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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전주한옥마을

오서산휴양림에서 운장산자연휴양림으로 가면서 2시간 이상 달려 전주 한옥마을에 왔다 (8/22)

전주 한옥마을

지붕자락이 살짝 하늘로 향해 있는 아름다운 지붕선을 만날 수 있다.

전주 풍남동 일대에 700여 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촌이며, 전국 유일의 도심

한옥군이다. 1910년 조성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근대 주거문화 발달과정의 중요한 공간으로, 경기 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20여개의 문화시설이 산재되어 있으며, 한옥, 한식, 한지, 한소리, 한복, 한방 등 韓스타일이 집약된

대한민국 대표 여행지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직접생활도 해보고 맛있기로 유명한 전주비빔밥도 맛보는 두 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한옥마을 대사습청

전주 한옥마을 안에 위치한 전주대사습청은 전주대사습놀이의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시설로 대사습놀이

(판소리, 농악, 기악, 무용, 민요, 가야금, 시조, 궁도, 고법)와 관련한 공연을 전수하고 체험과 전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또, 조선 숙종 때부터 시작된 전주대사습놀이의 역사와 전통을 보전하고 지역의 전통문화를

발전시키는 역할도 맡고 있다. 기존의 전주소리문화관 부지(1315㎡)에 건물 면적 486㎡ 규모의 지상 1층 건물로

건립되었으며 공연과 세미나가 열리는 대청마루, 국창 오정숙 기념관, 전주대사습놀이의 전통과 유례, 역사를

소개한 전시관, 연습실, 연못정자(관광객 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전주대사습청에서는 토요상설공연,

수요상설공연과 특별 기획공연, 전주대사습 체험 프로그램 등 대사습 문화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도 운영 중에 있다.

첫 번째 들린 곳이 대사습청이다

만락당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즐거움이 가득한 집이라는 의미이다.

만락당에서는 매년 전주에서 국악 경진대회가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오늘은 공연이 없는 날인지 조용하기만 하다

예전 명인 명창들은 산 위에 올라 수련을 할 때 옆에 고무신을 벗어두고 소리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한 장단이 끝날 때마다 모래 한 알이나 조약돌 한 알씩을 넣어 고무신에 가득 찰 정도로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들의 소리 공부는 고부신 속에서 이름 모를 풀이 돋아날 정도의 오랜 시간 득음과정을 거쳤다고 전해진다

 

황손 이석선생이 살고 있는 승광재를 가기 위해 골목길로 접어든다

대한황실의 후손이 머무는 한옥

이곳은 전주한옥마을 내에 위치한 한옥으로 대원군의 증손자이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직계 손자인 황손 이석이 거처하는 곳이다. 승광재(承光齋)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빛 광(光) 자를,

뜻을 이어간다는 이을 승(承) 자를 따서 ‘고종황제의 뜻을 이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마지막 황손 이석이 황실에 대한 전통, 문화, 역사에 대한 강연을 하는 등 특별한 문화공간이다.

황손의 주거 공간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문이 닫혀있지만 방문을 원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사전에 연락 후 승광재의

행사나 일정이 겹치지 않을 경우 관람이 가능하다. 전주한옥마을에서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전화로 예약 시

숙박도 할 수 있으며 숙박객들에게는 간단한 조식도 제공된다. 고풍스러운 한옥도 멋지지만 넓은 마당의

예쁜 정원이 돌담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데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며 조용한

사색에 잠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황손이석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10남. 이석(李錫)은 황실 족보 상 이름이고, 본명은 이해석(李海錫)이다.

황실문화재단의 이사장이다. 그리고 현재 생존해 있는 고종황제의 손자 중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가장 연장자이다

의친왕이 65세에 낳은 늦둥이 자녀다.

 

황족이라고 하지만 극소수의 재산도 순종황제 사후에 황실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 그리고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에게 돌아갔다. 이것 때문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방자 여사가 박정희로부터 다른 황족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받은 자금을 이방자 자신의 자선 활동에만 썼다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해당 자금의

목적이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의친왕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 옥살이하는 수모를 겪고 재산을 몰수당해서

 6.25 전쟁 때 영양실조에 걸리며 막내딸을 얻은 지 2년 만에 사망했다.

황손이석
생활고로 인해 대학 재학 중에도 DJ 일을 보았고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미 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워커힐

호텔에서도 밤무대 가수를 했다. 이후 방송 MC와 건전가요 가수로서 계속 활동했다.

이때 황족이 광대를 해서 돈을 번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매우 혼이 났다고 한다.

특히 당시 살아 있던 본인의 백모(큰어머니)인 순정효황후에게도 크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19세기말에 태어나서 시아버지인 고종황제와는 다르게 사진 찍는 것까지 싫어했던 순정효황후 입장에선, 망한

황족이라지만 가수 노릇을 한다는 게 곱게 보이지 않았을 듯. 참고로 아버지인 의친왕은 1955년에 사망해서

아들이 가수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순정효황후 문서를 보면, 이후 TV에 나오는 이석을 보며 상궁들이

망측해하자 "시대가 변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조카를 완전히 내치지는 않은 듯. 같이 연예계 생활을 한 동료들의

증언으로는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가렸고(구분했고), 어떤 경우에도 서로 감정

상할만한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연예병사로 입대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예비역 병장으로 전역했다. 하지만 부상을 입고 귀국하는 바람에 상심한

모친 홍정순 여사는 신경성 위암을 얻어 손녀 이홍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비둘기집〉이라는 건전가요를 불러 유명해졌다. 1979년 황실을 챙겨줬던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 전두환은 이들을 궁에서 쫓아냈다.

결국 이석은 198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어찌어찌 영주권까지 취득했지만

결국 1989년에 귀국하여 청담동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2005년부터 전주대학교 사학과 강사로 일하면서 전주시 소유의 승광재에서 가이드를 해주고 얼마간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한다.

거리를 걸어 보지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곳들만 있어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우리가 들어갈 만한 곳은 없다

거리에는 배롱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경기 전과 전동성당을 돌아보기 위해서 경기전 쪽으로 간다

곳곳에 한복대여점들이 많지만 워낙 더운 날씨라 거리는 한산한 편이다

대형 음식점도 한가하기는 마찬가지다

밀렛(화초수수). 꽃범의 꼬리. 털부처꽃

전주 경기 전 정전(全州 慶基殿 正殿)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에 있는 조선 시대의 묘사(廟祠)이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을 모신 건물이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다.

전주는 전주 이 씨인 조선 왕실의 본관지로써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조정으로부터 우대받았다.

 태종(太宗) 10년(1410년)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경기전이 세워졌으며, 조선 태조의 어진을

이곳에 봉안하게 되었다.

전주 외에도 계림 · 평양에도 어용전을 세워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세종(世宗) 24년(1442년) 각지의

어용전들의 이름을 개칭하면서 전주의 어용전은 처음으로 경기 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경기전 관원으로는 영(令, 종 5품) 1명, 참봉(參奉, 종 9품) 1명이 배속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경기 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 유생 안의, 손홍록 등과 함께 빼내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과 함께 내장산

숨겼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조정에 바쳐 경기 전에 봉안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전주의 판관 민영승

(閔泳昇)에 의해 조경묘의 위패와 함께 위봉산성으로 일시 옮겨지기도 했다. 이때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4월 28일에 전주 남쪽 봉우리에서 전주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는 와중에 경기전 경내까지 대포가 날아들어 건물의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자, 당시 전주를

점령하고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접주 전봉준(全琫準)은 초토사 홍계훈에게 보내는 소지문(訴志文)에서

"전주감영에 대포 쏜 것이 저희 죄라고는 하지마는 성주를 시켜 대포를 쏘아 경기 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라고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 어진

어진박물관

태조 어진

창업군주인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시조인 만큼 특별히 국초부터 경복궁 내에 선원전(璿源殿)이라는 어진 봉안처를

만들어 보관하였고, 각 지방에도 어용전을 건설하였다. 한성부 문소전(文昭殿), 영흥부 준원전(濬源殿), 평양부 

영숭전(永崇殿), 개성부 목청전(穆淸殿), 경주부 집경전(集慶殿), 전주부 경기 전(慶基殿) 등에 각각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성계의 어진 26축 중 현존하는 유일한 이 어진은 태조 말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에 경기 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모든 이성계의 어진들이 왜군의 손에 불타 사라질 때 전주

경기전에 있던 이 어진만은 유일하게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두 인물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왕조실록고려사 등의

다른 중요 문적들과 함께 보관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경기전이 재건되면서 다시 소장되었고, 이후

시간이 지나며 낡아진 원본을 고종 9년인 1872년에 원본 모습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정조어진

정조는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은 알 수 없다. 현 정조의 어진은 근래에 이길범 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상상도로 1989년 국가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정조는 무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풍채 좋은 왕이라고 알려져 있어 이 어전과 차이가 있다

정조는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로 1776년 25세에 22대 왕으로 즉위했으며 1800년 49세로 승하하였다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고 왕권 강화를 위해 수원 화성을 축주하여

천도를 시도하였다

잠시 어진 놀이도 해보고. 그때는 안경이 없었는데 ㅎㅎ

신연

신연은 어진이나 위패 봉안에 사용했던 가마를 말한다.

이 신연은 1872년 태조어진을 이모 하여 봉안했을 때 사용한 가마다

채여

채여는 의례용 귀중품을 옮기는 데 사용하는 가마이다

이 채여는 1771년 조선왕실의 시조 이한의 위패를 조경묘에 봉안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교

가교는 임금이 타는 가마 중 하나로 1872년 태조어진을 봉안할 때 또는 1771년 조경묘에 시조 이한의 위패를 

봉안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경기전에 임금이 온 적이 없으므로 이 가교는 임금을 상징하는

의식구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복

경기 전과 조경묘 제례 때 복식이다

태조어진봉행행렬

여러 유물들이 많지만 다 담기에는 역부족 잠시 돌아보고 나왔다 

아직 배롱나무 꽃이 싱그럽다

맥문아재비. 개맥문동이라는데 맞는지 모르겠어요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전동성당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최초로 순교했던 터로서,

1889년(고종 26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바디네 신부(Baudounet, Francois Xavier, 1859-1915,

한국명 윤사물)가 부지를 매입하고 경술국치 이후인 1914년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여 완공되었다.

도로변 쪽 구석에 윤지충 성상이 있다.

전동성당은 기본적인 고딕 양식의 주조에, 비잔틴 양식 돔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전주교구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곳에서 혼인성사를 올리기 위해 꽤나 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나무위키에서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은 전주성심여자중고등학교이다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한국 최최로 순교한 곳이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과 진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성당은 바로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던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곳에 있다.

1891년(고종 28) 바디네(Francis Baudounet) 신부가 전주 남문 밖에 집을 매입하고 정착하였다.

그 뒤 1908년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축에 착수하여 1914년에 준공을 보았다.

벽돌로 된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건물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외양상 유사한 점이 많으나

건축양식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하여 섬세한 모양을 꾸며낸 점은 같으나 반면에 아치의 모양이나 종탑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

.

내부 열주(列柱)는 8각의 석주(石柱)로 되어 있으며, 정면 중앙의 종탑부는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 각형

고상부(鼓狀部) 위에 12각의 총 화형(葱花形)으로 된 둥근 지붕을 얹었고, 좌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8 각형의

고상부 위에 8각의 지붕을 얹었다.

두툼한 외부 벽체와 반원아치의 깊숙한 창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딕양식의

명동성당이 내부 열주 사이를 뾰족한 아치로 연결한 아케이드인 데 반하여, 이 성당은 8각 석주 사이가

반원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이 성당은 건평 189평에 대지 4,000평이며,

전주 중앙본당이 1956년에 준공되기 전까지는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

1981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바디네 신부(Baudounet, Francois Xavier, 1859-1915,

한국명 윤사물)

전동성당을 돌아보고 최명희 문학관으로 가면서 종로회관에서 비빔밥으로 점식식사를 했다

마치 덕수궁돌담을 연상케 하는 경기전 돌담이다

최명희 문학관은 내부 수리로 출입할 수가 없어 되돌아 나왔다 

 

(사랑의 연주곡) Sergey Chekalin - To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