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명재 윤증
1642년(인조 20) 아버지 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
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9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2016년 11월22일 공주에 가면서 명재 고택에 들렸다
나눔의 미덕이 지켜온 윤증 선생의 고택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학자인 윤증(尹拯) 선생의 가옥으로, 그의 호를 따서
명재고택이라 불린다. 그는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사양했을 만큼, 성품이
대쪽 같았다고 한다. 게다가 검소와 나눔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 후대에 가르쳤는데, 덕분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 의해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택이 소실될 뻔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윤증 선생의 성품을 반영하듯 고택은 다른 사대부 집안의 가옥에 비해
겉모습이 소박한 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기품이 느껴질 뿐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과학적 설계에 감탄하게 된다
안채와 곳간채, 사랑채에서 찾은 선조들의 지혜
전면이 개방된 사랑채의 왼쪽으로 난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나온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ㄷ’자형 구조인데, 안채 앞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을 이룬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넘어오는 길에는 벽이 있는데, 이곳에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다. 문간에 벽을
설치하여 방문객이 안채의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차단한 것이다. 단 벽 아래에는 공간이 나 있어,
안채의 마루에서는 그 공간으로 신발을 보고 방문객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를 남자들이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게 한 지혜인 것이다
명재고택 사랑채에 걸린글귀들.
맨 왼쪽 당호는 이은시사(離隱時舍). "세속을 떠나 은거하는집"
왼쪽 누마루 출입문위엔 도원인가(桃源人家). "무릉도원"
우측 마루위엔 허한고와(虛閑高臥) .하늘을 가리고 한가히 눞다.
尹拯(1629년 ~ 1714년)은 조선의 학자. 서인 소론의 영수다.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윤선거의 아들이자 성혼의 외증손이 된다.
또한, 안채 옆으로 곳간채가 있는데, 두 건물을 나란히 두지 않고, 북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도록 두었다.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북쪽의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 속도가 빨라져 주변이
서늘해지고, 겨울에는 반대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남쪽의 넓은 통로를 빠져나가 매서운 북풍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곳간채의 북쪽 끝 창고는 여름철에도 서늘해서, 이곳에 차갑게 보관해야
할 것을 둘 수 있었다. 사랑채는 큰사랑방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대청이 있고, 좌측에는 누마루가 있다.
또 그 뒤로 작은사랑방과 안사랑방, 대문간이 이어진다. 명재고택의 객실은 안채의 건넌방을 비롯한
사랑채의 사랑방 3곳이다. 누마루를 포함한 사랑채를 통째로 예약해 독채로 사용할 수도 있다. 더불어
마당 한쪽에는 초가 별채가 있고, 음향장비와 빔프로젝터가 설치된 초연당(超然堂)도 있어 단체 모임이나
공연을 할 수 있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욕실 겸 화장실도 깨끗하다. 사랑채에는 미닫이와 여닫이를 접목한
문이 있는데, 4쪽 미닫이문을 열고 다시 열면 여닫이문처럼 열리는 독특하고 과학적인 양식이다. 또한,
사랑채 누마루에 앉아 연못과 그 너머의 마을과 앞산을 내다볼 수 있다.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안채마당.
지금도 종손이 살고 있기에 출입을 삼가해달는 안내문이 있어 안채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
(1629-1711)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백과사전에서
안채의 뒷뜰.
뒷쪽에 사당이 보인다.
우측은 안채 대청 뒷부분이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항아리의 모습에 정겹고 반가운 마음이다.
명재고택의 장독대.
연륜이 있는 집안은 나름대로 비법이 전수되어 내려온 장맛이 있다.
근래에 들어서 이러한 전통적인 장맛을 상품한 종가(宗家)가 많이 있다.
예전에는 서민들은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었고 사대부 집안이나 간장으로 음식의 간을 보았다
주진하님글
명재고택의 장독대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함께 장관을 이루어 사진찍기 좋은 이름난
출사지의 한 곳이 되었다.이날도 한분이 사진을 담으며 석양을 기두리고 있었다
사당
수북히 떨어진 은행들
머름
바람을 막거나 모양을 내기 위해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중방에대는 널조각
지방마다 담장의 형태가 모두 다르다
안쪽에 작은사랑방의 띠살문이 보인다.
사랑채 뒷부분은 쪽마루를 설치해 작은사랑방을 통하거나 우측의 협문을 통해 안채와 연결되도록 했다.
담 아래 굴뚝은 누마루방 아래에 있는 아궁이와 연결된 것이다.
우물과 향나무.
초창기 고택의 경계는 초입의 연못 옆에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있었고 담장도 그곳에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은 1850년경에, 사랑채 앞 현재 공터인 곳에 있었던 행랑채와 부속채는 1900대 초반에 헐렸다고 한다.
현재의 우물 위치가 집안인 셈이다.
지금도 이집에서는 장을 담을 때 이 우물물을 이용한다고 한다.
예부터 향나무는 청정(淸淨)을 뜻한다.
향나무의 뿌리가 물을 정화한다고 믿었기에 우물이나 샘 가에 많이 심었다.
관리동인것 같은데 지금은 거주하지 않는가보다
향교도 문이 잠겨있어 겉에서만 사진에 담아본다
명재고택과 향교사이에 아름다운 연못 배롱나무꽃이 필때면 더 아름다우리라
들어갈 수 없기에 담넘어로 대성전을 담아봤다
우물밖에 문간채가 있었는데 헐리고 담장도 없어저 바로 사랑채로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마당도 딴고택에 비해 많이 넓다
차집과 체험관인듯 문이 닫혀있어 겉에서만봤다
소각장 모양이 좀 별나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이제는 공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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