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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안국사지와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041-350-3114 당진시 정미면 원당골1길 188

 

 

                           안국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안국사는 창건된 해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곧 다시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100호)이 보존되어 있다.

                           탑은 아래부분인 기단부(基壇部)가 다른 탑들에 비해 간단하고, 2층 이상의 탑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포개져 있어 다소 엉성해 보인다. 탑신(塔身)은 유일하게 1층 몸돌만이 남아있는데,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고 무거워 보이며, 처마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

                           4단의 지붕돌 밑면받침을 밖으로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이며, 1층 몸돌이 작아서 마치 기단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듯 하여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안국사는 안국산(일명 은봉산)에 위치한 폐사지(廢寺地)로 1929년에 다시 세웠다

                                         고하나 또다시 폐사되었다. 이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높이 5m에 가까운 큰 석불입상이 있다.

                                         머리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신체의 비례상 어색하게 큰 편이다.

                                         불상의 몸은 대형화되었는데 인체의 조형성이 감소되어 네모난 기둥같은 느낌을 준다.

                                         또 몸과 어울리지 않게 팔과 손을 붙여 비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붙여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에는 본존불을 모시는 보살상이 있는데, 오른쪽 보살은 허리까지 묻혀 있고 왼쪽

                                         보살은 머리만 파괴되었을 뿐 형식은 본존불과 같다.

 

 

 

 

                                                                                     배바위 암각글씨

 

 

 

                    당진안국사지 매향암각은 자연석의 통바위로서 규모는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이다.

                    형태가 배모양 같다 하여 '배바위' 또는 고래모양이라 하여 '고래바위' 또는 베틀에 딸린

                    북모양이라 하여 '북바위'등으로 불리우며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다. 배바위의 암각 명문은 매향과

                    관계된 고려말, 조선초의 기록으로서 전국에서 발견된 매향관련 명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라 할 수 있으며 조성시기를 달리하는 2건의 매향자료가 기록되어 있어 안국사지

                    주변지역의 역사와 매향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로이동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 배치평면도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 배치평면도

                                                                           충남 아산시 둔포면 해위길52번길 29
                                                                           (지번)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1

                                      행랑채 안으로 들어서면 솟을대문으로 구분하여 대문채와 행랑채로 나뉜다.

 

           넓은 평지마을 한가운데에 동남향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1907년에 지은 것이라고 전하나, 바깥사랑채는 건축양식으로 보아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안사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안사랑채의

           왼쪽 모서리에 'ㄴ'자형의 행랑채가 이어져 있다. 오른쪽 모서리에는 'ㄴ'자형의 바깥사랑채가

           배치되었다.

           안채는 부엌이 동쪽에 배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바깥사랑채는 높은 누마루집으로 다른 건물과 별도로 담을 돌리고 대문을 내었다. 중문간은

           일반적으로 밖에는 대문을 달고 안마당쪽은 개방되어 있는데, 이 집은 양쪽에 모두 대문을 달고

           밖으로 여닫게 되어 있어 특이하다. 행랑채는 안사랑채에 지붕을 아래로 한단 겹치면서 잇대어

           짓고 앞쪽으로 솟을대문을 내었다.

           행랑채의 서쪽에 있는 부속채는 우리나라 동부지역에만 분포하는 '양통집'이며,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후대에 부분적인 개조가 있었지만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구성을 한 상류주택이다.문화재청

 

                        

                                         특이한 구조의 사랑채의 미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윤 전 대통령의 선친인 윤치소가 1907년에 지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우측에 자리한 사랑채는,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별도의 담을

                  둘러 일각문을 내었다. 사랑채의 누마루 아래에는 숨은 쪽문이 있어 사랑채의 뒤로해서 안채로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사랑채는 서쪽으로 누정과 같이 높은 네모뿔대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방을 들여놓았다.

                  이곳에 오르면 앞뜰이 훤히 내어다 보일 것이다. 그리고 두 칸 큰사랑과 두 칸 대청, 건넌방을 두었다.

                  앞으로는 모두 유리문을 달아냈는데, 우리 전통 고택의 창호와는 다르다. 전체적으로 사랑채는

                  하나의 또 다른 공간 구성을 하면서 멋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점이 이 집의 특징이기도 하다                      

 

 

 

                                            풍수설화에 의하면
                                  대문밖에 왠초라한 행색의 나그네가
                                  쓰러져있어 방으로데리고와서
                                  구병을 하였더니 기력을 회복한 나그네가
                                  報恩으로 산으로 올라가 명혈자리를 점혈하여 주어
                                  그 음덕으로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 윤치호 씨등
                                  해평윤문에 훌륭한 인재가 나왔다고 전합니다.

                                   나그네~(술학에 도통한 異人일것입니다)
                                   해평~ 경북에 있는 고장입니다.

 

 

                                        담벼락 행랑채와 중문채가 담벼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존채는 별 설명이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까지 윤보선 전대통령가옥

 

 

                남쪽으로 발달한 낮은 언덕 위에 해평 윤씨 일가들이 지었던 상류층 가옥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종가댁이라 불리는 이 집은 헌종 10년(1844)에 지은 것이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이용하는 솟을대문을 지나 작은 길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종요민속자료 제196호)가 있고 이 집과 인접해서 윤승구 가옥이 있으며 더 위쪽에 윤제형

                가옥(충청남도민속자료 제13호)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윤일구 가옥(충청남도민속자료 제12호)이

                있어 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윤승구 가옥은 제일 앞에 남향으로 사랑채가 있는데,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그 옆으로 중문이 달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간채가 있다.

               중문에 들어서면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문간채의 끝에 맞추어 담장을 쌓았으며 담장을 왼쪽으로

               돌아가면 안마당에 이른다. 안채는 앞면 4칸·옆면 2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가운데에 2칸통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건넌방, 왼쪽에는 안방을 들였고, 안방 앞으로 1칸의 부엌을 마련하였다.

               안채의 왼쪽 담장 너머에는 앞면 4칸·옆면 2칸의 별채가 있다.

               위건물은 사랑채

               대체로 잘 손질한 부재를 이용하여 간결하게 지은 가옥이다

 

1844년에 지어진 윤승구 가옥

 

윤승구 가옥은 상량문에 '승정 기원후 4갑진 12월 1일'이라고 적혀 있어, 조선조 헌종 10년인 1844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의 특징은 대체로 잘 손질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기초를 마련하였고, 네모

기둥을 사용했으나 기둥 위에 공포를 모두 생략해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집의 담장을

 모두 붉은 벽돌로 쌓아올려 고풍스런 느낌을 주고 있다.  

 

윤승구 가옥의 사랑채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그 옆으로는 중문이 달린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문간채가 달려 있다. 사랑채 옆에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문간채의 끝에 맞추어 담장을 쌓았다.

 

안채는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ㄱ자형 평면이다. 안채의 중앙부분에는 두 칸통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한 칸의 건넌방을 두고, 왼쪽으로는 두 칸의 안방을 들였다. 집의 전체적인 꾸밈에 비해

 안채는 간소한 편이다. 안방 앞으로는 한 칸의 부엌을 들였는데, 안채의 왼쪽 담장 너머에는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별채를 마련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쓰임새 있게 지어진 집. 부녀자들이 살림을 맡아하는 안채보다는 사랑채와

             문간채 등 남정네들이 사용하는 곳을 넓게 만든 윤승구 가옥. 아마 종가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사랑, 행랑, 대문, 별채 등 여러 채의 집을 준비한 것 같다. 날이 풀리면서 여기저기

             흙도 떨어져 나가기는 했어도, 예전의 그 품위를 지키고 있는 집이다. 온전히 보수를

             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윤승구가옥 내부

               윤승구 가옥의 굴뚝은 낮다. 이렇게 굴뚝을 낮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낮추라는 교훈이라고 한다.

               낮은 굴뚝이라고 해도 굴뚝의 용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굴뚝을 보면서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하니, 선조들의 지혜에 감복을 할 뿐이다.               

                         종가집으로의 품위를 지키는 윤승구 가옥

 

           윤승구 가옥은 딴 집보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찬찬히 돌아보면,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다.

           한 마디로 종가집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밖으로 향한 사랑채의 끝은 마루방으로 꾸몄는데,

           창호를 색다르게 내었다. 집안의 방들은 모두 이중 창호로 하였으며, 안에는 범살창으로 하고

           밖으로는 판자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사랑채 곁에 난 중문을 들어서면 바람벽을 막아 놓았다. 이 바람벽도 담장 위에 기와를 얹어 멋을 더했으며,

           좌측으로는 헛간을 우측으로는 방을 들였다. 사랑채를 보고 우측으로도 붉은 담장을 치고 일각문을 냈는데,

           일각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담으로 사이를 막아 놓았다. 집 뒤로 돌아가니 대밭이 보인다.

           이렇게 대를 심어 놓은 것도 늘 대처럼 뜻을 굽히지 말고, 곧게 살라는 뜻으로 가꾼 것이라고 한다.

           그냥 집이 아니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교훈을 담고 있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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