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경북 산림환경연구원은 기후변화에 대응한 산림환경조사,
산림병해충의 친환경 방제, 유망 임산물의 소득화 연구, 산림의 효율적인 경영과 보호를
위한 임도 및 사방사업을 수행하는 산림 전문 연구기관이다. 또한 야생화원, 무궁화동산,
산림전시실, 습지생태원 등 오랜 세월 가꾸어 온 아름다운 산림자원을 바탕으로, 해마다
우리 연구원을 찾아오는 30만명 가량의 관람객에게 산림문화를 즐길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숲해설 프로그램과 유아숲체험원도 운영중이다.
054-778-3800 경주시 통일로 367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주는 어떤 곳일까? 아마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왕릉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 일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경주는 가는 곳곳 마다 문화재와
유물들이 자리잡고 있어 경주시 내에서는 개발을 제한하는 규정도 매우 까다롭다.
그 덕분에 경주는 신라 천년의 역사와 함께 자연 보호가 잘 되어있어, 바쁘게 지나가는
현대사회에서 지쳐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힐링해 주는 장소로 자리잡고 있다.
홀로 경주여행을 가려는데 사람이 북적이는 것이 싫을 땐, 경북 산림환경연구원을
걸으며 지친 마음을 달래보는건 어떤가.
은행 잎이 소나무위에도 땅위에도 수북히 내려 앉아있다 몇일 빨리왔으면 좋았을걸
곱게 물들은 메타스퀘아길
잎이 있을때는 숲 턴널이 장관일것 같다
본 연구원 에서는 산림자원보전, 산림가치증진, 산림문화융성 이라는 세 가지의 큰 타이틀을
목표로 친환경 산림 병해충 방제연구, 임신버섯 신물질 개발 및 상업화,
유아 및 청소년 숲 체험 학습공간 운영등의 활동을 운영중에 있다.
또한 이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비교적 적게 닿였을 뿐더러 관리가 매우 잘 되고 있어
나무 외에도 진달래꽃, 목련 등의 꽃 부터 이름 모를 들꽃들 까지 다양하게 자라고
있어 눈이 심심할 새가 없다.
웹문서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건지 카메라맨들이 5명정도 따라다니며 열심히 촬영을한다
숲길을 걷는 우리 일행들 간간히 관광객들과 나들이 가족이 보인다
용담정을 보기위하여 대충 돌아보고 이동을한다
포덕문
대신사 수운 최재우동상
용담정으로오르는길
팔손이 나무는 겨울에 꽃을피운다
용담정에서 깨친 '사람이 곧 하늘' - 수운 최제우
1995년 교육부에서 펴낸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동학의 발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동학을 창시한
사람은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였다. 동학 사상은 사회 지도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성리학과
불교를 배척하는 동시에, 서구 세력과 연결된 천주교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서학을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동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학 사상은 전통적인 민족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천주교의 교리까지도 일부 흡수한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특히, 철학으로서의 동학은 주기론에 가까웠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은 샤머니즘과 도교에 가까워 부적과
주술을 중요시하였다. 사회 사상으로서의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평등주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하늘의 운수사상을 내세웠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학은 운수가 끝난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혁명 사상을 내포하였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워 서양과 일본의 침투를 배척하였다. 이와 같이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동학이 창시되자, 이를 따르는 신도가 늘어나 삼남 일대에 퍼졌다.
동학도의 세력이 날로 번성하자, 정부에서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조 최제우를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경주 서쪽에
길게 뻗은 구미산(594m)의 북쪽 골짜기가 흘러내리는 계곡, 유현하고 깊으며 인적이 드문 산골 개울
가 반석 위에 용담정이 있다.
이 곳이야말로 경주에서 출생한 뛰어난 인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을 창시한 곳이다.
경주 최시 근암(近庵)공 옥(수운 선생의 아버지)이 정자에 앉아 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뒷산에서는
부엉이 소리며 산새들 소리가 들리고, 앞산에서는 산짐승 소리가 간간이 들려 왔지만, 근암은 글의
속 뜻을 궁구하는데 몰두해 있었다.
날은 어두워 아무도 찾아올 이 없는데 난데없이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비 어른 길 가던
사람이온데 날은 어둡고 갈 길은 멀어, 불 있는 곳을 찾아 왔심더. 어려운 사람 좀 살려 주시이소!"
"허- 이런 일이 있나! 밤에는 산짐승이 설치는데 길을 갈 수야 없지요. 여기 먹던 밥이 좀 남았으니
요기나 하고, 고단할 테니 저쪽 아랫목에서 주무시지요. 나는 책을 읽어야 되니 너무 개의치 마시고
그리하시오."
아량이 넓은 근암공은 태연히 글공부에 열중했다. 요기를 마치고 개울에 나가 설거지도 하고 세수도 하고
온 여자는 단정한 매무새로 앉아 말하였다. "선비님, 저는 산 너머 금척(金尺)마을 한(韓)가 이옵니다.
안강에 시집을 갔사오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홀로 사는 몸이온데, 오늘 친정에 가는
길에 날이 저물었심더."
"외람되오나 감히 드릴 말씀은 며칠 전에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몽매간에 해[白日]가 품 안에 들어오며
이상한 기운이 몸을 감싸더니 부지부식 중에 30리밖에 있는 경주 가정리(柯亭里) 근암공의 집으로
들어갑디다."
근암공은 한씨 부인의 놀랍고도 진솔한 말에 감동하여 부부의 의를 맺으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갑신년(1824) 10월 18일에 선생을 낳았다. 이날 천지가 청명하고 서운이 방안을 감싸고
구미산(구만리장천산)이 크게 울었다고 한다.
수운은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일찍 장가를 들었으나, 농사에는 맘이 없어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높은 경지를 향해 여러 곳으로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구미산
용담정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도를 닦았다.
수운이 37세인 1860년 4월 5일 이 곳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천도교를 창도하였으니,
용담가에 잘 나타나있다. 그후 동학을 포교하다가 선전관 정운귀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갇혔다.
심문을 당할 때 서학(西學)의 도가 아니냐는 물음에
"내가 주장하는 도는 천도(天道)다. 동에서 일어나 동에서 배우니 동학(東學)이라면 몰라도 서학이란
가당치도 않다."는 말에서 동학이란 말이 생겼으며, 유도나 불도 이외는 이단이고 사도라
할 때였기에 대구장대 관덕정 아래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복술(福述)이었으나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의지를 지닌 이름 제우(濟愚)로 스스로
이름을 정했다. 1860년부터 1863년까지 도를 펴다가 몸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민중에 퍼진 그의 뜻은
바람에 이는 불길처럼 각지로 번져 나갔다.
그의 시체는 거두어 용담정 북동쪽 1km 되는 산등성이에 묻었으며, 그가 살던 집은 용담정에서
동북 2km 지점에 터만 남아 있고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경주역에서 포항가는 7번 국도를 따라 2km
가다가 황성공원 북쪽에서 서쪽으로 꺾어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8km 정도 가다가 왼쪽으로
가면 용담정이고, 오른쪽 마을에는 살던 집터가 있다. 내생애님 글중에서
최제우는 1824년 10월 28일 경북 경주에서 부친 옥(鋈, 號 近庵)과 모친 한(韓)씨와의
사이에서 만득자(晩得子)로서 출생했다. 최제우의 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은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읽었고, 13세의 나이로 울산 출신의 박(朴)씨와 혼인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남달리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참된 진리를 찾아
구도(求道)에 힘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ㆍ불ㆍ도의 교리를 두루 섭렵해 보았으나 기성종교로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음을
개탄하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구도행각을 하는 한편, 음양(陰陽)ㆍ복술(卜術)ㆍ주술(呪術)
등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며, 활쏘기, 말타기, 행상 등을 하며 세상인심을 경험했다.
1855년 32세 되던 해에 울산에서 초당을 마련, 조용히 묵상에 잠겨있는데 이상한 도인이
나타나 책 한권을 주는 것이었다. 이것을 《을묘천서(乙卯天書)》라 한다. 그 책을 받아
숙독하는 한편 기도생활을 계속했다.
특히 천성산(千聖山) 기도, 적멸굴(寂滅窟)에서의 49일 기도 후, 울산 집에서 적공을
드리던 중 그의 나이 37세 되던 1860년 4월 5일 갑자기 몸이 떨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중에 상제(上帝)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년 동안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861년부터 이 도를 ‘동학(東學)’이라 부르며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동학을 펴기 시작한지 불과 몇 달 만에 서학(西學)과 동일하게 취급되어 관청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고향을 떠나 피신 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남원 은적암(隱寂庵)에서 동학의 사상적 기반이 된 안심가(安心歌)ㆍ교훈가(敎訓歌)
ㆍ포덕문(布德文)ㆍ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間答歌)ㆍ논학문(論學文) 등을 제자들과의
서신(書信) 형식으로 이룩했다. 그러다가 1862년 남원으로부터 고향 경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돌아오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처럼 신자들이 모여들자
그해 9월 영장(營將)은 최제우를 체포해 갔다. 이 소문을 들은 각지의 제자들이
경주병영에 모여들어 최제우를 석방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신도는 급증하게 되었다.
1863년 불어나는 신도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키 위해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는 한편
8월에는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道通)을 전수 하는 등 교회제도(敎會制度)를
갖추어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동학의 신도가 크게 늘어나는 것을 우려한 관청에서는
이단사교(異端邪敎)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좌도난정(左道亂政)이라는 죄를 씌워
최제우를 비롯한 제자 23명을 체포해갔다. 그리고 최제우는 1864년 1월에 대구 감영에
이첩되어 3월 10일에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다.
최제우의 사상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나타나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천주(한울님)와 지기, 시천주와 사인여천, 수심정기, 성경신으로 집약된다. 수운사상의
핵심은 천주(天主)와 지기(至氣)로 대분된다. 천주사상은 신관이요 지기사상은
우주관이라 할 수 있다. 천주는 상제 즉 한울님이다. 최제우에게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모양은 태극(太極)이요 또 그 모양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의 병을 고치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기리 살아 덕을 천하에 펴리라”(《동경대전》 포덕문)라는 계시를 내려준 것이다.
천은 동양사상에서 유일자존(唯一自尊)의 전체자리로서 만물이 모두 여기에 근원하고
그 지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로 이 천에 인격성을 가미한 존재다. 아울러
천주는 우주의 일부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우주 밖에 독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상 속에 내재해 있으면서 우주만물을 총섭 하는 존재다. 이 존재는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로 존재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이 우주전체를 총체적으로 말할 때 천주라
하고 또 ‘한울님’이라 한 것이다. 지기는 천주와 표리적 관계로 파악되는 개념으로
천주와 함께 최제우가 득도한 사상의 양대 골격중의 하나이다.
인내천이란 표현은 뒤에 나타나고 있지만 최제우의 ‘오심즉여심(吾心卽如心)’ ‘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동경대전》 논학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수심정기
(守心正氣)란 안에 있는 신령의 마음을 잘 보존하고 기운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이다.
최제우는 “인ㆍ의ㆍ예ㆍ지(仁義禮智)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동경대전》 수덕문) 했다. 성ㆍ경ㆍ신(誠敬信)이란 정성ㆍ공경ㆍ
믿음을 의미한다. 최제우는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별로 다른 도리가 없고 성ㆍ경
ㆍ신 석자니라”(《동경대전》 좌잠)하여 이 성ㆍ경ㆍ신을 중요한 윤리덕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도원
포덕문에서 바라본 구미산
몇일 자리를 비웁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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