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국가정원과. 순천만습지. 선암사. 송광사. 드라마세트장. 세계조각공원. 돌탑공원.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
매곡동 탑매마을.순천왜성.죽도봉공원.와온해변. 주암호. 낙안읍성 등 순천에는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곳 낙안읍성 부근에는 뿌리깊은나무박물관과 돌탑공원이 있어 같이 돌아보면 좋다
이곳 낙안에서도 독림운동의 불꽃은 활활 타올랐던 것 같다
그때의 그 함성이 들리는 듯
이렇게 독림선언에 가담한 최린 같은 사람도 다음에는 친일로 돌아서 우리 국민을 괴롭힌 자가
있었으니 시대에 흐름을 잘 타는 사람은 호의호식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낙안읍성 안내도
낙안읍성의 출입구는 동서남에 있는 성문으로 동문(낙풍루), 서문(낙추문), 남문(쌍청루 또는 진남루)이다.
낙안은 농사 고장으로 문루마다 사계절과 농사에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문은 봄을 상징하고
풍년을 기원하는(봄에 씨앗을 뿌리며 풍년을 염원함)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문의 옹성들을 복원하기 위해 1986년 발굴 조사한 결과 건물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판명되었고
옹성은 ㄱ자형이며 2층 누각식이다. 1987년 복원되었으며 현판은 일중 김충현의 글이다.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과는
구별된다. 읍성의 원류는 중국이며 청동기 시대부터 축조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낙랑의 치소 1) 였던 토성이 있고, 대방군의 치소로 알려지는 토성도 사리원 동쪽에 남아 있다.
이 시기에는 현에도 작은 읍성이 있었는데, 주로 넓은 구릉이나 평야 지대에 토루로 쌓았다.
읍성은 부, 목, 군, 현 등 행정 구역의 등급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크기는 주민의 수와 관계있었다.
조선 시대 내륙 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읍성이 있었고, 해안 근처에는 거의 모든 고을에 읍성이 있었다.
크기는 큰 읍성은 900미터 이상이었고, 중간 규모는 약 450~900미터였으며, 작은 것은 300미터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남부 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
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전국 곳곳에 설치되었다
이들 읍성은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읍성 중 대표적인 것은 정조 때 세운 수원읍성이다.
또한 낙안읍성, 비인읍성, 해미읍성, 남포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거제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등이 있는데 낙안읍성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다.
1983년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행정 구역상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85여
가구의 약 300여 명이 100여 채의 초가집에 거주하고 있다.
관광용으로 세트화한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남도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것이다.
순천 조계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낙안읍성은 마한 시대부터 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백제 시대에는 분차, 분사, 부사라고도 불리는 파지성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으로, 고려 시대에는
양악,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낙안읍성이 현재와 같은 역사 마을로 등장하는 계기는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다.
태조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반길 장군이 흙으로 축조한 것을 인조 때 돌로 다시 쌓아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세종 때 석성으로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은 동북쪽으로 지리산, 서쪽으로 무등산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남해 여자만(汝自灣)의 해풍을
받는 낙안 들판이 펼쳐지는 해발 50미터의 분지형이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지형이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 한다. 멀리 부용산을 넘어 말봉이 있고,
금전산을 넘어 동북쪽에 옥녀봉(520미터)이 있는데, 산자락이 금전산까지 이어져 옥녀가 머리를 감아
빗고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드리기 위해 거울 앞에 단정히 앉아 화장하는 모습 같다는 것이다.
이곳의 특징 중 하나는 깊은 우물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전통 마을 중 여러 곳이 풍수지리에서 행주형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 파는 것을 금했는데,
낙안읍성도 그런 예다. 배는 물에 떠다니므로 언제나 가라앉을 위험이 있어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한 것이다.
과학문화답사기에서 발췌
왕원추리
낙안읍성 안에 있는 충민공 임경업 장군 선정비각(전남 문화재 자료 제47호)도 눈여겨볼 유적이다.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1626년부터 2년간 봉직하면서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1628년
군민이 세운 비각이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군민이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현재는 낙안읍성민속마을
보존회에서 주관한다.
식당가
저잣거리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총독부령 제1호를 통해 조선 역사의 상징인 관아와 성곽들을 헐어버리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했다. 낙안객사는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헐리는 것은 면했다. 그러므로 1986년 학교를 이전하고 내부를 보수해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동헌은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해당한다.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객사보다 다소 작다.
동헌 서쪽에 내아로 가는 협문이 있으며 삼문과 양편에 각 창고가 하나씩 설치되었다가 1990년 복원되었다.
장승을 마을 입구에 세우는 이유는 장승이 마을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승이 서 있는 곳은 장승배기라고 부르며 배기란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다.
대부분 길 양편에 세웠는데 오른쪽은 남장승으로 천하 대장군이라 하고 왼쪽은 여장승으로
지하 여장군이라고 한다. 대개 서낭당이나 선돌, 솟대 등과 함께 세웠으며 돌무더기 위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낙안읍성의 각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는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정월이면
훼손된 장승을 새로 세우고 장승제를 지낸다. 예전엔 길 양편에 수많은 장승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어
이곳을 장승거리 또는 벅수거리라고 불렀다.
한국의 전통 마을이나 유적지 등을 방문할 때 외국인들이 가장 흥미 있어하는 것은 장승이다.
장승은 'Devil Post' 또는 '천하대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인들에게 소개되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대부분 장승을 보았기 때문에 장승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장승을 직접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촛불맨드라미
T자형 간선로를 제외한 길은 자유 곡선형의 좁은 골목길이다. 주택들은 대부분 좁은 골목길에서 연결된다.
담은 높이가 대체로 눈높이 정도이지만 남북로에 면한 집들의 담은 처마 아래까지 빈틈없어 길에서 집 안이
조금도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고리형 길과 막다른 골목들은 그물처럼 연결된 미로 같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전통 마을의 경우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뚜렷한 위계질서를 이룬 데 반해 낙안은 양반들
보다는 관에 출입하는 아전들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살았다. 양반들이 낙안읍성 안에서 살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관과 관속이 있는 고을에서 벗어나 향촌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지방관들은 한 지역에서 2년 정도 근무했으므로 양반들은 굳이 그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낙안읍성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민초들이고 이는 거의 모든 주택이 초가집인 데서도 알 수 있다.
집은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一자형 가옥으로 방과 마루,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부엌, 큰방, 작은방 등 3칸이 나란히 배열된 초가삼간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다른 지역에 있는 3칸 집은 부엌에서 방 3개를 동시에 난방하도록 구들을 놓으나
낙안읍성의 몇몇 집에서는 작은방 앞에 아궁이를 따로 두고 큰방과 별도로 난방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여름철에 부엌에서 밥을 하더라도 작은방은 난방되지 않아 모든 방이 한증막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낙안읍성에서 초가삼간 다음으로 많은 주택이 4칸 집이다.
3칸에 대청을 하나 추가한 것으로 큰방과 작은방 사이에 들어간다. 4칸 집에서 작은방, 즉 건넌방은
사랑방과 같은 위상을 갖는다.
따라서 방의 마구리 쪽으로 문을 내 옆에서 출입함으로써 다른 부분과 어느 정도 구분한다.
건넌방을 난방하는 아궁이는 방 뒤쪽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대개의 집들이 죽담(흙담)으로 쌓여 있고 높이가 낮으며 방문을 작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제한된 토지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 즉 주거지의 밀도를 높이려는 시도는
집 안에 텃밭이 별로 없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성벽을 민가의 담으로 활용해 공간의 낭비를 없앴으며, 길을 향한 집들은 건물 밖으로 담을 두르지
않고 건물 외벽이 담을 겸하도록 해 외벽과 담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없앴다.
따라서 낙안읍성에서는 돌로 쌓은 담과 흙으로 쌓은 건물 외벽이 맞대어 이어지며 두 종류의 거친
재질감이 어우러진다.
마당도 밀도를 높이기 위해 독특하게 만들었다. 보통 민가에서는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구분되며 안채와
부속채로 둘러싸인 안마당은 생활공간으로, 바깥채 혹은 사랑채 바깥쪽에 조성되는 바깥마당은 작업
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낙안읍성에서는 바깥마당을 따로 두지 않고 넓은 안마당의 경사를 이용해
단의 차이로 구분한다. 이처럼 밀도를 높여 공간을 구성한 이유는 낙안읍성이 다른 전통 마을과는 달리
읍성 도시이기 때문이다.
낙안읍성은 다른 전통 마을보다 정겹게 느껴지는데, 건축 소재를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해 집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목조 가옥에서는 기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목조로 지은 전통 한옥은 물기에 약하므로 기단을 통해 비가 왔을 때 물에 잠기거나 집이 습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햇빛을 많이 받도록 한다.
낙안읍성에 있는 집들의 기단은 잘 가공된 장대석을 높이 쌓는 사대부 기와집과 다르게 둥글넓적한
막돌을 주워 한 줄 내지 많게는 서너 줄 쌓아 올린 것이 전부다. 둥글둥글한 모양이 우리 서민들의
심성을 나타내는 것 같아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지금 모내기를 하고 있는 주위의 논
낙안읍성 안의 건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모두 9 채다. 다소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므로 시간을 할애해 하나하나 방문해 보기 바란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낙안읍성에는 과거로부터 유명한 먹을거리가 내려온다. 팔진미라 하며 낙안 땅에서 나오는 여덟 가지의
재료로 만든 것이다. 남내리의 미나리, 서내리의 녹두묵, 진산인 금전산의 석이버섯, 좌청룡인 오봉산의
도라지, 우백호인 백이산의 고사리, 남동쪽 제석산의 더덕, 성북리의 무, 불재(금전산 동쪽 고개) 아래의
용추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등이다.
읍성을 자주 찾은 이순신 장군과 2년 간 군수로 있었던 임경업 장군도 즐겨 들었다고 하며 상차림은 계절에
따라 재료가 달라진다. 때때로 여덟 재료가 모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추가되는 반찬 개수가 여덟 가지를 넘기 때문이다.
낙안읍성은 외암마을처럼 입장료를 받는다.
연간 12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이므로 입장료 수입이 상당하다.
관람비 중 40퍼센트가 문화재관리비라는 명목으로 마을인들에게 돌아가며 학생들을 위한 교육비를
일부 보조하고 나머지는 환경정리비에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전 마을인이 똘똘 뭉쳐 마을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으며 읍성 안에 있는 식당에도 당직이 있다.
낙안읍성은 24시간 개방하므로 한밤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낙안읍성은 세계 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고 CNN 선정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16위로 선정된 바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임경업 비각에서 제를 올리고 널뛰기, 그네 타기, 성곽 돌기 등 민속 행사를 연다.
5월에는 낙안민속문화축제, 10월에는 남도음식축제가 열린다.
감독들이 이런 마을을 그냥 둘 리 없다. 드라마 〈대장금〉, 〈허준〉을 비롯해 영화 〈아름다운 시절〉, 〈춘향전〉,
〈태백산맥〉, 〈취화선〉 등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과학문화답사기에서
해바라기 - 내 마음의 보석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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