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마지막 코스 영랑생가에 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지만 많은 비는 아니고 잔뜩 흐리기만 한 날씨다
아침 7시에 출발 여기까지 다섯 곳을 거쳐 왔으니 이제 쉴 때도 되었다(3/1)
영랑
본관은 김해(金海).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의 5남매 중 장남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 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
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
李承萬)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朴烈), 시인 박용철(朴龍喆)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하였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 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후 『문학』·『여성』·『문장』·『조광(朝光)』·『인문평론(人文評論)』·『백민(白民)』·『조선일보』 등에
80여 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평문(評文)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초기 시는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의
역정(逆情)·회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비애의식은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져 정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그의 초기 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 시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그 시대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민족항일기 말기에 발표된 「거문고」·「독(毒)을 차고」·「망각(忘却)」·
「묘비명(墓碑銘)」 등 일련의 후기시에서는 그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광복 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천리를 올라온다」 등에서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족항일기에서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학적 충동인 회의와 죽음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의욕으로 충만된 것이 광복 후의 시편들에 나타난
주제의식이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10년 전에 왔을 때는 저 우물 뚜껑이 며칠 전에 만든 것처럼 새것이었는데 세월 따라 검게 변해 있다
그 시대에 이러한 장독대는 아닐 텐데 맨바닥에 저렇게 모아 놓으니 어설퍼보인다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방안의 구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화 없이 그대로이다
뒤뜰에는 옛날에 목련이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변했을까 올라가 본다
뒤뜰에 처음 만나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가 에전에는 없던 새로운 모습이다
이 시는 가우도에도 아래 생가에도 이곳 뒤뜰 세계모란공원에도 세워져 있다
10년 전에 왔을 때는 마당에 모란이 심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한두 그루만 남아 있고
모두 이곳으로 옮겨 심은 것 같다
영랑시인 시비 조형물
봄이 그리워 애틋한 모란꽃 한 송이.....
영랑선생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새겨진 선형과
어우러져 보이지 않는 향기를 세상에 흩날린다
2017년 1월 1일
영랑김윤식 선생상
봄에 오면 많은 모란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음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늘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공원 앞에 보이는 하얀 건물은 모란 공원에 딸린 온실이다
세계모란공원 분수대
서거정
조선 세종 때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이며 세종 2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에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에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해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뤘던 목릉성세의 디딤돌을 이뤘다.
소동파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 8 대가에 속한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형되었는데, 이때 농사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로 이름 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석천 임억령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청백리 박상(朴祥)의 문인으로 금산군수에 재임 중에
동생 임백령(林百齡)이 을사사화에 가담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했다.
다시 등용되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담양부사를 역임했다.
식영정을 중심으로 성산가단을 열어 호남의 사종(辭宗)으로 칭송받았다.
임백령은 을사사화를 주도하여 정난위사공신 1등에 책록 되어 부정부패를 자행했고 사후에 훈작이 삭탈됐다.
식영정(息影亭)은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이던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전라도 담양의 창계천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임억령이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식영정이라 명명했다. 성산(星山)의 언덕과 창계천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식영정, 부용당, 서하당 등이 송림과 배롱나무 등이 아름다운 원림을 구성하고 있어
담양 식영정 일원(潭陽 息影亭 一圓)이라 하며 명승 제57호로 지정됐다.
미국여류시인 로버트 브라이에 대한 자료가 없음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 현구(玄鳩) 시비
한숨에도 불려 갈 듯 보-하니 떠있는
은빛 아지랑이 깨어 흐른 먼 산둘레
구비 구비 놓인 길은 하얗게 빛납니다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헤어진 섬돌에 떨든 햇살도 사라지고
밤빛이 얼음 얼음 드루에 깔리여갑니다
홋홋달른 이 얼골 식혀줄 바람도 없는 것을
님이여 가이없는 나의 마음을 아르십니까
현구(玄鳩) 김현구(金炫耉)
현구(玄鳩) 김현구((金炫耉, 1904. 11. 30 ~ 1950. 10. 3)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에서
태어났다. 1930년 5월 영랑과 용아의 추천으로 『시문학』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 위에 뜬 갈매기」, 「거룩한 봄과 슬픈 봄」, 「적멸(寂滅)」 등 4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현구는
그 뒤 『문예월간(文藝月刊)』과 『문학(文學)』지를 통해 1934년 4월까지 8편의 시를 더 발표하였다
제라늄
시클라멘
목마가렛
유리호프스
시피페루스
사초과인 종려방동사니는 곧게 뻗은 시원한 줄기에 우산이 펼쳐진 모양의 잎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영문명도 'Umbrella Plant'지요. 종류에 따라 줄기의 굵기와 우산의 모양이 조금씩 다릅니다.
종려방동사니는 방동사니, 시페루스, 왕골, 파피루스로 불려 헷갈리는 분들이 있다.
시페루스(Cyperus)라는 학명에서 알 수 있듯이 종려방동사니와 왕골, 파피루스는 모두 이 시페루스 속에
속하는 식물이지요. 위의 세 식물은 모두 시페루스라고 불러도 무방하나 종려방동사니나 왕골을 파피루스로
혼동해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온실 안에도 나라별 모란이 심어져 있었다
로즈메리
사랑채
10년 전에 왔을 때는 초가지붕으로 튼실했는데 다시 이엉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시문학파 3인 상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좌). 정지용(중앙). 박용철(우). 시인상이다
이들이 발행한 시문학은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낭만주의 문에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모태가 되었다
Nana Mouskouri - Pardonne Moi(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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