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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천안 삼거리공원과 병천 순대거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충절로 410

2016년 11월23일에 공주에 다녀오면서

옛날 우리나라 삼남대로의 분기점이다. 이 길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로로 천안에 이르면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병천을 거쳐 청주로 들어가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로 통해 영동, 김천을 지나 대구, 감영, 경주, 동래로

 통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공주를 거쳐 논산, 전주, 광주, 순천, 여수, 목포등지로 통하는 대로다. 호사스러운

 관행이 지나가기도 하고 초라한 선비가 아픈 다리를 쉬어 가기도 하던 곳으로 천안삼거리는 갖가지 전설과

민요를 낳기도 하였다. 천안삼거리 흥타령은 기쁜 노래의 대명사인양 많은 사람들의 흥을 돋우고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이 유서 깊은 천안삼거리를 관광지로 조성코자 가로수로 능수버들을 심어 가꾸고 있으며 호수가에

화축관의 문루이던 영남루를 옮겨 수중에 세웠다. 또한 이곳에서는 해마다 흥타령 축제등 많은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홍대용은 천안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 홍역이 나주목사로 오래 근무한 관계로

 어린 시절은 대부분 나주 근방에서 보냈다. 나주 근방의 동복에는 천문학자인 나경진(羅景鎭)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나경진을 찾아가 그 집에 만들어둔 천문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자명시계인

후종(候鐘)을 보았다.

매일 그 집에 가서 이 기구들의 원리는 물론 만드는 법과 사용법을 배웠다. 이 기구를 얻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며 골몰히 천문학에 심취했다. 그리고 청주의 본가에 사설 천문대인 농천각(籠天閣)을

짓고 이것들을 보관했다. 그는 천문 관련의 서적을 여러 권 검토하고 이 기구를 이용해 천체를 관찰했다.

그가 여러 전적을 참고해 스스로 얻어낸 결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이다. 이 설은 실로 그의 오랜

탐구와 관찰에서 나왔다. 그는 지구의 둘레는 9만 리인데 하루 12시간 동안 한 번 돈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엇보다 지구가 돌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보다 앞서 이익 등이 이것을 주장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이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765년 그는 작은아버지 홍억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 실무 책임자)으로 청나라에 갈 적에

자청해 자재군관이라는 무관의 직책으로 따라갔다. 그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북경에서

청나라의 과학자들을 만나 지구의 자전설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이론을 듣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 이리하여 홍대용의 ‘지전설’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북경에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홍대용이 북경에 와보지도 않고 지전설을 주장했으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에는 박지원 같은 지기들이나 귀를 기울이고 알아주었을 뿐 조정 대신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지구가 돌면 어쨌다는 거냐?”라거나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설)은

 만고의 진리인데 한낱 괴담을 늘어놓는다”고 나무라면서 욕질만 했을 뿐이다. 진리를 찾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외로운 법이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런 세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학탐구에 생애를 바쳤다.

홍대용의 과학기술사에 남긴 찬란한 발자취

그의 죽음을 들은 박지원이 한걸음에 청주로 달려왔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역사에서 북학파를 이끈 인물로

 꼽는다. 그들은 현실개혁의지는 같았지만 추구한 방법은 달랐다. 박지원은 문학과 상업의 장려로, 홍대용은

 과학기술의 보급으로 그들의 뜻을 펴려 했다. 이 점에 있어서 홍대용은 특이한 존재였다.

전통적인 우리의 과학기술은 중세에는 뛰어난 면이 많았지만 공리공담에 빠진 유학자들은 과학사상을

 늘 천시해 발전하지 못했다. 이에 홍대용은 철저하게 이를 추구해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 찬란한 빛을

던져주었다. 특히 그의 기하학은 지극히 실용적인 것으로 토지 측량에 적절히 이용될 수 있는 이론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주해수용》이 현실에 적용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사상은 바로 후배들 곧 박제가와 이덕무 등에게 전해졌다. 그리하여 후배들 손에 의해 더욱 빛을

 발했고 후기에 와서는 개화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그의 저술을 모은 《담헌서(湛軒書)》는

 척박한 수준에 머물렀던 과학을 역사의 소중한 유산이 되도록 해주었다

 

 

 

 

 

 

                  흥타령

[음악] 사설 구절 마다소리 넣어 흥겹게 부르는 남도 민요 가지. 떠는 , 으로 내는 ,

꺾는 남도 가락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슬픈 설움조로 되어 있다. 육자배기, 새타령 등과 함께

잡가() 분류되기도 한다.

 

 

 

 


소리 - 안숙선, 박양덕, 김수연 명창

 

 

 

 

    에~~~

    창밖에 국화를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놓으니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이 돋네
    아희야 거문고 청 쳐라 밤새도록 놀아보리라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청계수 맑은 물은 무엇을 그리 못잊어 울며 느끼며
    흐르건만 무심타 청산이여 잡을 줄 제 모르고
    구름은 산으로 돌고 청계만 도느냐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허무한 세상에 사람을 내일 재
    웃는 길과 우는 길은 그 누가 내었던고 뜻이나 일러주오
    웃는 길 찾으려고 헤매어 왔건마는
    웃는 길은 영영 없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 지성으로
    부르고 불러 이 생의 맺힌 한을 후생에나 풀어주시리라
    염불발원허여보세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만경창파 수라도 못다 씻은 천고수심
    위로주 한잔 술로 이제 와서 씻었으니
    태밸이 이름으로 장취불성이 되었네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 이것 저것이 꿈이로다
    꿈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는 꿈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거나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빗소리도 님의 소리 바람소리도 님의 소리
    아침에 까치가 울어대니 행여 님이 오시려나
    삼경이면 오시려나 고운 마음으로 고운 님을 기다리건만
    고운 님은 오지않고 베게 머리만 적시네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 찬 바람에 어이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이 너 뿐인가 하노라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얄궂은 운명일세 사랑이 뭐길래
    원수도 못보는 눈이라면 차라리 생기지나 말 것을
    눈이 멀었다고 사랑조차 멀었든가
    춘삼월 봄바람에 백화가 피어나듯
    꽃송이마다 벌 나비 찾어가듯 사랑은 내 님을 찾아
    얼기설기 맺으리라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지척에 님을 두고 보지 못한 이 내 심정
    보고파라 우리님아 안보이네 볼 수 없네
    자느냐 누웠느냐 애 타게 불러봐도 무정한 그 님은
    대답이 없네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에~

    아깝다 내 청춘 언제 다시 올거나
    철 따라 봄은 가고 봄 따라 청춘가니
    오는 백발을 어찌 헐거나

    아이고 데고 허허~어~어 음~음 성화가 났네

 

 

 

병천 순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의 오일장(五日場)인 병천장에서 팔던 장터 음식이다. 일반 순대와 달리

 소나 돼지 내장에 채소와 선지를 넣어 맛이 담백해 전국적으로 유명해 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병천(竝川)’은 우리말로 ‘아우내’라 한다. 아우내 장터는 천안 삼거리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서 길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아우내 장터에는 순대 국밥집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순대 국밥만큼

 장꾼들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값싸고 맛 좋은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천안시 병천면에 돼지고기를 취급하는 햄 공장이 생긴 후에 아우내 장터에 순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병천면 주민들은 햄을 만들고 남은 돼지 내장에 각종 채소와 선지를 넣어서 먹음직스럽게

순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 병천 순대는 병천장에서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순대는 소나 돼지의 내장에 갖은 채소와 선지를 넣어서 삶아 먹는 전통 음식이다. 병천 순대는 돼지의

 창자 중 부드러운 소창을 이용하여 만든다. 깨끗하게 손질한 돼지 소창에 담백함을 더하기 위해서 찹쌀과

 들깨를 갈아서 집어넣는다. 그리고 양파, 대파, 양배추 등 각종 채소에 당면과 선지를 함께 넣는다.

집집마다 만드는 방식은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보편화된 순대와 다른 점은 당면의 양을 줄이거나 아예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에 선지와 찹쌀의 양을 늘리고 마늘, 부추, 생강 등으로 비린내를 없앴다. 옛날에는

 돼지 소창을 소금으로 깨끗이 씻고, 사람이 직접 도구를 이용하여 잘 다져진 소를 집어넣었다.

순대는 술안주로 그냥 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국밥을 끓여서 냈다. 가게마다 국물을 우려내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생강과 대파를 넣고 사골 국물을 우려내는가 하면 각종 한약재를 섞어서

특별한 맛을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병천장 장날에 순대를 팔던 음식점이 한두 곳 생긴 것을 시초로 약 40년 전부터 순대 특화 거리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장터의 순대 국밥집들은 대부분 10~30여 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한 가게들이다.

 대를 이어서 3대 째 운영하는 집도 있다.

그중 유명한 식당은 병천 순대의 원조로 알려진 청화집이다. 1960년대 후반까지 장터가 열리는 날에만

국밥을 팔다가 1968년에 처음으로 간판을 걸었다. 이를 시작으로 충남집, 돼지네 등 순대 전문 음식점이

생겨났다.

장터 음식에서 출발한 병천 순대는 비리지 않고, 담백한 맛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에

체인점이 생겼다. 전국에 병천 순대를 공급하게 되면서 가게에서 손수 순대를 만드는 방식으로는 물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순대 공장을 세우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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