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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향원정과건청궁

향원정

고종이 건청궁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중앙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했다

 

향원지

향원지(香遠池)는 4,605m2(약,1395평)의 방형 연못인데, 모서리를 둥글게 구성했다.

내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향원지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향원지 남측에 대한민국 최초의 전기발전소인 전기등소를 설치할 때 향원지에서 물을 끌어올려 전기를

생산하여 ‘물불’이라 부르기도 했다.1

887년 3월 6일, 처음으로 전등을 사용해 경복궁을 밝히게 되는데 약 450개의 전구를 사용해 경복궁내

향원정을 중심으로 밝게 밝혔다. 그러나 발전기 냉각수로 사용되던 향원정의 물이 가열되어 연못 내의

물고기들이 다 익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사람들은 도깨비의 저주라고 생각해 한동안 전등운영이

중지되기도 하였다.

취향교

취향교(醉香橋)는 향원정에 걸어서 가기 위해 설치한 다리다.

처음 설치 당시에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바로 갈 수 있도록 향원동 북쪽에 4열의 돌 적심으로

설치되어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를 허물고 일본풍으로 나무 적심 위에 간이다리를 새로 놓는다.

이 다리는 이후 6.25 전쟁때 파괴되었다가 1953년에 관람 편의를 위하여 본래의 자리가 아닌 향원정

남쪽에 다시 세워졌었다.그러나 원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2021년 현재의 아치형 목교로

복원하였다.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m,폭 165cm)이다. 다리 동쪽으로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인유문(麟遊門)이란 일각문(一角門)이 열렸었고 또 그 남쪽에

봉집문(鳳集門)이 있어 연못은 한층 아늑한 정취(情趣)에 싸여 있었다.

열상진원

향원정 서북쪽에 있는 북악산의 지하수가 이 곳에서 솟아나 향원지 물을 채운다. 

주변을 덮는 돌과 뚜껑은 화강석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으나 뚜껑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만들었다.

이름은 '한강(洌上)의 진짜(眞) 근원(源)'이란 뜻이다. 열수는 한강의 다른 말이고 '열상'은 '열수 가

즉 '서울'을 의미하는데, 편의상 열상을 열수와 같은 뜻으로 쓴 듯하다.

비록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가 한강의 진짜 발원지이지만, 왕궁에서 발원한 물이 한강으로 흐르기에

상징적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샘은 총 3층 계단식이다. 솟아난 물이 2번 직각으로 꺾여 향원지로 들어가게 했고, 특히 연못과 만나는

부분은, 동그란 홈에 물이 고이게 하여 향원지 물 높이보다 아래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한 번에 물이 내려올 때 생길 수 있는 연못의 파동을 최대한 줄여 향원지의 물을 잔잔하게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만든 데에는 물고기가 놀라지 않게 하려고 그랬다는 설과

연못에 비친 향원정과 여러 나무의 그림자들을 흔들 림없이 보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건청궁

건청궁은 경복궁 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궁궐로 1,873년(고종 10)에 지어졌다.

이곳은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시해된 곳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일본 세력을

배척하자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이 되어 고종 32년 (1895)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많은 상궁과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 한다.

또한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사용하여 어두운 밤을 밝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이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 임금에게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밝게 해주는

전구를 알려주고, 고종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전기공사를 맡겨 건청궁 앞에 있는 연못(향원지)의

물을 끌어들여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를 지었다. 경복궁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기

사용의 최초이며 일본과 중국보다도 2년 정도 빠른 것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한국의 전기발상지

’ 글로 새긴 돌이 건청궁에 있다.

역사는 장안당과 같다.북동쪽에 침방인 정시합(正始閤)이 서쪽의 장안당과 연결되는 복도가 붙어있고

동쪽의 누마루는 동쪽에 사시항루(四時香樓), 남쪽에 옥호루(玉壺樓) 현판이 붙어있다. 명성황후 민씨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뒷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옥호루는 일본 폭력배가 처들어와 명성황후를 시해한 곳이다

녹금당

곤녕합 북쪽의 궁인들의 처소이다. 동쪽의 복수당과 붙어있다.

정시합은 곤녕합동쪽에 붙어있는 침방이다

정시(正始)’는 ‘처음을 바르게 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처음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인륜의 시작을 부부 관계로 파악하고 그 관계를 바로 잡음을 가리킨다

모과가 많이도 열렸다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고종은 이곳을 처소로 주로 사용했으며 양반가 저택의 형식으로 세운 건물이어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장안당 내부

이곳은 아시아 최초로 에디슨식 전기 가로등이 켜진 곳이다.1882년에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보냈는데 이때 미국을 다녀온 보빙사가 미국은 밤이 대낮 같다고 고했다.

이는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미국 대도시 전구로 된 가로등이 설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빨리 미국에 연락해 전기 가로등을 설치하라고 명했고, 이에 1887년 3월 6일에 아시아 최초로

 에디슨전기회사 직원들이 조선에 와서 발전기로 전력을 얻는 전기 가로등을 건청궁에 설치해 밤을 환하게 했다.

총 설치 비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4,525달러 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재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집옥재 

가로등의 발전기는 향원정의 연못 물을 끌어와 증기로 발전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발전기에서

배출된 고온의 발전용수가 향원정 연못에 배출되자 그곳에 살던 비단잉어 등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사람들이 증어망국()이라며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가로등의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통에 '건달불'이라는 오명도 생겼다고 한다.

고종황제 근영

집옥재에는 도서관 같은 기능이 있다 

고종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며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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