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사에서 걸어서 다산초당으로 가려고 했더니 옆지기 힘들다고 차로 가자하여
여왕님 모시듯 차로 다산초당 입구 주차장으로 왔는데 경험상 거의 비슷한데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 문턱이라는 논리에 내가 질 수밖에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올라 가는데 귤송당이란 안내문이 있어 들어가려 했더니
대문이 궂게 닫혀 있다
줌인해본 귤송당 옛날에는 초가였을 것 같은데 지금 보니 기와로 튼실한 집이 되어 있다
다산유적 안내지도를 보고 길 따라 오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갔는지 포장은 돼 있지 않지만 번들번들 눈감고도 오를 수 있는
대로 같은 길이다
올라가다 보니 묘지가 있어 무슨묘가 입구에 있을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앞에 설명문이 보인다
다산의 18제자중에 한 사람 윤종진의 묘라고 쓰여 있다 (아래글 참조)
다산초당 다성각
다산 정약용 집안은 기호 남인에 속했으며 다산의 선조가운데 연달아 8대에 걸쳐 홍문관(옥당)
벼슬을 역임하여 8대옥당 집안 이라고도 한다
다산의 어머니 해남윤 씨 윤소온은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학자이자 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손녀다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던 호남의 대표적인 남인 게 집안으로 어쩌면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해남과 강진에 있던 해남윤씨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정약용의 형제로는 가장 큰 장형은 이복형으로 의령남씨 소생의 정약현이고 그의 첫 부인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벽의 누이였다 그의 딸은 황시영과 결혼했다
어머니 해남윤씨 소생으로는 둘째 형 정약전과 셋째 형 정약종이 있다 그리고 누이가 이승훈과 혼인했다
서모 김씨 소생으로 동생 정약횡이 있다 이승훈은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정약종은 신유년(신유박해)에
순교했다
다산은 유형원 이익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했으며 북학파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실용지학 이용후생을
주장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다산은 일생동안 500여 권이 넘는 저술과 2700 수의 시를 남겼고 1836년(헌종 2년) 75세의 삶을 일기로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산초당
1801년 9 순조 1년) 40세의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 도착을 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대역죄인이라 모두 접촉을 피했는데 이때 불쌍히 여겨 챙겨준 사람이 동문매반가의 주모였다
다산은 자신이 거처하는 누추한 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이고 네 가지 마땅함 즉 생각은
맑아야 용모는 장엄해야 말은 과묵해야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 라는 다짐을 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후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고성사 고은산방 그리고 1806년 가을부터 약 1년 반 제자
이청 (학래)의 집에서 머물다 초기의 엄혹한 감시와 압박이 조금씩 풀리면서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은 제자들과 함께 학업에 정진하는 연구공간이 되었으며 방대한 저술을 낳은 곳이 되었다
다산의 제자에는 음중시절에 수학한 제자 (음중제자)들과 다산초당에서 수학한 제자(다산 18 제자)
등이 있다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의 저술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다산은 4서 6경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1818년 해배되기까지의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 연구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마쳤다
경세유표 목민심서등을 저술하였고 미처 끝나지 못한 흠흠신서는 고향짐에 돌라가 저술을 마친다
또한 다산은 수많은 서정시 및 사회 시를 지어 19세 게초반 강진 일대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 어린 시로 대변해 주었다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오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 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진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했던 곳으로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에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이다
전남신안 압해읍을 본관으로 하기에 이칭은 나주(당시는 나주목에 속하였다) 아명은 귀농이다
호는 다산. 사암. 탁 옹. 테스. 자하도인. 철마산인. 문암일인. 당호는 여유당이며 시호는 문도이다
아버지는 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으로 압해정 씨이고 사별 후 둘째 부인인 해남윤 씨로
고산 윤선도의 5대 손녀로 조부는 공재 윤두서다 부친이 윤덕렬인 윤소온(1728~1770) 사이에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하나를 낳았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영조 38년) 지금의 남양주 군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2세에 과거에 합격을 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때 정조대왕을 만나게 되고 총애를 받으며 1784년 (정조 8년)
23세 때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면서 이벽에게 천주교에 관한 얘기를 듣고 감명을 받는다
1783년(정조 13년)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아간 다산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 설계에 재주를 보인 다산은 1792년 31세에 부친상으로 여막살이를 하는 동안
정조로부터 수원화성 설계를 명령받는다
1794년 (정조 18년) 33세의 나이로 경기북부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참혹상을 목격하고 권세를
휘둘러 민폐를 끼친 관리들을 처벌하도록 정조에게 보고를 했다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이때부터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아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정조는 먼 곳 곡산부사로 보낸다
천주교 등으로 정적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였으나 보호막인
정조가 죽자 더욱 공격을 받아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모든 게 천주교와 얽힌 것들이다 나주 율정에서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형은 흑산도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년 후인 1816년 죽고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1818년에 귀향했다
연목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석가산
동암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잇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언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천일각으로 가면서 바라본 동암
천일각
다산초당에서 쓴 편지라는 안내문은 낡아서 알아볼 수가 없다
정석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 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 자만 따서 새겨놓은 것을 보면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산회당
다산회당은 1983년 조순 전총리 한승수 전총리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등 다산선생을
흠모하는 다산회원 16명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전통 한옥건축이다
10여 대도 주차 하기 어려운 주차장인데 휴일이라서인지 주차장은 만차이다
저분들도 주차를 하고 오르는 중이다
민들레 홀씨 되어/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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