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아스완에서 크루즈로 콤옴보로 이동

아부심벨에서 대신 전과 소신 전을 보고 돌아오면서 차창으로 바라본 사막의 풍경

강물을 끌어들여 곳곳에서 농사를 짓고 이는 모습이다

지평선만 보이는 사막지대 

한참을 달리다 보면 마을이 하나씩 보인다 

옛 아스완댐 (로우댐)지금도 수력발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아스완에서 콤옴보로가는 크루즈 여행 2시간 반정도 걸린다고 한다

아부심벨에서 돌아와 크루즈에 탑승 후 콤옴보로 이동을 한다

선상 수영장 

이 곳에는 20세기 초반 나일 강 본류에 영국이 지어놓은 '아스완 댐'이 있었다.

이후 1950년대 들어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공화국 대통령이 나일 강 수자원 개발을 위해 이보다 약간

상류에 훨씬 큰 '아스완 하이 댐' 건설에 착수한다.

즉 아스완 하이 댐의 '하이(high)'는 지명이 아니라 더 높다는 뜻이다.

한국어로 치면 "대 아스완 댐" 정도의 의미. 현재는 아스완 댐이라고 하면 이 하이 댐을 의미하고, 구 댐은

'아스완 로우(low) 댐'이라고 부른다.

구글 어스로 본 아스완 댐. 링크 누르면 바로 나오는 댐과 인공 호수가 아스완 로우 댐이고,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보이는 훨씬 커다랗게 지어진 댐이 아스완 하이 댐이다.

이 댐의 건설로 아부심벨 대신 전 등 수많은 유적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유네스코 주도로 세계

각국이 협력하여 이 신전들을 해체 후 고지대로 옮겨 재조립했다.

일부 소규모 신전들은 수몰을 피할 수 없어 미국독일스페인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들의 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개중 제일 유명한 곳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덴두르 신전이다.

이집트 정부 입장에서는 문화재 유적 보존을 도와준 선진국에게 겸사겸사 생색을 낸 셈이 되었는데,

그대로 놔두었다면 예산 부족으로 나일강 아래 수몰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엘리판티네섬(캡처한 사진)

이곳에는 호텔등 관광위락시설이 들어차 있다

쿱베텔 하와, 즉 바람의 돔.

이곳의 귀족 무덤군 중에는 고대 이집트 제6왕조 시기의 재상 하르코프의 무덤이 잘 남아있다.

내부의 벽화까지 볼 수 있다.

아스완

이집트 남부의 지역명이자 동명의 주도. 북위 24도에 위치하며, 전통적으로 이집트 문명의 남쪽 끝이자

이집트와 누비아 (북수단)의 경계였다. 흔히 나일 강 최대의 '아스완 하이 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구는 약 38만 명이다.

이집트 남부의 주요 관광 도시 중 하나로, 더 남쪽에 있는 아부심벨로 향하는 관광객들이 주로 경유한다.

인근 하중도들도 필라에 신전이나 엘리판티네 섬의 누비아 마을 등 볼거리가 많다.

그 외에 시내의 옛 채석장, 묘지 등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와 하르툼 사이 암초가 유독 많고 나일강의 폭이 급격하게 좁아져 급류가 몰아치는 6개 지역

(Catarats of The Nile)중 첫 번째이자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때문에 고대 이집트 초기부터 

국제무역의 중심도시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아스완을 지나는 나일 강의 폭은 약 650m이다.

아스완 ~ 알렉산드리아 간 거리는 약 1200km고, 전통 배로 21일 ~ 28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스웨넷(Swenett)이라 불렀으며 뜻은 무역시장이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시에네 (Συήνη)로, 고전 히브리어로는 세웨네 (סְוֵנֵה)로 불렸다.
콥트어로는 스완 (Ⲥⲟⲩⲁⲛ)으로 불리며, 누비아 인들은 성채나 궁전이란 뜻인 '디브'라 부른다.

현대 아랍어로는 물론 아스완 (أسوان)이다.
문화적으로는 고대 이집트와 누비아의 경계선에 있으며 아스완 밑으로는 문화적, 혈통상으로

이집트와 누비아의 문화가 시대에 따라 혼재되는 양상을 보인다.

스웨넷은 나일 강의 제1 폭포 북쪽의 첫 도시로써 하류까지 전 구간 항해가 가능했기에 상고대부터 '이집트의

첫 도시'로 여겨졌다. 현지의 화강암 암반은 여러 신전, 석상, 피라미드 등 거대한 구조물의 건설에 필수적

이었기에 이집트 고왕국 시절부터 채석장 및 암석을 운반하기 위한 인력이 자주 왕래했다.

당시의 채석 흔적은 지금도 강 양안에 남아있다. 동시에 누비아와의 국경 도시로써 군사적 거점이었기에

모든 시기에 수비대가 배치되었고, 이곳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에 관세를 거두기 위한 세관도 있어 상인들이

경유하는 교역 도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 도시는 시에네로 불렸고, 기원전 240년경 

에라토스테네스가 하짓날 시에네의 우물에 햇빛이 직선으로 들어갈 때에 알렉산드리아의 기둥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점을 응용하여 기록상 최초로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기도 했다.

이슬람 시기 도시는 콥트어 지명 스완의 아랍어 발음인 아스완으로 불리게 되었다. 642년, 652년 이슬람

군대의 동골라 원정 당시 후방 보급 기지였던 아스완은 이후 바크트 평화 조약의 체결 후 다시 이집트와

수단 간의 교역창이 되어 안정을 누리고 번영했다.

 

1837년 메흐메드 알리는 아스완에 이집트의 첫 군사학교를 세웠다. 19세기 후반, 아스완은 이집트의 수단

정복의 거점으로써 중시되었다.

1899년, 영국 당국은 기존의 1차 폭포에 아스완 댐을 건설하여 1902년에 완공했다.

완공식에는 영국의 아서 왕자 등이 참가했고, 이집트 독립 후인 1960년에는 수력발전소로 개조되었다.

1960 ~ 1970년에는 소련의 자금 지원 하에 가물 압델 나세르의 숙원 사업이던 아스완 하이댐 건설이

이루어져 비로소 이집트는 나일 강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더 하류에 있는 기존의 댐은

아스완 로우댐이라 불리게 되었다.

강변에는 물이 풍부해 농사도 짓고 목축을 하며 풍요롭게 생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아부심벨 대신 전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들르고 있다.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이시스의 신전이 있었던 종교적 성지로 유명했던 필라에 섬과 수많은 유명 

오벨리스크들과 피라미드 석재가 이곳에서 채석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채석장이 있다.

필라에 섬에 있었던 이시스 신전은 아스완 하이 댐 건설 당시 분할되어 이가르카 섬으로 옮겨졌으며, 

채석장 북쪽 구역에는 하트셉수트시기에 만들다가 미완성으로 남겨진 오벨리스크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아스완은 헬레니즘 시대에는 천문 관측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곳 아스완에서는 알렉산드리아와는 달리 정오에 그림자가 사라지고 우물 밑바닥까지

햇빛이 비친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를 응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는데, 당시 계산으로 지구 둘레는

약 39,600km가 나왔다. 실제 지구의 적도 둘레가 약 40,000km이고 자전의 영향으로 지구 적도 부분이

남북에 비해 약간 부풀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오늘날처럼 인공위성의 측정 없이 수학적 계산만으로 대단히

정확한 값을 도출한 것이다.

저 크루즈도 우리처럼 콤옴보로 이동을 하고 있다 

아스완에서 콤옴보로 가는 중에 만난 다리 우리나라의 다리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나는 새가 기러기인 줄 알았는데 머리 부분이 하얀 것을 보니 아프리카 특유의 새 같다

 

이렇게 2시간 반정도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 콤옴보에 도착을 하여 코옴보신 전으로 간다

James Last - Who Are We

'해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드푸 신전(호루스신전)  (0) 2025.03.07
콤 옴보 신전  (38) 2025.03.03
네페르타르 소신전  (32) 2025.02.26
아부심벨 람세스2세 대신전  (36) 2025.02.23
아스완에서 새벽 5시에 아브심벨로  (0) 2025.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