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토1

광복절을 맞이하여


오늘은 광복절 절대로 그 때의 암울했던 시대를 잊어서는 않됩니

일제에 빌 붙어 호의호식 하며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 분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지나온 역사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요즘

절실히 실감하고 있습니다


오른쪽부터 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

왼쪽에 가봉분은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돌아오면 안장하기위해 가묘를 썼다


이봉창(1901 - 1932 ) 의사는 서울 출신으로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선생과 함께 일본 국왕 폭살 계획을 세워

1932년 1월 8일 동경 사쿠라다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던져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으나 일본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친 우로부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를 모신 묘역이다.

1946년 김구선생의 주선으로 봉환하고 안장되었다.

삼의사의 묘 왼편에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1879 - 1910)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려고 마련한 빈 무덤이다.

 

윤봉길(1908 - 1932 ) 의사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농촌계몽운동에 전력하였다. 1930년 망명길에 올라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 임시전부의 김구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 겸 상하이사변 전승 축하 기념식에 참가한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이하 일본요일들을 폭살, 중상시키고 지사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가나자와형무소에서 12월 19일 순국하였다. 


이봉창(1901 - 1932 ) 의사는 서울 출신으로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선생과 함께 일본 국왕 폭살 계획을 세워

1932년 1월 8일 동경 사쿠라다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던져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으나 일본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백정기(1896 - 1934)의사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3.1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운동과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하였고 일본 시설물 파괴공장과 요인사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공사 아링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6월 5일 지병으로 순국하였다.

 

안중근(1879~1910)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사형을 언도받아 1910년 여순 감옥(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도마 안중근 의사 명언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

사람이 먼 곳을 향하는 생각이 없다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그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유태로울지라도 그 기운은 구름과 같다.

세월은 덧없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 안중근 의사 명언 -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선생 (1876 - 1949)의 묘역(墓域)으로

선생은 1876년 호아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조선왕조 부패에 항거 동학(東學)에 참가했고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의살하고 인천 감옥에 투옥되엇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약(勒約/억지로 맺은 조약)되자 그 철폐를 위해 투쟁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국권수회에 앞장섰으며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교육.강연 등의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으 안악사건(安岳事件)을 꾸며 다시 투옥,

서대문감옥과 인천감옥에서 옥고를 치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 국무령등

주요 요직을 거쳐 주석에 이르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통해

임정의 우상을크게 높였으니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기면서 27년간 족국광복을 위한

중추적인 역활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김구선생의 힘입은 바 커다.

한편 한국독립당 한국구민당을 조직하고 좌우합작운동에 노력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하여 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美.蘇 등 강대국의 한국 분할정책에 맞섰다.


남,북 단독정부의 수립위한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자 이를 막아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남북협상에 앞장섰다. 남북에서 분단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민족통일,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京橋莊에서 흉한(兇漢)에 의해 쓰러지니 7월 5일 온 민족의 존경과 애도를 담아

국민장으로 이곳에 봉안하였다.


김구선생 어록중에서

어릴 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없고,
나이 들면 나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으며,
늙고 나면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한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진 내 마음이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를 수 없다.

사실 나를 넘어서야 이곳을 떠나고,
나를 이겨내야 그곳에 이른다.

갈 만큼 갔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참을 수 있는지 누구도 모른다.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된다.

상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결정한다.
또 상처를 키울 것인지 말 것인지도 내가 결정한다.
그 사람 행동은 어쩔 수 없지만 반응은 언제나 내 몫이다.

산고를 겪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꽃샘추위를 겪어야 봄이 오며,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온다.

거칠게 말할수록 거칠어지고,
음란하게 말할수록 음란해지며,
사납게 말할수록 사나워진다.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를 다스려야 뜻을 이룬다.

모든 것은 내 자신에 달려 있다


- 백범 김구 -


- 김구의 [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포토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팔 인도여행  (0) 2019.06.19
해변의 봄놀이  (0) 2018.05.13
삼락공원 연꽃  (0) 2017.07.15
태종사 수국축제  (0) 2017.07.08
울산 대공원 장미축제  (0) 2017.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