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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만덕산 백련사

사의재를 둘러 복 이곳 만덕산 백련사에 왔다(3/2)

이곳은 일주문 앞에 바로 주차장이 있어 접근성이 요이하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고 있지만 비소식은 연일이고 주위에 안개가 자욱해서

시야가 탁트인 풍경은 기대할 수가 없다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요새(了世)는 지눌과 송광사에 머물다가,

천태종의 묘의를 얻고 1211년(희종 7) 백련사를 크게 중창하여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사결사를

맺는데, 이 결사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후 백련사는 120년 동안을이어 고려의 8국사를 배출하였다.

또한,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성장과 함께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으로서 불교중흥을

위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건립경위

백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백련사는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 도량으로 면모를 달리 한 것은 1211년

(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

요세는 천태종(天台宗) 계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다.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 최홍(崔弘), 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공사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시행되어,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보시(布施)를 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새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 지방이

3차례 왜구 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형태와 특징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파의 세력을 키우고 있을 때, 백련사는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

(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의 중흥을 위한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어 이 절 주위에 성을 쌓았다.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시왕전(十王殿) · 나한전(羅漢殿) · 만경루(萬景樓) · 칠성각 ·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4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는 용두(龍頭)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밖의 사중유적(寺中遺蹟)으로는 만덕산 백련사 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이 있다.

1681년(숙종 7) 세워진 백련사 사적비는 2004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비는 고려시대 한림학사

최자(崔滋, 1188~1260)가 쓴 원묘국사비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비신이 훼손되고 귀부만 남게 되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이후 조선 후기 홍문관 수찬 조종저(趙宗箸, 1631~1690)가 편찬한 백련사 사적을

새겨 비신을 만들고 원래 귀부 위에 다시 세웠다. 중진탑은 방형의 지대석(地臺石)인 위에 연화문(

蓮花文)의 중대석(中臺石)이 있으며, 상대석에도 무늬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고복형(鼓腹形)의

옥신(屋身)에는 2줄의 주렴문이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

복발(覆鉢) · 보주(寶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 숲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끓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 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

사찬왕상은 대형으로 무시무시한 지국천왕 대신 온화한 보살 스타일이다

이렇게 동백나무 숲에 대하여 해설문을 세웠지만 아직은 동백이 필 시기가 아니어서

푸른 잎만 무성하다

예전에 방문하였을 때는 동백이 흐트러지게 피어 누군가가 떨어진 꽃으로 하트모형을

멋지게 만들어 놓은 것을 사진에 담은 일도 있었다

만덕사는 배롱나무도 두그루가 아주 오랜 세월 꽃을 피웠을 것 같은데 여름에 오면 좋을 것 같다

만경루는 강원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중앙에는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만경루의 글씨도 원교선생의 글씨다

원교 선생의 글씨 스승은 백하 윤순(尹淳) 선생이었다.

백하 윤순은 해남 윤씨다.그는 녹우당의 주인이며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조카다.

 

윤순은 '동국진체'를 창시한 옥동 이서의 제자다.

옥동 이서는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 이익의 친형이다.

 조선 초기에는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했다.

 

조선 초기 송설체의 대가가 바로 안평 대군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 동진 시대의 서성(書聖)' 왕희지의 글씨체가 유행했다.

왕희지체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한석봉이다.

종무소 저 뒤로 가면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범종각 

대웅보전과 명부전 

대웅보전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

대웅보전은 공포의 형식과 초각 등 세부기법이 화려하고기둥 상부의 용머리 조각천장 상부의

용머리 장식 등은 해학적이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실내를 채운 여러 마리의 용과 봉황 장식 등은 18세기 이후 불전 건축이 장식화 되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공포(栱包): 전통목조건축에서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 상부에 짜 맞추어 올린 부재

  초각(草刻): 건축부재에 다양한 무늬를 새겨서 장식하는 것

대웅보전 편액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영조 때의 대학자 원교 이광사 선생의 글씨다.

원교 이광사 선생은 조선 영조 때 소론의 잘 나가던 집안 출신이었다.

원교 선생의 아버지는  예조 판서를 지냈다. 그러나,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소론이 실각함에 따라 원교 선생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원교가 50세 때인 1755년(영조 31), 원교 선생은 소론 일파의 역모 사건과 연좌되어

부인은 자살하고 이곳저곳 긴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완도의 부속 섬인 신지도에서 23년간 살다가 귀향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쳐야 했다.

 그 원통함과 답답함과 쌓인 한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러나, 원교 선생은 무너지지 않았다.

 

<법화경>을 한역한 구마라집 법사가 기나긴 감금과 모욕의 세월에 무너지지 않고

불세출의 경전 번역 작업으로 불법의 꽃씨를 뿌렸듯이 원교 선생은 자신의 개인적 불행과 아픔과

쌓인 한을 녹이면서 글씨에 무섭게 매진해서 '원교체'라는 자신의 서체를 이 세상에 내놓았다.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였다.

 만덕사는 신라 문성왕 때 무염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그 뒤 고려 희종 7년 원묘 국사 요새 스님이 옛터를 중창하고

'백련 결사'로 크게 이름을 떨쳐 '백련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백련사는 무엇일까요?

백련은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의 연지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하얀 연꽃이다.

하얀 연꽃 같은 정토 행자가 되자는 원력을 가진 염불 행자들의 수행 모임을 '백련결사'라고 한다.

 원묘 국사 요새  스님을 중심으로 한 백련사 백련결사는 120년간 지속되었다.

백련사는 고려 후기 여덟 분의 국사를 배출하며 크게 번창했다.

 

원묘국사 요새 스님 탑비다.

요세 스님은 경상도 합천 사람이며 합천에 있는 천태종 도량인 천락사에서 출가하여 공부했다.

그는 20대 중반에 당시 고려 수도 개경에 올라와 공부했다. 그리고, 승과에 합격하고 앞날이

촉망받는 승려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 불교의 부패한 모습에 실망하고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수행 결사 모임인 

수선 결사에 동참했다. 수행 노선 상의 차이로 인해 요새 스님은 지눌 스님과 결별한다.

지눌 스님이 좌선하는 참선 파였다면 요새 스님은 신앙심이 강한 염불파였기 때문이다.

 

천태종의 요세 스님은 남해 바다가 펼쳐진 강진에 내려와 강진 호족과 백성들의 도움 속에

백련 결사를 주창했다. 요새 스님은 정토 논서인'관무량수경소'를 송나라 사명 지례 스님이

재해석한 '관무량수경소 모종초'라는 책을 즐겁게 읽고 강의했다.

 '모종초(妙宗抄)'라도고 부르는 이 책은 천태 교학과 천태지관의 입장에서 극락정토를 구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책이다. 요새 스님은 '모종초'에 나오는  “이 마음이 부처를 짓고,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네(是心作佛 是心是佛)”라는 구절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아미타온님 글에서

불후념 불수념

요새 스님은 이 구절이 마음(신앙심)의 감응을 통해 부처와 중생이 만나는 지점,

즉, 부처님의 자비와 중생의 소원이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원리를 밝혔다고 생각했다.

 

신앙은 무엇일까요?

불보살님의 가피와 수호를 자라면서(불호념, 佛護念), 중생들이 불보살님을 생각하고

부르는(불수념, 佛受念), 불화념 불수념의 길이 바로 불교 신앙이다.

 요새 스님은 불호념과 불수념의 인연과 상응'이 마음(是心)'에서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즉, '모종초'에 나오는 “이 마음(是心)”이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불효념)에 상응하여

중생들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불호념 불수념의 장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요새 스님은 “이 마음(是心)"을 닦기 위해서 화두를 참구 하는 간화선보다

예불과 참회 수행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미타온님 글에서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숲.

3,000여 평의 숲 속에 수령 3~400년이 넘는 동백나무가

약 1,500그루 서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동백나무 군락지다.

오늘 이 많은 동백나무 중에서 딱 한송이만 보았다

 

이은하 -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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