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한 번 들렸던 운현궁이다
창경궁을 둘러보고 인사동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옆지기가 가보지 않았다
해서 이곳 운현궁으로 왔다(12/28)
운현궁
운현궁(雲峴宮)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지명인 구름재에서 이름을 따와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은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고, 소규모의 궁궐과 같이 사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작은 궁궐, 운현궁
고종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어머니 여흥 민 씨를 ‘부대부인’으로
봉작(封爵)했다. 그리고 대원군 궁의 면세 전결 1,000 결에 대한 토지 값으로 은 2,000냥을
실어 보내고, 궁장(宮庄, 궁에 소속된 논밭)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국가에서 콩 100석과
선혜청에서 쌀 100석을 5년 동안만 실어 보내라고 했다. 이듬해에는 호조에서 집을
수축하는 비용으로 17,830냥을 보내 운현궁을 새로 건축하고 수리하게 한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터를 다시 넓히고 새로 단장하여 주의의 담장이 수리(數里)나 되었고, 네 개의
대문도 설치하여 대내(大內)처럼 엄숙하게 했다.”라고 하니 그 규모와 화려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운현궁의 규모가 커진 이유는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겨주자,
대원군의 세력이 커졌고 그에 따라 운현궁에 드나드는 사람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수직사
정문 우측에 위치한 수직 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
가야사를 불사르고 이장한 남연군묘(2021년 여름에 찍은 사진)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시서화(詩書畵)에 조예가 깊었던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의 아들이다. 1815년(순조 15년) 은신군에 양자로 입적되어 남연군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시서화에 능했던 것도 인평대군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리라. 은신군은 이미 숙종과
명빈 박 씨 소생인 연령군에 입적되었기에 남연군은 연령군가(家)인 안국동별궁에 살게 된다.
남연군은 창응, 정응, 최응, 하응 네 아들을 두었다. 1836년(헌종 2년) 흥선군이 17세일 때 남연군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장자 창응은 사망한 뒤였다.
나머지 형제들은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부친을 장사 지냈다.
보덕사
이때 흥선군의 형제들은 왕실의 친척으로 한직(閑職)에 있었으며, 흥선군은 안동 김 씨의 세력에
몸을 사리고파락호 생활을 했다. 1846년 남연군묘를 이장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 《매천야록》에 따르면흥선군이 지관을 따라 덕산 대덕사(가야사)에 가서 고탑
(古塔)이 앉은자리를 보고는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여돈을 마련하는데, 그 돈의 절반을
승려에게 주고 절을 불사르게 해 이 터를 얻었다고 한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웠던 죄책감에 가야사의 동쪽 산에 새 절을 창건하고
‘부처님 은덕에 보답하고 속죄한다’는 뜻으로 보덕사(報德寺)를 지었다.
노안당에서 아이돌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이가 무척 추워 보였다
노안당 뒤쪽
노안당
노안당이라는 당호에서는 아들을 왕으로 등극시킨 늙은 아비의 흡족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노인을 편안하게 하는 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당호는 『논어(論語)』의 「공치장편(公治長篇)」에
나오는 '老者 安之(노자 안지)'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 달리 이곳에서 그의 삶이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이 건물에서 그는 안동 김 씨 등 당대의 세도가를 몰아내고 공평한 인재 등용과
서원 철폐로 이어지는 각종 법률 정비와 개혁 정책을 구상해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를
견제하는 주변 열강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에 의해 적지 않은 세월을 이곳에서 유폐된
채 살아야 했다. 만년에 눈을 감은 곳도 노안당 큰방 뒤쪽에 딸린 작은방이라고 하니, 그의 30년
정치 인생이 노안당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노안당 내부
무량수각은 아미타불을 주불로모신 전각인데 여기에 현판이 왜 있을까
의아했는데 대원군이 추사의 글씨를 좋아해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을
모사한 것이라고 하며 대흥사 무량수각은 김정희 글씨라 함
노락당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 나타난다. 평생 고생만 시킨 부인에
대한 대원군의 미안함과애틋함이 느껴지는 당호다.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뽀얀 기단석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인간적인 애틋함 때문이 아닐까?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다.
장차 명성황후가 되는 민 씨가 고종과 혼례를 올린 곳도 이곳이다.
왕의 혼례를 이곳에서 치렀다는 사실만으로도 흥선대원군의 기세가 당시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운현궁의 낙성식(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에 참석한 고종은 대제학 김병학에게 이날을 기념하여 글을 쓰게 했는데,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1자 5치(약 50cm)밖에 안 된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대원군은 감지했을까?
일반 사대부가의 건축물에는 사당, 사랑채, 안채, 별채가 있는데 운현궁에는 건물이 한 채 더 있다.
안채 이로당(二老堂)과 사랑채 노안당 사이에 있는 노락당(老樂堂)이다.
1864년에 지은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 건물로 원래 안채였는데,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의 가례를
치른 뒤 고종이 방문할 때 사용하는 거처가 되었다. 그리고 1869년에 따로 이로당을 지어 안채로 사용했다
노락당 내부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이다.
1866년(고종 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嘉禮)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경송비
고종이 어렸을 때 놀던 곳에 소나무가 있었는데 후손들이 잘 관리하여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후손들이 궁핍하여 서울시에 운현궁을 넘길 때 경송비를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함
운현궁의 역사는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신분이 '새 임금의 친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바뀌던 1863년 12월에 시작된다. 몰락한 왕족 이하응의 집은 이즈음 운현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운현'은 당시 그곳에 있던 언덕 이름이다.
하지만 오늘의 영광이 내일의 영광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절정기의 운현궁은 지금의 교동초등학교와
삼환기업, 그리고 일본대사관까지를 포함하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점차
지금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고종 즉위 원년(1864년)에 지어진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뒤 지어진
이로당 정도다.
노락당 뒤쪽
운현궁의 이로당과 노락당을 잇는 복도는 방문객들에게 가장인상적인 장소다
통로 위의 솟을지붕이 이채롭다
이로당
운현궁에서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하는 건물은 이로당(二老堂)이다. 부대부인(대원군 부인) 민 씨는 이로당이
지어진 후 내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안채 구실을 하던 건물로, 노락당과는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것도 여느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운현궁만의 특징이다. 건물 중앙에 ㅁ자형 마당을
두고 그 한가운데 굴뚝을 세워 중심성을 강조했다. 우리에게 굴뚝이 여근을 의미한다고 보면, 안채의 중심에
굴뚝을 세워 집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후손이 귀하던 당시 왕가의 처지를 애석히 여긴 때문이 아닐까? 지붕의
합각에 그려진 박쥐가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한다. 박쥐는 다산(多産) 다복(多福)을 뜻하는 동물이다.
운하연지
흥선 대원군이 난을 키울 때나 글씨를 쓰기 위해서 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통이었다고 함 운하연지(구름아래 벼루연못)
또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물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라고도 함
유물전시관
흥선대원군
종합연대표
운현궁 전체배치도
운현궁의 생활유물
운현동에 소속된 토지문서
대원군의 낙관
부대부인의 녹색원삼. 흥선대원군의 적색조복
명성황후의 홍색 적의. 고종의 현생 면복
개항과 외세의 침략
열강들의 각국공사들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쇄국양이
조선후기 사회변동
신미양요
1871년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했다.
1871년 4월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한 미국 함대는 조선에 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교섭에 응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 달리, 대원군의 결사항전을 본 미국은 결국 함대를 이끌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선의 쇄국정책과 배외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병인양요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이다. 1866년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어 한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1차 원정에서 군사정보를 수집한 프랑스 군대는 2차 원정에서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강화부를 점령했다.
이에 조선군은 기병작전으로 강화도를 수복할 계획을 세우고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파한 전투이다.
척화비
조선 시대 외국을 경계하여 세운 석비. '대원군 척화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외국과의 교섭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화강암으로 된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공사의 요구에 의하여 일부 철거되었다.
서울특별시 경복궁, 부산광역시 부산박물관, 경상남도 함양군, 충청남도 홍성군 등에 남아 있다.
원납전 당백전
대원군의 복식개혁
경근문과 공근문
민비와 궁녀
숙종부터 고종 순종에이르는 왕계보
고종즉위 이전과 아후의 운현궁 모습
사랑의 기도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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