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아부심벨 람세스2세 대신전

 

   람세스2세

이집트 역사상 2번째로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국가의 번영을 이룬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백성들에게 평판이 좋은 왕이었다.

히타이트족·리비아족과의 전쟁 이외에도 방대한 건설사업과 이집트 곳곳에 거대한 자신의

조각상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람세스 2세는 아버지 세티 1세의 명으로 불과 10세 때 군대

지휘관이 되어 상당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재위 4년째부터 원정을 시작했는데, 첫 목표는

카데시에 있는 히타이트족 요새였다. 그곳에서 히타이트족과 전투를 벌였으나 카데시를

함락하지 못하고 휴전했다. 재위 10년째에는 히타이트의 수비를 뚫고 카트나와 투니프를 정복했다.

이후 16년 동안 히타이트족과 간간이 충돌하다가 BC 1258년에 상호 평화협정을 맺고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의 맏딸과 결혼했다. 이집트에 크고 작은 신전을 많이 지었는데,

그중 왕의 조상이 4개 새겨진 아부 심벨 절벽의 사원 2개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대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그 후 60년 이상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러니까, 대략 90살에 죽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신도시이자 새로운 수도 피람세스(Per-Ramesesu)

아부심벨대신전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을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이집트 제19왕조의 황금기로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

아부심벨 대신전

아부심벨 대신 전은 아스완에 있는 거대한 암벽 신전으로, 그 압도적인 위용과 인상 깊은 모습으로

람세스 2세를 넘어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람세스 2세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지만, 개중 특히 누비아 지방에 신경을 많이 썼다.

누비아 자체는 오래전에 이집트의 영향권 내에 편입되었으나 아직 완전한 이집트화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람세스 2세는 누비아의 이집트화를 위해 많은 신경을 썼는데,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부심벨 대신전이다.

 

누비아 상부와 하부 사이에 지어진 아부심벨 신전은 건축하는 데 무려 22년이 걸린 대공사였고, 람세스 2세의

재위 24주년에 맞추어 완공되었다.

아부심벨은 크게 람세스 2세를 모시는 대신 전과,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봉헌된 소신 전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아부심벨의 모습은 람세스 2세에게 바쳐진 대신 전의 모습이다.

눈에 띄는 외관과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강렬한 모습 때문에 람세스 2세가 지은 수많은 신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는다.

아부심벨 대신전의 정면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4기의 거대한 거상들이 버티고 있다.

4기의 거상들 모두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아우르는 통치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이중관 프셴트를 착용하고 있다.

보면 4기의 조각상들 중 왼쪽에 있는 조각상 1개의 얼굴과 상체가 떨어져 나갔다.

이는 지진으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발굴 과정에서 얼굴과 왕관 일부를 포함한 조각을

조각상의 발치에서 찾는 데에 성공했다. 약 2400년 동안 모래에 묻혀 있다 1813년에 발견되었다

 

 

네 개의 상들 사이사이에는 훨씬 조그만 크기로 람세스 2세의 가족들의 상이 세워져 있다.

아무리 커봤자 람세스 2세의 무릎 높이밖에 오지 못하는데, 어머니인 투이, 아내인 네페르타리, 장남과

차남인 아메르 세프와 람세스, 장녀를 포함해 총 여섯 명의 딸들이 주인공입니다.

람세스 2세의 거상 뒤의 파사드는 높이 33m, 너비 38m로 상당히 크다.

파사드의 위쪽 모서리에는 22마리의 바분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입구의 문 바로 위에는 큼직한 벽감이 하나 파였고, 벽감 안에는 태양신 의 입상이 들어 있다.

태양신 라의 모습

 

 

왕성한 정복 활동과 토목 공사로 이름을 떨쳤던 람세스 2세는 무려 66년 2개월 동안 이집트 신왕국을

통치했다. 람세스 2세의 재위 말년에 이미 파라오의 나이는 90세를 넘긴 상태였다.

현대 기준으로도 엄청난 고령의 나이였던 람세스 2세는 이쯤 되자 온몸에 고질병들을 달고 살았다.

관절염부터 시작해 동맥경화까지 매우 많은 질병들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심각한 충치까지 걸려 입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재위 말년에 이른 파라오는 후계자인 메르넵타에게 섭정을 맡기고 점차 저물어갔으며, 결국 기원전 1213년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람세스 2세의 시신은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라메세움에서 입을 여는 의식을 치른 뒤 

왕가의 계곡의 KV7 무덤에 안치되었다.

 

이집트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람세스 2세가 사망하면서 신왕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워낙 오랫동안

살면서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기에 후대에 왕위 분쟁이 일어나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는 메르넵타 

사후 세티 2세와 아멘메세스의 내전 1라운드로 현실화되었다.

 

세티 2세는 아멘메세스가 사망한 뒤 상하이집트를 다시 손에 넣었지만 곧 사망했고, 그 뒤를 아멘메세스의

아들로 추정되는 십 타가 이었는데 십 타도 6년 만에 급사해서 섭정으로 있던 세티 2세의 계비였던 투스레트

단독집권했으나, 2년 만에 람세스 2세의 손자나 증손자로 추정되는 세트나크테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내전

2라운드를 벌여 투스레트를 축출하여 19 왕조가 멸망했다.

 

그 뒤를 이은 제20 왕조는 람세스 3세가 마지막 불꽃을 태운 후, 꾸준히 왕권이 쇠락해 가는 동안 반대급부로

테베의 아문 대신관의 권력이 막강해지며 람세스 11세를 마지막으로 신왕국 마지막 왕조인 제20 왕조가 문을

닫고, 람세스 11세 생전부터 하이집트를 장악했던 스멘데스가 후계자가 없는 전대 파라오의 장례를 집전한

자가 다음 파라오가 된다는 고대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파라오를 계승하여 제21왕조를 개창하니 이집트

제3중 간기의 시작이다.

포로들이 밧줄에 묶여 무릎으로 걸으며 끌려가는 모습이다

람세스 2세는 생전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모두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죽은 이후에는 딱히 평화롭지 못했다. 

람세스 2세의 무덤은 정말 엄청난 규모로 지어져 있었고, 당연히 그 규모에 걸맞게 막대한 보물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하지만 무덤이 나일강이 홍수가 날 때마다 물에 잠기는 장소에 지어졌기에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는 상태다.

워낙 오랫동안 물이 빠졌다 다시 차올랐다를 반복하면서 벽화도 내부도 딱히 볼만한 것이 없다.

만일 남아 있었다면 이집트 왕릉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녔을 무덤이 확실했기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수많은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기 위해 달려들었고, 결국 람세스 2세의 무덤은 허무하게도 만들어진 지

몇백 년도 채 되지 못해 털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세미타워

상하 이집트의 상징을 하나로 묶는 의식으로 이집트 통일을 상징

타원형의 왕의 징표도 보인다

이 신전 자체는 태양신인 아몬 레와 레 호라흐테에게 바쳐진 것이며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서 만든 3개의

연속된 홀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 내부는 왕의 여러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여러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년에 어느 특정한 며칠간은 하루의 첫 번째 햇살이 신전 전체를 꿰뚫으며 들어와 가장 안쪽에 있는

성소 제단까지 비치도록 지어졌다. 주신전의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캡처한 사진

1960년대 초 이 근처의 아스완 하이 댐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아부 심벨 유적이 수몰당할 위험에 처하자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가 주관하여 이 유적을 보호할 방법을 찾았다( 예술품 보존과 복원).

1964~66년에 세계 50여 개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기사·과학자 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팀과 노동자들이

절벽 꼭대기를 파서 2개의 신전을 완전히 들어내 강바닥에서 60m 높은 지점에 복구해 놓았다.

 

아부심벨 대신 전 내부로 들어가면 양쪽으로 4개씩 8개의 석상이 있는데 이는 죽음의 신인 오리시스신의

형상을 한 남세스 2세의 형상이라고 하며 양팔을 교차한 자세는 부활과 영혼을 상징한다

천정의 시커먼 그림은 상이집트의 수호신 네파베트가 날개를 펼친 것이라 함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방마다 섬세한 부조의 벽화가 있다 주로 남세스 2세가 신들에게 곡물을 바치는

장면들이 있다

 

거상들 사이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면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묘사한 8기의 석상들이 도열해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방의 길이는 18m, 폭은 16.7m 정도다. 왼편에 있는 석상들은 상이집트의 백색 왕관을

쓰고 있고 오른편에 있는 것들은 이중관을 착용하고 있다. 마치 파라오를 죽음의 신 오시리스처럼 묘사한

것이 대표적인 특징. 사이사이의 벽화에는 카데시 전투를 포함한 전투의 내용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고,

가장 유명한 그림은 전차에 올라 활을 쏘는 람세스 2세를 담은 벽화이다.

 

아부심벨 신전의 내관은 여타 이집트 신전들과 비슷하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방이 좁아지는 형태인데,

맨 안쪽의 성소는 사람 몇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다. 8개의 석상들이 세워진 방을 지나면 더 조그맣고

4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이 방에는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내용의 아름다운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람세스 2세가 네페르타리 왕비와 함께 라의 태양 방주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유명하다.

여기서 마지막 방이자 가장 중요한 방인 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

성소 내부에는 아문 라프타라 호라크티 등이 모셔져 있었다.

대부분 전쟁 관련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바로 람세스 2세 때 벌어졌던 카데시 전투를 묘사한 벽화들이다.

카데시전투는 기원전 1274년경에 히타이트 제국과 벌였던 대전투로 최초의 대규모 전차 전투라고 한다.

히타이트제국과의 전쟁은 긴 소모전 끝에 승패 없이 끝나게 되었다고.. 그런데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이곳 아부심벨 대신 전에 카데시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면들을 그려 넣었다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전투에서 적을 제압하는 모습

람세스 2세가 전장에서 전차를 타고 용맹스럽게 전투를 하는 모습

말도두필 화살도 두 개인 것은 신과 함께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발로는 쓰러진 적을 밟고 손으로는 적을 처단하는 람세스 2세

히타이트 군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무승부였으나 승리한 것처럼 개선하는 모습

하토르신이 네페르타리 (람세스 2세의 부인)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하는 모습

파라오가 하토르여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치는 형상이다

신들이 람세스 2세와 네파르타리를 보호하고 격려하는  듯한 장면

부조마다 신들이 등장한다

람세스 2세가 신들에게 곡물을 바치는 부조 

호루스신에게 곡물을 바차는 람세스2세

호루스신에게 음식과 향신료를 바치는 듯 

벽면에는 수많은 부조들이 있으나 중복되고 비슷한 부조들이 많았다

신에게 보호를 받는 부조 신에게 곡물을 바치는 부조 등이다

왼쪽부터 프타 신, 아문 라 신, 람세스 2세 본인, 라 호르라크티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는 일 년에 두 번, 람세스 2세의 생일(2월 22일)과 대관식날(10월 22일) 태양빛이 안쪽방까지 들어와

신상들을 비춘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이듯 가장 오른쪽의 어둠의 신 프타의 상에는 이날에도 빛이 닿지 않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기술의 정교함과 천문학적 이해가 놀라울 뿐이다

레파타리 왕비가 신성한 배 앞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장면

배를 운반하고 있는 듯한데 아마 내 생각으로는 오페트축제 때 태양선을 메고 가는 

장면으로 보인다 다음에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보면 이해가 될 듯

 

호루스신과 이시스 신에게 무언가를 바치고 있는 람세스상 같이 보인다

드레스를 입은 오른쪽의 여성이 람세스 2세의 아내이던 네페르타리이다.

긴 깃털이 2개 달린 왕관을 쓰고 시스루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네페르타리이다.

나중에 네페르타리 무덤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네페르타리가 히토르신을 위해 2개의 시스트럼으로 연주하는 부조다

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가 함께 하토르에게 공양(꽃) 바치는 모습. 하토르는 이번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태양신을 상징하는 원반 디스크와 하토르의 상징 동물인 소의 뿔을 머리에 왕관으로 쓰고 있다.

신전이 위치한 아부심벨은 수단 공화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마을로 이집트 최남단에 있다.

이곳의 지명 아부심벨은 부르크하르트가 이곳에 왔을 때 안내를 이끌었던 이집트인 소년의 이름

아부심벨에서 따왔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이야 아부심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옛날에는 당연히 그 명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1979년 누비아 유적 아부심벨에서 필레까지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78년에 발행되어 현재에도 통용되는 이집트 1파운드 지폐에 아부심벨 대신전이 인쇄되어 있다. 

 

 

James Last - Who Are We

'해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스완에서 새벽 5시에 아브심벨로  (0) 2025.02.21
나일강 투어 누비안 마을까지  (30) 2025.02.19
미완성 오벨리스크  (30) 2025.02.15
아스완 하이댐  (28) 2025.02.12
아스완 필레신전  (37) 2025.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