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287-8
탑정저수지라고도 한다. 1941년 착공하여 1944년에 준공했다. 면적 6.36㎢, 제방길이 573m, 높이 17m,
최심 12m이며, 저수량은 3,161만t 정도이다. 논산평야의 젖줄로서 논산 농지개량조합 저수지와 인천천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수원이 매우 풍부하며 51.97㎢의 논에 관개용수를 공급하는데 물은 2개의 수문을
통해 논산천 양안에 놓인 저수지의 수로를 따라 성평리와 성덕리 쪽으로 흐른다. 남쪽으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붕어·잉어가 많아 낚시터로도 인기가 있다. 주위에 계룡산국립공원과
대둔산도립공원이 있으며, 관촉사전망대·은진미륵불이 있어 관광·휴양객이 많이 찾아온다.
탑정호에는 여름에는글램핑장도 운영하고 있나봅니다
글램핑이란 화려함을 뜻하는 글래머러스와 캠핑의 합성어로 별다른 캠핑도구 없이도 편리한 부대시설과
편의시설(본관, 화장실, 샤워실, 개수대 등)과 텐트가 갖춰진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캠핑을 즐기는데
집중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곳이다.
들이 넓어 편안하고 여유로움이 가득한 탑정호수변생태공원은 수생식물원, 자연학습원, 분수, 팔각정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어린이들에게는 자연학습장으로 연인들에게는 데이트 코스,
가족들과는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일년내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조그마한 솔섬같은 정자가 있을법한 곳이다 일몰이 아름답다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
수변에는 데크길을 만드느라 공사가한창이다
그림같은 풍경 레스토랑 미니콘도 같다
데크시설이 완공되면 걸어서 한바퀴돌면 좋겠는데~~언제 또 올수있으려나
호수가에서 언제나 볼수있는 갈대도 담아보고
부부와 아이들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아버지가 딸을 안았으면 더 좋겠다 생각
그런데 왜 서양사람을 조각했을까
우선 차로 호수끝길까지 한번 다녀와 주차장에 주차하고 억새숲이 있는 데크를 걸어본다
호수와억새 아직도 꽃씨를 날려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바람이 약했나
오늘 산책에서 제가 가장 즐거웠던 곳이 바로 이 무성한 강아지풀 길입니다.
강아지풀은 봄의 전령사이기도 한데, 오늘은 마치 가을의 전령사인 듯합니다.
그런데 수크렁인지 강아지풀인지 해갈기네
원앙과 두루미 가까이가면 모두들 푸드득 날아가버린다
한적한 억새길을 걷는 대학생인듯한 두친구 탐정호에 와서 처음 만나는 반가운손님
청둥오리인지 원앙인지 조그마한 소리만나도 날아서 자리를 이동한다
호수가에는 부유물이 어지럽게 떠있다
폐선에 가까운 조각배는 반쯤 물에 잠겨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물래방아도 때가 아닌지 멈추어있고 명재 고택으로 가기위해 이동하는중 백일헌장군의 고택
안내판이 있어 들려보기로 한다
솟을대문과 문간채
오른쪽 끝에 담장이 처진방은 며리리 방이라고한다 며느리를 배려한 이삼장군
지금 사랑채와 안채의 바닥공사중이라 주위가 산만하다
그래도 후손이 살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보존이 되고 있지 않을까
며느리방을 이렇게 앞이 잘보이도록 배려 했다는건 그시대에 상상 할 수 없는 발상이 아닐까?
빌려온사진
사랑채
백일헌 이삼 장군은 윤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정주목사를 거쳐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어영대장, 훈련대장, 한성판윤에 이어 공조와 병조판서 등 조선조 요직을 두루 거친
분이십니다. 무술에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이분이 난을 평정하여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은 지은지 벌써 300여년이나 됐으니
이젠 고택이 됐습니다.
안채
고택은 창건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있습니다.
장군이 거주했던 집이라 그런지 동네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지어져 있습니다.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대문 좌우로 문간채가 있고 그 앞으로는 사랑채가, 그 옆으로는
안채가 이어져 있습니다.
안채 왼쪽 뒤로는 사당으로 이어지는 중문이 있고요.
뼈대 깊은 전통 사대부의 가옥은 터가 넓은 것은 둘째 치고 내부 공간이 주는 웅장함이 남다르죠.
그런데 보시다시피 백일헌 고택은 그런 느낌보다 오히려 검소하고 간결한 느낌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아주 큰 규모가 아닌, 보통의 크기라는 점입니다.
1995년까지는 가족들이 살았는데. 다들 도시로 나가고 각기 사정이 있어서
약 10여 년을 빈집 상태로 놔뒀었는데. 하지만 한옥이란 본디 사람이 살지 않으면
오히려 더 빨리 낡고 상하게 되잖아요. 요즘 사는 아파트 같은 콘크리트가 아닌 목재건물이다
보니 좀 먹고 개미들이 파먹고 쥐들이 드나들며 갉아먹으니까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2005년부터 다시 조금씩 관리하기 시작했는데 가옥의 활용도를 고민하다가
지금은 전통가옥 숙박체험을 하고 있다합니다
삼백년을 견디어온 기둥
이삼장군 영정
사당
뒤쪽에서 바라본 안채
백일헌 고택에서는 전통가옥 체험뿐만 아니라 전통음식 체험도 진행하는데 제사 후에 먹는
국말이, 율란, 조란과 같은 전통 다과를 맛보는 체험인데, 흔히 접할 수 없는 음식들이라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나오면서 다시한번 담아보고 또 중간에 노성 권리사를 잠시 들려본다
노성면소재지에서 국도 23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400m 정도 가면 북쪽으로 향하는 소로가 있다.
이 길로 약 450m 들어가면 노성 궐리사가 자리 잡고 있다. 200m 오른쪽에는 윤증 고택이 있다.
노성 궐리사는 계단을 따라서 약간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외삼문이 닫혀 있어서 궐리사
내부는 관람할 수 없어서 아쉽기도 합니다. 궐리사 내부에는 강당인 현송당, 내삼문을 지나
사우인 궐리사, 그리고 모성재와 문간채 등이 남아 있습니다.
노성 궐리사의 건축 구조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외삼문을 지나면 현송당(絃誦堂)이 있고,
현송당 뒤편의 내삼문을 지나면 사우가 있다. 궐리사의 서쪽 담장에 연결되어 모성재(慕聖齋)와
관리사와 문간채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1717년(숙종 43) 공징로(孔徵魯)·공사중(孔思中) 등이 재상 이경억(李慶億)을
따라가 중국에 가서 공자의 유상(遺像) 일체를 얻어 왔으며, 1758년(영조 34) 이제후(李濟厚) 등의 상소로 이때
가져온 공자상을 노성 궐리사에 봉안하였다. 또 『읍지』에는 궐리사가 이산현(尼山縣) 북쪽 3리 지점에 있었으며,
1716년(숙종 42) 공자의 영정을 구해 노성의 이구산(尼丘山)에 사우를 건립한 후 봉안하였다고 되어 있다.
자료들에 따라 건립 시기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를 종합해 보면 1687년(숙종 13)부터 송시열이 노성 궐리사
건립을 추진하였고, 후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권상하 등 송시열 문인들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716년
노성 궐리사를 신축하였다. 아울러 중국에 가는 사신 편에 공자의 영정을 부탁, 이듬해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1805년(순조 5) 관찰사 박윤수(朴崙壽) 등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당시 규모보다 축소되었는데
, 일명 춘추사(春秋祠)라고도 한다. 일부 자료에는 이건할 무렵 사액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사를 지내는 사당
공자의 영정을 모시는곳
노성 궐리사의 동쪽에 ‘궐리(闕里)’라고 음각되어 있는 석주(石柱)가 있다. 석주는 각을 없앤 4각 기둥의 형태로,
꼭대기에는 정방형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노성 궐리사의 건립 시기와 비슷한 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 또한 석주 뒤에 2002년 중국에서 구입한 높이 약 2m의 공자상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노성권리사 전경
Ne Me Quitte Pas(If you go away) / Nana Mousko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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