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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다원과 백운동 별서정원

                                일제강점기에 이담로의 8 세손인 이한영이 우리나라 최초의 녹차 상표인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그 맥을

                                             이었다.이한영은 다산과 초의선사로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 차 역사의 맥을 이어온 다인이다.
                            지금도 백운동 정원 주위에는 태평양 설록다원 등 드넓은 차밭이 펼쳐져 있어 그 옛날 차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설록차라고 부르는 차가 여기서 생산된다.

백운동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차 만드는 방법에 대한 편지와 차 문화의 중요 문헌인 <동다기>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혜장선사와 초의선사 등에게 제다법을 가르칠 정도로 차에 대한 조예가 깊어 우리 차 문화사의 중흥조라 여겨진다.

백운첩

백운첩은 다산 정약용이 1812년 초의선사를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한 후 백운동의 풍광을 시로 쓰고 그림으로 그린 시첩으로 백운동도와 서시 백운동 12경 발문 다산초당도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백운동 초당을 입지 못한 다산이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서시와 발문 백운동

12경 중 8수(옥판본. 산다경. 백매오.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의 시를 직접 짓고 초의 3수

(홍옥폭. 풍단. 정선대) 제자 윤동 1수(운당원)를 쓰게 하여 총 14수의 시를 완성한 후 백운동과 다산초당 중 

어느 것이 아름다운지 겨뤄 보고픈 마음으로 다산초당도를 마지막으로 그려 넣어 당시 백운동 4대 동주 

이덕휘(1759~1828)에게 선물했다

이곳의 백운동천은 조선 중기 이담로(1627~1701)의 별서정원이다. 

금릉의 물이 그냥 안개와 구름이 되는 게 아쉬워 계곡에 정자를 앉힌 것이다. 

이곳의 꽃과 나무와 집, 병풍으로 두른 옥판봉은 보는 대로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은 눈길을 옮기는

대로 살아서 움직인다.

백운동 별서 정원을 최초로 조성한 사람은 조선 중기의 처사 이담로(1627~1701)였다.

그는 만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과 함께 백운동에 들어가 20여 년간 은거했다.

제2대 백운동 별서 정원의 주인이었던 이언길은 평생에 걸쳐 정원을 가꾸다가 73세 되던 1756년에

가족을 데리고 이주했다.

이후 대를 이어오던 유서 깊은 생활공간은 2001년 ‘백운첩’이 발견되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백운동 별서정원은 담장 안쪽 내원과 바깥의 외원으로 나눠집니다.
내원은 본채와 사랑채가 있는 상단과 화계로 이루어진 중단, 
두 개의 연못의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월출산 자락의 경사와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외원에는 동백 숲의 산다경과

대숲을 이루는 운당원 등 숲 공간이 있으며 물이 흐르는 계류와 정자가 있는

정선대 그리고 후원 공간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2경 산다경

별서정원에 들어가는 동백나무(별칭 산다) 숲의 작은 길

언덕을 끼고 심은 동백나무가 이제는 길 가득 그늘 만드네

가지마다 꽃 고물 맺혀 있으니 세한의 마음을 남겨둔 걸세

제4경 홍옥폭 (단풍나무 빛이 비친 폭포의 홍옥 같은 물방) 지금은 물이 없어 폭포가 아니다

천봉에 빗방울 쏟아지더니 냇물이 백 갈래로 갈리어난다

온통 단풍나무속을 따라서 죽정 앞을 부딪히며 지나가누나

백운동 별서 정원으로 가는 길은 어둑어둑한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깊은 숲길이다.

월출산 다원 주차장에서 계곡 쪽으로 경사진 산길을 내려가면 비밀의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동백나무가 울창한 진입로를 지나 작은 나무다리 앞에 서면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별서 정원의

자태가 드러난다.

월출산 자락의 경사와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외원(外園)에는 동백 숲과 대숲의 초록 풍경이 시원하다.

백운동 암각 글

자연석에 새겨진 백운동(白雲洞) 세 글자는 백운처사 이담로 (1627~1701) 선생이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학문을 익혀 남을 이롭게 살고자 하던 주자의 백룡동 서원을 의식하고

백운동이라고 바위에 새긴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제10경 풍단(청하벽 위에 불게 물든 단풍나무가 심어진 단)

금곡의 번화한 숲 그 옛날에 심은 것 붉은 비단 가림막이 양편으로 열려 있네

냇가 임한 죽각은 어느 해에 부서졌나 그래도 서산에선 맑은 기운 밀려온다

제6경 창하벽 (붉은색의 글자가 잇는 푸른빛 절벽)

틀림없이 바람이 도끼로 깎아 그 틈으로 비 이끼가 스며든 게지

바위에 새긴 글씨 없음 아쉬워 붉은 빛깔 큰 글자를 써두었다네

백운동정원 정문  백운유거

백운유거는 백운동주인 이담로가 은거하는 곳이라는 뜻

백운동 별서 정원은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의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 운 마을에 있다.

조선 중기 선비들이 자연 속에 원림을 꾸며 시와 풍류를 즐겼던 은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힌다.

 

보소실

보배로운 바탕을 지킨다는 뜻으로 특정장소나 물건을 보호하거나 관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계를 내려서면 대문으로 이어지는 넓은 마당이 나온다. 이곳에 잔(觴)을 띄워 보낼 수 있는 아홉 굽이의

작은 물길 제5경 유상곡수(流觴曲水)가 있다. 유상곡수연은 진나라 때 왕희지가 삼월삼짇날 난정에서

열었던 연회에서 비롯됐다.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굽이굽이 돌아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앉아서

자기가 있는 곳에 술잔이 오면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던 잔치였다.

 

백운동은 정원 옆을 흐르는 계류가 있는데도 별도로 집 안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이 물길은 계곡에서 두 번,

내원에서 다섯 번, 외원에서 두 번을 굽어 흘러 구곡(九曲)을 이룬다. 계류가 자연스레 흐르는 동적인

물이라면 집 안으로 끌어들인 유상곡수는 정적인 물이 된다. 그 정적인 곳에 간소한 초정이 하나 있어

사색에 빠져들게 된다. 유상곡수는 경주 포석정이나 창덕궁 후원 옥류천 일대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지만

민간 정원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

 

제5경 유상곡수

잔을 띄워 보낼 수 있는 아혼 굽이의 작은 물길

 

당장 뚫고 여섯굽이 흐르는 물이 고개 돌려 담장 밖을 다시 나간다

어쩌다 온 두세 분 손님이 있어 편히 앉아 술잔을 함께 띄우네

백운동 원림으로 조성한 이담로 6대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이시헌의 묘다

제11경 정선대(신선이 머물렀다는 옥판봉이 보이는 청하벽 위의 정자)

집에 푸른 대숲이 뉘였도 한데 담장에 담쟁이 붉은 가을이로다

시험 삼아 샛문의 밖을 따라서 바위 난간 머리까지 쉬엄 걸었지

비에 씻겨 고운 뫼 모습 나오고 해묵은 관목들도 그윽하여라

경영함을 기록 남겨 보인다 하면 장취원이 한가로운 근심 품을 듯

정선대

옥판봉은 안개로 인해서 전연 보이지 않아 예전에 왔을 때 사진으로 대체

별서정원은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따로 집을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정원을 의미한다

정자 자이당

자이당은 이시헌의 호이다 

스스로 만족하면 두루 즐거우니 세상의 시비를 잊었다’라고 자신의 호의 뜻을 풀고 후손들이

이에 따르길 바랐다.

제8경 모란채(모란이 심어져 있는 돌게단의 화단)

산 사람 색보에 조예가 깊어 호걸에게 양보하길 즐기지 않지

그루를 나무는 법 하마 익숙해 작약 캐는 수고로움 아예 없겠네

초당에는 취미선방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취미선방은 산허리에 있는 꾸밈없고 고즈넉한 방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제9경 취미선방(산허리에 있는 꾸밈없고 고즈넉한 작은 방)

담장과 섬돌 빛깔 한 줄 흔적이 푸르른 산빛을 점찍어 깬다

여태도 세 그루 나무 있으니 예전부터 좁은 집에 살던 것일세

본채로 올라가면 그 주변 언덕은 100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다는 제3경 백매오(百梅塢)이다.

그 옛날에는 바위 절벽의 푸른빛을 상쇄하려고 100그루의 홍매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은 취미선방 담장과 왼편 담장 아래에 두어 그루의 매화나무가 초봄에 희미하게 꽃을 피울 뿐이다.

제3경 백매오

집둘레에 층층 바위 아주 푸른데 백 그루 홍매화 나무 가꾸네

산 빛 어린 속에서 오가노라면 온통 모두 암향속에 있는 것 같아

                                                                      백운동 별서에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사방으로 둘러쳐진 담장이다. 원래 별서 정원의 담장은 보기 흉한 것을 가리기 위한 것일 뿐 안팎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담로가 처음 이곳에 백운동 별서를 꾸렸을 때에는 대문과 담장이 없었는데, 그가 죽은 후 손자

이언길이 가족을 이끌고 들어와 살림집이 되면서 담장과 대문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별장형 별서였다가 나중에 생활형 별서로 되면서 일어난 변화가 아닌가 싶다.

원주이 씨 사당 

뒤 언덕 정자로 가는 문

12경 운당원 별서 뒤편에 늠름하게 하늘로 솟은 왕대나무 숲

 

그대 백운동의 운당원을 못 보았나 깎은 옥이 빽빽하게 그름 뿌릴 뚫었다네

하늘 위로 80척을 곧바로 솟아올라 옥정봉 머릿돌을 굽어보아 살피고

옥골이 반들반들 사람 얼굴 비추니 사방의 구경꾼들 처음보곤 놀란다네

탐진의 구실아치 불충을 탄식 노니 이 대나무 공물로 충당하지 아니하네

애꿎게 시골집의 비쩍 마른 대를 취해 역마가 먼지 날리며 왕궁으로 드는구나

                 여기까지가 백운동 12경의 개략적인 풍경이다.백운동 별서 정원은 이담로 당대부터 널리 알려져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초의선사 의순, 소치 허련, 치원황상, 삼연 김창흡, 포음 김창집, 담헌 이하곤, 창계 임영, 적안 신명규,
                  인계 송익휘, 해석 김재찬, 귤은 김유 등조선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찾고 시를 남겼다. 그 기록과 자료들도
                                                     우리 원림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풍부하게 남아 있다.

백운동 별서 정원은 원래의 모습을 잃고 황폐했다가 최근에 다산 정약용의 <백운첩>에 근거해서 복원됐다.

담양의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이른바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힌다.

백운동 별서 정원은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 운 마을에 있다.

승지공 이담로의 묘

백운동 별서정원을 지은 처사 이담로 부부묘이다

You and me - Day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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