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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박물관

다산초당을 둘러보고 부근에 있는 다산 박물관으로 왔다 

여전히 짙은 안개로 어둡기만 하다

다산박물관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생활한 곳이자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강진에서 산 다산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다산박물관을 개관하였다.

다산박물관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 강진에 남겨진 흔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이 시대 이 장소에서 다산이 품었을 감성과 지혜에 대해 전달하고자 한다. 강진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만남, 생애, 환생, 흔적 등의 테마에 맞춰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들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전반적인 행적을 통해 다산의 삶의 경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연출되어 있으며, 출생과

성장과정이 그의 가계와 학풍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시 야외를 돌아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다산선생이 제자들과 학문연구를 하는 모습을 재연해 놓았다

정약용 연대표

부패한 세력들이 오히려 득세를 하고 반대파를 숙청을 하는 모순된 사회였다 

하긴 지금 현재도 그러하지만 

다산이 왜 이익의 실학을 따랐는지 알아야겠기에 이익선생을 먼저 소개를 한다

 

이익

(李瀷, 1681년 10월 18일~1763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사상가, 철학자, 실학자,

역사가, 교육자로 조선 영조 때의 남인(南人) 실학자이다.

자는 자신(自新), 호는 (星湖)이며, 본관은 여주이다.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이상의의 증손이고 

대사헌 이하진(李夏鎭)의 아들이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에게는 외6촌 동생이 되나, 생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섬계 이잠(剡溪李潛)에게 수학하다 송곡 이서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숙종 31년(1705년) 증광과에

합격하였으나, 그의 형 이잠(李潛)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홀로 학문 연구에 진력하다 미수 허목과 아버지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 반계 유형원 

등을 사숙하였고, 이후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 근기남인 최대의 학파인 성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영조 3년(1727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으로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여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중환 등을

배출하였고, 그의 학통은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이현일 등으로 이어졌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편찬을

후원하며 자료를 구해주는 등의 도움을 주었다.

남인의 여러 학파들의 마지막 공동 조상으로, 그의 제자들 대에서는 남인 성리학파와 남인 실학파,

공서파와 신서파 등의 여러 계파가 분리되었다. 또한 천주교와 서학의 수용에 개방적이었던 그의

학풍을 둘러싸고 제자들 간에는 성호좌파와 성호우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섬계 이잠(剡溪李潛), 송곡 이서우(松谷李瑞雨)의 문인이다. 경기도 출신.

 

이익의 사상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통에 뿌리를 두며 한강 정구와 허목, 윤휴, 윤선도, 홍우원, 

이서우, 이하진, 이잠 등의 사상을 계승, 집대성하여 남인 성리학과 남인 실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 중 남인 성리학자와 남인 실학자가 분리되었으며, 주로 근기남인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그의 제자들 대에서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근기 남인이 정조 사후 천주교

 문제로 몰락하게 되면서 흥선대원군 집권 전까지 빛을 보지 못하였다

 

다산의 가계도 

다산의 수학과 관료생활

서양문물을 접하다

다산과 천주교

 

정재원(丁載遠)의 넷째아들로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한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미 17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되기 시작한 그는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李壁)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 을사 추죠 적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취한다.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한다. 더군다나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西學徒)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疎)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해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한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의 '여유당'이라는 자호(自號)로써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정조의 총애를 받아 한강의 배달 와 수원화성을 설계했다

화성 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 조선 정조 재위 18년(1794) 1월부터 20년(1796) 8월까지 총 2년 8개월간 수원화성

축성하며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으로 이루어졌고, 총 10권 10 책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국립중앙박물관연세대학교 박물관 등에 소장되었다

다산의 거중기 발명

규장각의 초계문신시절

 

초계문신제도

초계문신제는 조선 전기의 사가독서제를 이어받은 것으로, 37세 이하의 참상·참하의 당하문신 중 승문원의

분관인 자를 뽑아 규장각에서 교육시키고 40세에 졸업시키는 제도이다.
1781년에 처음 시행되었고, 1784년 <규장각지>가 완성될 때 제도적으로 정착했다.

교육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초계문신들은 신분 및 경제적 보장 조처가 취해졌고, 잡무도 면제되었으며,

왕이 직접 이들을 지도 편달하는 친림의 행사도 있었다. 정조는 이 제도의 시행을 통해 연소한 문신들을

재교육함으로써 인재를 양성하고, 나아가 자신의 친위세력을 배출하여 시파·벽파의 당파나 사색당파의

타파를 기도했으나, 후자의 목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조대의 문화정책의 수행이나

인재의 양성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그 시절 백성을 위하고 지극히 민주적인 실학파였다

정조어필첩

추사의 아버지 노경에게 정조가 보낸 7통의 편지 

정조 장례식 광경

불의가 의를 지배하는 세상 썩어빠진 관료들이 의로운 사람들을 이렇게 구박하고 

폄하했으니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지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 시대를 알 것 같다

차음 사의재로 들었다가 보은산방으로 또다시 이학래의 집으로 다음에는 초당으로

18년 동안 강진에서 보냈다

목민심서 

사의재

보은산방 

다산초당

초의선사(다산초당도) 백운첩조선 1812년 지본담채 실제 작품 크기 27X19.5cm 개인소장 복재품

1912년 음력 9월 12일에 다산 정약용 선생과 초의선사가 월출산을 구경하고 인근의 백운동에서

하룻밤 머문 뒤 만든 시화첩에 실린 그림이다

초의선사는 백운동도와 우열을 비교할 수 있도록 시화첩 맨 끝장에 다산초당 전경을  그린 

다산초당도를 수록하였다

강진에서 다산이 그린 고향 쇠네

다산간찰

함께 차를 즐기며 학문적 토론을 벌였던 승려 혜장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다산 정약용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는 편지다  살아생전 혜장은 다산을 스승처럼 따랐고 이를 인연으로 

다산에게 불가의 제자가 생겼다

제 만 일 암지

 

다산시첩

신지도 지방에서 말하는 처녀바람의 유래에 대한 글과 1816년에 부임한 

해남현감에 대한 시가 기록되어 있다

윤정기 행초 병풍 

방산 윤정기의 친필 행초로시를 쓴 8폭 병풍

열상산수도 

연한 떡갈과 살찐 오동나무 잎이 막 펼쳤는 데고 목 스무 그루만이 쓸쓸하네

범관의 붓놀림과 서희의 먹으로 하찮은 산수경치를 잘도 묘사하였네-열 초-

아들 정학연 학유간찰 

부인 홍 씨가 보낸 서찰

다산이 시집간 외동딸의 행복을 위해 그린 하피첩 시화 매화병제도이다

강진 유배시절 아내가 편지와 함께 빛바랜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시집올 때 붉고 선명했던 치마는 빛바랜 채 노년의 노을빛만 남았다

가족에 대한 뼈가 타는 그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네 폭은 두 아들에게남은 치마는 가리개를 만들어 외동딸에게 보냈다

아들딸에게 어버이의 은택을 이렇게라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아들딸에게 에둘러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비껴 나온 가지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다

한 마리는 한 가지에 몸을 포개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부부는 먼 곳을 함께 바라보며 다정하게 살아야 한다는 딸에 대한 애틋한 메시지였으리라.

다산은 이 매조도 밑에 행서로 시 한 수를 쓰고 협서로 다음과 같이 썼다

다산 정약용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의 외손자이다.

다산의 자식사랑의 결정체 하피첩과 매화병제도

애절양

다산학단의 면면들 

가족과 제자들과의 인연 

7세 되던 해에'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산(山)'이라는 시를 써서 주위를 놀라게 했고, 14-15세 때는 이미 육경사서와 제자백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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