서 계구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근대사에 장개석의 고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며 한때는 전중국을 호령하였다.
계구는계구진, 설두산, 정하호 세구역으로 나뉘며 중국 강남에서 제일 아름다운 폭포군을
갖고 있다. 특히 설두산 삼은담은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개의 웅장한 폭포, 수려한
폭포들로 이어지고 있으며 모노레일, 케이블카 등등 시설들도 잘 되여 있는 풍경구이다.
계구는 수려한 풍경, 유구한 역사, 유명한 사찰(세계에서 제일 높은 미륵불상)로 의미가
있는 관광명소이다.
무령문: 1929년전까지는 조그마한 사당으로 장개석 모친이 자주 불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던 곳, 무령문에 들어서면 아늑한 거리와 호수가 어우러진 폼이 마치 도원명의
“도화원기”중에 묘사된 “무령”경치를 방불케 한다.
장개석이 세웠다는 무령중학교
장개석 같은 표정으로 계속 손을 흔들어주는 모델
장개석과 가족들이 살던집
장씨고거: 장개석총통 고향마을, 절강성 영파 봉화시 계구경내에 위치한 근현대사의
대표성 건축이다. 1996년에 국무원으로부터 제4기전국 중점 문물보호기관으로 지정됐다.
계구(溪口, Xikou, 시커우)현에는 대만의 초대 총통 장제스 일가의 거주지가 잘 보존돼 있다.
국공합작을 깨고 중국 공산당과 끝까지 대적하다 대만으로 물러난 군사지도자, 대만에서
수차례 대륙 진출을 시도한 중국의 적이었지만 쉐도우산 아래 그의 집은 중화민국 시절의
문화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장제스는 1887년 소금상인 장지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가게이자 생가인 '옥태염포(玉泰盐铺)'는 장제스가 태어날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그의 가족이 살던 풍호방은 방이 49칸에 달한다. 장씨는 여기서 4명의 부인과 함께 살았고
장남 장경국(장장궈)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저장성 재벌가의 딸이자 장제스의 4번째 부인,
정치적 동반자였던 쑹메이링(宋美齡)은 이 건물 앞에 금목서나무와 은목서나무를 직접 심었다.
장씨의 조상을 모신 사당과 프랑스 향촌 교육을 모방해 세운 '무령학교', 공자를 모신 사당이자
쑹메이링이 쓰던 가구가 전시된 '문창각'도 둘러볼 만하다.
장씨의 유산은 강을 끼고 쭉 뻗은 큰길을 따라가면서 보면 된다. 이 길은 ‘삼리길’이라 불리는데
일종의 관광지구다. 거리에는 인력거가 넘치고 상점에서는 옛 과자와 의상, 기념품을 판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으로 분장한 남녀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도 있다.
백과사전에서
장개석 아들 장경국의 결혼사진인듯
가족의 위폐를 모신곳
잎과 꽃은 등나무 같은데 나무로 되어있다
회의실 같은데 문이 잠겨있어 카메라만 겨웅 집어넣어 찍어봤다
그시절의 주방
식탁인듯
송미령 이전의 부인이 기거했던 곳 같다
장개석의 시대적 사진
장개석 모친이 기거하던 방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계 동강이라고도 한다
빵굷는 항아리 인천 차이나 타운에서 본것 같다
진열된 빵들
장개석이 태어난 집앞에서 일행과 함께
옥태염포에서 사용한 저울과 주판
옥태염포
청나라 동치 10년(1871년)에 장개석의 조부인 장사천이 점포를 개점 취급상품은
소금 판매와 양조업을 위주로하고 쌀집 떡집을 겸하면서 석회와 잡화등을 판매 하였다
그러다가 장개석의 아버지 장조총에게 넘겨주어 그가운영 청나라 광서 13년(1887년)
9월15일에 장개석은 이곳2층에서 태어났다 광서 14년에 불이나서 아래매장과 2층
주거용지가 전부소실 옥태염포도 영업정지되고 상점도 문을 닫았다
여기서 장개석이 태어났다
장개석이 태어난집
마을앞을 흐르는 섬계
충효전가
장개석의 친필휘호로 국가에 충성하고 조상에 효도하는 것은
가정에서 전해저야 한다는 뜻
문창각 입구에서 바라본 섬계
-문창각: 1731년에 세워진 건물로 청대 계구 십경중 하나이다. 1924년에 장개석이
보수재건, 송미령과 결혼후 자주 거주하면서 두사람의 개인별장으로 되였다.
송미령의 가구들이 있는 문창각을 뒤로하고 한.중 걷기대회장으로 이동
중국인들에게는 역사의 장으로서 중요시하는 곳이겠지만 나라를 잘못다스려
대만으로 쫓겨간 장개석을 생각하면 그리 좋아 할 일도 아닌것 같다 다만 역사의 한장으로
남기고 교훈으로 삼을수 있다면이야 뭐 나무랄일도 아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니 걷기대회는 잘 진행이 될런지 그게 더 궁금하다
일단 식당으로가 식사하고 기다려봐야겠다
영파에는 흥미로운 곳이 한곳이 있다. 바로 영파시에 포함되어있는 봉화시(奉化市)로 이 곳은 중화민국의
대 총통이었고 결국은 대만으로 쫒겨났던 장개석의 고향이다. 이 봉화시는 장개석 일가의 고향으로 하나의
관광코스로 잘 개발이 되어있다. 참 신기한 것은 분명 장개석은 중국 정부의 가장 큰 정적이고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준 아픈 과거임에 불구하고 그의 생가, 부친, 모친의 생가, 분묘, 그리고 그 자녀들의 거쳐까지 하나의
박물관처럼 잘 보존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중국 여러 곳을 다녀봐서 알지만 중국 사람들은 좋은 역사
, 나쁜 역사까지 모두 자기의 역사로 인식하고 후세들에게 교육시켜 미래를 준비한다.
장개석은 1887년에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에서 태어나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견습사관으로 있던 중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손문의 광동정부에 들어가 북벌군 참모장, 초대 황포군관학교장을 역임했다.
손문이 사망한 후에는 혁명군사령관으로서 북벌을 완수하여 국민적 인기를 모았으나 항일전쟁 이후 공산군에게
참패하여 대만으로 건너가 1875년 4월 5일 88세에 사망할 때까지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있었다.
그의 큰아들 장경국은 대를 이어 총통이 되었고, 작은 아들 장위국은 4성장군으로 있다가 국가안전국장을 지냈다.
나이 마흔에 결혼한 송미령(당시 26세)은 장개석이 사망한 후에 미국에서 생활했다.
영파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를 한 50분 정도 달리면 봉화시가 나오고 봉화시 계구(溪口) 풍경구입구에
도달해서, 어떻게 이 곳을 둘러 보아야하나 보고 있으니 이지역은 마을과 산 하나 전체가 장씨 가문 기념지로
되어있어 혼자 찾아 다니기는 조금 벅차 보였다. 입구에서 물어 보니 가이드를 대동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여,
가이드를 고용해서 천천히 설명을 들으면서 입장했다. 처음 들른 곳은 『장씨고가(蔣氏古家)』라는 간판이
붙은 장개석 생가와 송미령 별장이 있었다. 목조 이층집에 정원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태어날 당시의 집이
아니라 대륙에서 국민정부 주석 등의 요직을 지낼 때에 지은 것이거나, 아니면 대만관광객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새로 만든 것 같았다. 항일전쟁 보다는 공산군 토벌에 더 열성이었던 장개석의 옛집을 중국정부가
그대로 두었겠는가?
Seduces Me(날 유혹해요) - Celine D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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