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혼자서 돌아다니는 날이다
오전에는 경의선 숲길을 돌아보고 효창공원을 돌아본 후 오후에는 고교 때 같이 자취를 하던 삼총사가
종로에서 만나 술 한 잔 하며 주저리주저리 옛이야기에 푹 빠저 볼 참이다(11/3)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무작정 숲길을 걷는데 어느쪽으로 가야 되는지 잘 모르겠다
가다 보면 맞닥트리는 곳이 있겠지 하고 걸어보기로 한다
산부추꽃도 보이고
청화쑥부쟁이도 만난다
화살나무는 붉다못해 검붉은 색으로 변하고 있다
이철길이 옛 경의선 철길 일제가 놓았던 그 철길이다
군산 경암철길 처럼 여기저기 영업적인 시설들이 많이 보인다
느티나무는 붉게 물들어가고
옛 건널목은 조형물로 추억을 보여주고
철자화 꽃도 보이고
선로를 걷어낸 곳에는 메타스퀘이야가 자리하고 있으며 더 걸으니 막다른 곳 서강 하늘다리가 나온다
서강하늘다리에서 되돌아 다시 걷기 시작을 한다
우리가 기차 통학을 할 때 많이 보았던 선로변환기다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자동으로 변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기차가 다른 선로를 택할 때 이변환기로 자동차 헨들을 돌려
가는 것 처럼 기찻길을 변환을 시켰다
그림자무대
마포구의 마스코트인 듯
백합나무(튤립나무)
꽃사과
숙근버베나 (버들마편초)
꼬리풀
꼬리박각시
가우라(바늘꽃)
은행나무는 아직 푸르르고
꽃댕강
숲길우체통
아스타국화
갯쑥부쟁이
경의선 철길도 일제의 수탈과 한반도 지배와 대륙침략을 위해서 놓았는데 일부 일제 잔재들과
부역을 하며 호의호식을 하고 지금도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일제 강점기가 살기
좋았다고 하는 허무맹랑한 후손들이 있어 우리의 독립운동을 말없이 수행 한 한 분을 소개하려 한다
그분이 파락호라는 김용환선생이다
깨뜨릴 파(破),
떨어질 락(落),
집 호(戶).
파락호는 다른 말로 '팔난봉'이라고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안동에서 노름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용환은
조선 천지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파락호였다.
노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도박하느라,
마누라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땅 7백 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에게 이젠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하고선
다음날 집에 있는 땅문서를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간 인물이었다.
그는
경북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가 의성 김 씨 종가의 장손이자,
학자였던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며 의병을 지원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다.
이런 명예가
김용환으로 인해 한순간에 추락했다.
집안 재산도 모두 날아갔고,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 18만 평도
노름빚으로 몽땅 팔렸다.
현시가로 약 200억 원에 달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친정에 가서 장롱을 사 오라고
시댁에서 자신의 외동딸에게 준 돈마저도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그 딸은 하는 수 없이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헌 장롱이 귀신 들린 장롱이라면서
강변 모래밭으로 가져가 부수고 불에 태웠다.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처럼 된다'
당시 유행어가 됐다
윤학준의 <양반 동네 소동기>에 의하면,
우리나라 근대 3대 파락호가 언급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김용환이 바로 그들이다.
김용환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흐른 뒤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노름빚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집안 재산이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흘러들어 간 사실과 함께
노름꾼 김용환이 독립투사였음이 밝혀졌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남몰래 독립운동을 돕게 된 배경엔
할아버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아버지 서산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가
왜경에게 들켜 종가 마당에서 꿇는
치욕적인 장면을 본
그는 항일운동에 몸 바치겠다고 결심,
식구들이 고초를 겪지 않도록 은밀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일제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했던 김용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평생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친구가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했지만
선비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며 눈을 감았다.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딸 김후웅은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 되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편지를 남겼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외동딸 김후옹의 글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청송 마평 서 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 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현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지나간 이야기지만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기에 옮기는데
요즘도 저런 분이 있을까?
추명국(대상화)
김용환 지사는 겉으로는 노름꾼, 파락호 노릇을 하면서 뒤로는 독립자금을 대던 분이다
당시 문중 종택을 팔아서 독립자금을 대던 임청각 이상룡 지사와는 사돈으로 맺어진 사이다.
두 사돈이 똑같이 문중 종택을 팔아서 독립자금을 대고는 했던 것이다.
문중은 종택이 팔리면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겼기에 돈을 각출해서 팔린 종택을 다시 사들이게 되는데
김용환 지사는 그렇게 해서 세 번이나 종택을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노름꾼이 노름하다가 종택을 팔아먹었다고 문중이나 주위에서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았을까?
돌아가실 때까지도 자신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알리지 않다가 돌아가신 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Am I That Easy to Forget / Jim Re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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