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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최초 유배지 사의재

우리 부부는 코로나 유행 때 여행을 다니면서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미니 밥솥을 구입하여 

반찬 준비하고 다녔는데 어디를 가던 불편함이 없다

반찬을 5~6가지 준비하여 아이스박스에 넣었다가 숙소에 도착하면 바로 냉장실에 넣고

아이스팩 냉동실에 넣어 얼렸다 다음날 또 아이스박스에 넣어 이동을 하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간단히 해결할 수가 있어 요즘도 많이 애용을 하고 있다

이날은 마량항에서 점심을 갈치조림으로 해결했는데 과식을 해서 저녁도 먹기 싫다고 하여 

또 밥을 조금 했다  코드만 꽂으면 되니 얼마나 편리한가 두 끼를 이렇게 해결하고 8시에

바로 300m거리에 있는 사의재로 간다

이렇게 찍으면 엄청 크게 보이지만 학생들 도시락만큼 밖에 안 된다

한 번 지으면 3인이 먹을 수 있다

사의재 입구 

사의재는 현재 주막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오늘도 하루종일 비소식이지만 현재  아침에 비는 내리지 않고 있다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가우도까지 돌아보는 둘레길 코스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에 유배되어 처음 4년간 정착한 곳 표지판이다

동문매반가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유배봇짐을 풀고 골방 하나(사의재)를 거처로 삼은

다산선생이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게 되어 조선실학의 대가로

거듭나게 된 데는 주인할머니의 공이 크다 할 수 있다. 그 뜻을 기리고자 강진군에서 사의재 복원과

함께 당시 주막(동문배반가)을 재현하고자 이곳을 현대판 주모와 현대판 전(파전, 바지락 전, 굴전),

아욱된장국, 주물럭, 동동주 등의 토속적인 다양한 안주류와 막걸리를 판매하는 주막으로

운영하고 있다.

다산이 남긴 시구에는 ‘집 앞 남새(나물) 밭의 이슬 젖은 아욱을 아침에 꺾고 동쪽 골짜기의 누런

기장을 밤에 찧는다’는 구절이 있다. 다산의 제자 황상(1788~1870)이 다산과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초대해 아침밥에 아욱국을 내놓았다는 일화가 문헌에 있을 만큼 다산은 일상에서 아욱국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주모와 딸 모형 상

주모상(酒母像)

동문 밖 주막집 주모와 딸은 다산 정약용 선생을 처음 맞이해준 강진 사람이다.

선생이 강진에 처음 도착한 1801년 겨울부터 4년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선생은 이 거처를 ‘사의재’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황상, 이정 같은 ‘강진읍 6 제자’를

지도하며 상례사전(喪禮四箋) 아학편훈의(兒學緶訓義)등을 저술한다.

모녀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다산과 실학사상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강진군은 동상을 제작하여 모녀의 아름다운 정신을 길이 기리고자 한 것이다.

소망주병(所望酒甁)

남도답사 1번지 강진은 호남정맥의 최남단을 휘감아 도는 보은산(寶恩山)의 정기가 가득한 곳이며

탐진강이 흘러들어 천혜의 자원이 풍부한 강진만을 머금고 있다.

강진에서 주병의 의미는 임금님에게 드리는 귀한 보물이었으며, 다산 선생의 유배 시절 힘든 역경과

고뇌를 넘어설 수 있는 삶의 조촐한 선물이었다. 주모가 들고 있는 이 주병을 만지며 기원하는 소망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기운을 주며 귀한 보물로 돌아오는 영험함이 있다고 전해진다.

 

사의재는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며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주막 할머니의

얘기에 자신을 새로 추스른 다산이 1802년 10월경부터 최초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 6제자에게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 교재로 교육을 베풀었으니

당대 최고 권위의 학당이 이곳에 창설된 셈이다.

다산실학의 4대 성지

1. 사의재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주문하였다.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이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2. 보은산방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강진읍 보은산 고성사(고성암) 내 보은산방에 머문다. 이곳에서

강진읍 6 제자를 교육하였고, 52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3. 이학래의 집

1806년 가을 이곳으로 와 2년간 머문다. 이학래는 강진읍 6제자 중 막내였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600여 권에 이르는 엄청난 연구 저술과 실학 집대성은 다산이라는

불세출 대학자의 집필과 지휘 그리고 강진 24 제자(강진읍 6, 초당의 18 제자)들의 거룩한

공동 연구지원이 이루어낸 금자탑이었다.

다산초당

1808년 봄 이학래의 집에서 도암 귤동 마을 초당(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가 해제될 때까지

10여 년을 머물렀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 권의 저술을 완결 짓는다.

다산 주막 
 
                          - 정호승 
 
홀로 술을 들고 싶거든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다산 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다산 선생님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대빗자루를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창밖으로 지나가는 딱딱한 구름과 술을 들더라도
눈물이 술이되면 일어나 다산 주막으로 가라
술병을 들고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앞바다 갯벌 같은 가슴을 열고
다산 선생께서 걸어나와 잔을 내밀 것이다
무릎을 꿇고 막사발에 가득
다산 선생께 푸른 술을 올리는 동안
눈물은 기러기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동성리 499)에 위치해 있으며, 다산 정약용이

 1801년부터 4년간 귀양 가 살 때 거처 하던 주막의 한 칸짜리 방이다

한양 조정 권신사회의 잔혹함과 견딜 수 없는 기구함과 절망감으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던 다산이 마침내 “내가 강진에 귀양오기를 참 잘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토로할 만큼 따뜻했던 강진지역의 인심에 마음과 몸을 열어 지역

현실에 참여하면서 조선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병리를 보다 생생히 목격하고 체험해 가던 시기였다.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은 비좁은 이곳 사의재에서 광활한 희망의 세계를 꿈꾸며 집필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정약용이 유배를 당해 강진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죄인이라 하여 아무도 거처를 내어주지 않자

주막 (동문매반가) 주인인 할머니가 방한칸을 내어주어 이곳에서 4년 정도 지내게 되었다.

동천정

사의재는 동천정을 포함하여 모두 갈대로 엮은 초가이엉이 특색이며, 수(水) 공간을 가로질러 주막채로

향하는 길, 고즈넉한 옛 모습의 토석벽과 동네어귀에서 집안이 보일 듯 말 듯 집집마다 둘러쳐진 낮은

돌담길, 전통적인 연못 등을 조성하여 이곳을 찾는 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다.

동천정의 현판은 “동문샘의 정자”라는 뜻으로 다산선생의 제자인 황상의 글씨체를 집자했다.

 

동문샘

사의재 주변에는 한옥체험관과 카페와 소품샵이 있다.

​옛 샘물터와 빨래터가 아직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강진읍이 와우형국이고 동문 마을에는 소의 왼쪽 눈을 뜻하는 샘이 있다.

강진읍성 사대문의 하나인 동문이 있어 마을 지명을 동문(동문안)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문샘은 마을 안에 있는 샘이다. 마을 뒷산 우두봉을 황소의 형국이라 하여 동쪽에는 동문정이 있고

서쪽에는 서문정이 위치하고 있어 이를 황소의 왼눈과 오른눈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동문샘은 마을 주민이 상을 당하거나 어린아이가 출생하였을 때 반드시 물 색깔이 하늘색으로 변한

후 다시 맑은 물로 된다고 한다.

동문샘

동문샘과 빨래터 

저위에는 찻집등 저작거리다

한옥스테이(모셔온 사진)

강진은 사의재가 전통주막으로써의 숙박기능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2015년 사의재 한옥체험관을

건립하였다. 이에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에피그램은 사의재 한옥체험관을 리모델링해 지역에서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는 한옥 스테이 형태로 재탄생시켰다.

지난 12월 1일, 올모스트홈 스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걸고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이곳은 강진의 역사와 문화,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강진산책을 테마로 운영한다.

동문마을 유래비

 

청조루

(모셔온 사진 들어올 때 사의재로 먼저 들어와 사진을 담지 못했다)

청조루는 강진읍 옛 객관 남쪽에 있는 누각으로 현감(縣監) 오순종(吳舜從, 1491~1495 재임)이 건립했다.

누각명에서 나타나듯 당시 강진만의 푸른 물을 굽어보고 노 젓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바닷가에 자리했다.

청조로는 여러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훼손되어 사라졌다.

청조루 오른쪽 돌의자에는 다산이 책 읽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포토존이다

 

로맨틱 올드팝 연주 드라이브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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