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강북삼성병원 안에 있는 경교장 홍난파 가옥과 딜쿠샤를 방문한 적이 있었고
사직단과 황학정활터를 지나 인왕산을 오른 적도 있는데 경희궁을 모르고 지나쳤다
4 궁궐은 답사를 몇 번씩 했는데 경희궁은 처음이다 이로써 5대 궁궐을 비로소 다 돌아본다
경희궁(위 사진은 캡처한 사진)
1616년부터 인왕산을 주산으로 인경궁(仁慶宮)을 짓기 시작한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술사의 얘기를 듣고, 그 터를 몰수하여 경희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으며,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1868년) 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친 임금들이 사용)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 전, 회상 전 등 100여 동의 전각이 있었으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일제 강점기, 1910년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일부 남아 있던 전각들 마저
매각 또는 이건 되었고, 그 면적도 축소되어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만다.
광복 이후, 경성중학교 자리를 서울중고등학교가 이어받았으며, 1980년 서울고등학교 강남 이전으로
서울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
일본 조계사에 팔려나간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 법당(正覺院)으로 사용 중.
(이건을 검토하였으나, 지나치게 노후화되어 이건이 어렵다는 결론으로 숭정전은 새로 복원 건립)
[흥화문]은 박문사의 정문이 되었다가, 다시 영빈관 정문이 되었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되돌아 옴.
1898년 고종 때, 궁술 연습장으로 경희궁 내 설치했던 황학정(黃鶴亭)은 1922년 일제가 인왕산 아래로
옮겼으며, 현재도 국궁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지안내문
경희궁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으로 약 7만여 평에 서궐(西闕)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곳에는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명의 왕이 머물렀는데 그중 영조가 가장 오래 19년 동안 머물렀고,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서울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금천교 (이 다리는 복원한 것임)
경희궁의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터인 구세군 회관 건물과 중문 건명문 터인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 사이에 있다.
금천교 밑을 흐르는 경희궁의 금천은 경희궁 안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이다.
그래서 하천 이름이 따로 없고 통칭 ‘경희궁내수(慶熙宮內水)’로 부른다.
이는 외부 하천을 끌어다 금천으로 이용하는 다른 궁궐과 다른 점이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다 경희궁을 빠져나오고 새문안로를 가로지르자마자 동쪽 정방향으로
틀어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앞에서 청계천과 합류했다
현지안내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건립되었다.
1932년 일제가 장충단에 세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이건 하였으며 '경춘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었다.
광복 이후, 그 자리에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사용(현판 영빈관)하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200여 미터 서쪽인 현재의 자리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숭정문 뒤로는 인왕산이 보인다
왼쪽 인왕산 오르는 길에는 활터 황학정이 있다
숭정문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신접대 등 국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5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정전이다.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 사이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이후 약 240여 년 간 조선 후기 동안 사실상 정궁[2]인 창덕궁의 인정전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는 공간으로 쓰였다. 경종, 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인 회상 전(會祥殿), 융복 전(隆福殿)
등은 불탔으나 숭정전은 피해를 면했다.
왕이 앉는 자리 뒤쪽에 일월 오봉 병풍이 있다
만 원짜리 지패 세종대왕 옆에 보면 일월오봉병풍이 보인다
일월오봉병풍이 없으면 왕이 앉는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숭정전 천정의 용
여기는 왕이 지나가는 답도인데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즉 왕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4궁(경복궁. 청덕궁. 창경궁. 경희궁)에는 담도에 왕을 상징하는 봉황도가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경운궁(덕수궁) 봉황이 아닌 용이 그려진 조각상으로 되어 있다
즉 경운궁(덕수궁)은 고종 임금이 189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며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닌
당당한 황제국으로 세계만방에 선언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왕의 상징 봉황이 아닌 황제의
상징 용으로 조각을 하였다 그래서 경운궁(덕수궁)에는 담도에 용 조각상인 것이다
경운궁(덕수궁)답도에 황제의 상징인 용 조각상이다
자정전
경희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이다.
경희궁 정전 숭정전의 바로 북쪽 뒤편에 있다.
'자정(資政)' 뜻은 '정사(政)를 돕는다(資)'이다.
현재 현판은 서예가 송천 정하건 선생(松泉 鄭夏建. 1939 ~ )이 썼다
자정전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편전으로 처음 사용한 시기는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이괄의 난으로 중건한 지 얼마나 됐다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불타자 인조가 경희궁을 사용하면서 그때 비로소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빈 전으로 주로 사용했고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숙종, 영조 연간까지 활발히 사용되었으나 정조 이후부터는 사용이 뜸해졌으며 순조가 간간히 이용할
뿐이었다. 빈전빈전으로서의 사용이 빈번하고 접근성의 문제도 있어서, 조선 후기에는 내전과 가까운 흥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1865년 고종 때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 공사의 자재로 썼다.
이때 자정전도 철거했다. 흔히 일제가 없앴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태령전
경희궁에 있는 어진 봉안소 즉 진전(眞殿)이다. 자정 전의 서쪽에 있다.
정조는 《경희궁지》에서 태령전을 “자정전 서쪽에 있으며 임금님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다.
태령(泰寧)' 뜻은 '넉넉하고(泰) 편안하다(寧)'이다.
현재의 현판은 2001년 복원할 때 석봉 한호의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태령전과 그 일대를 영조의 장례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혼전을 이곳에 두었고 태령전 근처에 재실 도수연을 세웠다.
또한 정조 자신이 머물 여막을 태령전 남쪽 행각에 두었고 인산 날 여기서 망곡례를 행했다.
영조 어진
서암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데 이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현재 서암을 새겨 두었던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숙종의 서암
좌. 우회랑
문화해설사가 진지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저녁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설명을 다 했다고 한다 휴 ~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인사하고 약속 때문에 먼저 간다고 하고 뛰다시피 전철역으로 간다
Norman Candler - Plasir d'amour(사랑의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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