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곡 마애불상군을 돌아보고 불곡 마애석불좌상으로 이동을 한다(12/1)

주차장 언덕에는 아스타 국화 같은데 시들시들 힘이 없어 보인다


소국도 이제 시들시들 볼품이 없어 보인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이정표를 보니 400m 위에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다

제1 사지와 제2 사지로 나누어졌 있는 것으로 봐서 불곡사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나 보다
200여 m 오르니 불곡 제2사지터가 나온다


300여 m쯤 오르니 신우대 밭이 나오고 터널이다

대밭터널을 지나니 이러한 데크계단이 나온다
계단 위에서 조금 오르니 감실에 있는 부처가 나온다

보물 제198호 부처골 감실석불좌상, 흔히 감실 부처라 불립니다. 남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부처상이다.
고신라에 만들어져서 요즘 보는 일반적인 부처상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고 바위를 깎아서 감 실을 만들고
그 안에 일체형을 부처상을 새겨 독특한 모습이다.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慶州南山佛谷石佛坐像) 보물 제198호.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인왕동(仁王洞) 남산 동쪽 기슭인 부처골〔佛谷〕의 감실(龕室) 안에 새겨진 신라시대의
석불좌상. 높이 1.42m. 커다란 바위면에 깊이 0.6m의 감실을 파고 마애불상을 새긴 것으로, 주위에 흩어진 기와와
가구(架構)의 흔적으로 보아 목조로 된 전실(前室)이 있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가 낮게 표현되었으며 고개를 약간 숙여 조용하고 선정적(禪定的)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양감이 알맞게 표현된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하여 한결 온화한 느낌이 든다.
양어깨는 곧고 반듯하지만 부드럽게 곡선 처리를 하고 있으며, 통견(通肩)의 법의는 비교적 얇아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무릎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은 대좌 아래까지 길게 덮고 있으며 좌우대칭으로? 형의 주름이 잡혀 있다.
이 불상에서 풍기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감각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신라 말인 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흔히 '경주 할매 부처', '아주머니 부처'라고 친근하게 많이 부른다
6~7세기 경에 경주시 남산 북쪽 기슭에 감실(龕室)을 파고 만든 신라의 석조불상으로, 불감은 높이 약 3 m,
너비 3.8 m 바위 면에 깊이 1 m, 높이 1.42 m 규모로 단면이 삼각형에 가깝다. 한반도에서 감실을 파고
석조를 고부조로 새긴 최초의 불상이다.
이 석불좌상은 높이 3m, 폭 4m 정도 되는 바위에 감 실을 파고 그 안에 고부조로 새긴 것인데, 감 실은 입구가
아치형으로 되었고 석굴의 형태를 취했다. 단석산의 석굴사원, 제2석굴암이라 부르는 군위 삼존불과 함께
신라시대 석굴 양식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나무위크에서



'고대한국의 여신신앙과 현존여신상에 대해(古代韓の女神信仰と現存女神像について)' 논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일종의 여신상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여신상인 교토 마쯔오타이샤(松尾大社)의 목조여신좌상과 완전히
똑같은 도상을 가지고 있으며,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과거 신라에서 믿었던 삼산신은 호국신인 동시에 모두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산신뿐 아니라 다른 산악신들도 전부 여신이었는데, 삼국유사 선도성모(仙挑聖母)조를 보면 소사(小祀)의
산신이 “신모(神母)가 이 산에 오래 살고 계시며 나라를 진우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악 산신인 신모 또한
호국여신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 밖에도 치술령신인 치술신모, 영축산신인 변재천녀, 지리산신인 성모천왕(로고할멈),
가야산신인 정견모주 등이 모두 여신이었다. 이에 따라 초창기 신라의 성스러운산 중에 하나인 남산에 상을 처음
조성할 때 남성불보다 먼저 여신상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왕즉불 사상에 의거해서 실제 선덕여왕의 얼굴이 본존불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 나무위크에서

포석정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순환로 816 (배동)에 위치한 사적지. 공식 명칭은 '경주 포석정지'로 통일신라의 의례 및 연회
장소로 이용되었던 정자(亭子) '포석정'이 위치했던 터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 12월, 경주에 소재한 많은 문화유산과 함께 경주역사유적지구의 일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총 5개 지구로 나뉘는데 '경주 포석정지'의 경우 '남산 지구'에 속한다. 니무위크에서

조성 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주로 통일신라 시대의 기록에 등장한다. 관련 기록은 극히 부족하지만,
묘사에 따르면 대체로 국왕들이 유흥을 즐기던 놀이 공간이었던 듯하다.
헌강왕 때 기록에 다음과 같이 처음 언급되어 남북국시대인 8-9세기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이 홀로
보았다. 어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 스스로가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祥審)
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여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 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포함한 여러 기록에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의 왕 견훤이 경주를 급습해 올 당시에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고 전해지며 견훤에게 붙잡혀 자결을 강요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렇지 않아도 국세가 기울어가던 신라의 망국은 사실상 확정되어 버렸다.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순왕이 이후 고려의 왕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신라] 군사를 침범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을 공격해 들어갔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땅을
기면서 노복이 되기를 구걸했으나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공사(公私)의 재물 모두 빼앗고, 궁궐로 들어가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군대진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간음토록 내버려두었다.
왕의 친척 동생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나무위크에서

보통 포석정이라고 하면 포어(鮑魚)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석구(石溝)를 말하지만 사실 이 석구는 포석정의
한 가지 부속 기물일 뿐이다. 일부 네티즌은 구덩이가 무슨 연회 장소냐며 말하지만, 본래 이 위에 포석정의
본 건물이 있었는데 뒤에 없어진 것이다.
포석정의 석구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 위한 용도이다. 유상곡수연은 4세기 위진남북조시대의 서예가
왕희지에서 비롯됐다. 물이 흐르는 수로의 첫 부분에 술이 담긴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수로를 타고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구조인데, 수로를 기가 막히게 설계하여 술잔이 떠내려가는 중에도 기울어지거나 부딪히지 않았다 한다.
술잔이 떠내려가는 동안 시를 짓고 만약 못 지으면 벌주 3잔을 마시는 식으로 노는 것이 유상곡수연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수로를 물길을 꼬고 수로의 깊이까지 계산하여 설계하여 술잔이 오래 떠내려가게 하여 시를 지을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석굴암과 함께 통일신라 석조 건축 기술의 정밀함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그런데 술잔을 띄우는 게 아니라, 수로에다가 물 대신 술을 흘려보내고 그걸 떠다 먹는 방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에 철거 후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돌은 새로 보충하는 등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은 잃어버렸다고 한다. 거기에 위 사진 속에도 보이는 나무가 자라면서 돌을 건드려
미세하게 밀려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므로 지금은 물이 흐르고 술잔을 띄워도 끝까지 흔들림 없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크기를 다양하게 다듬은 돌 63개가 사용됐고 크기는 길이 10.3 m, 폭 7 m 정도이고, 물길 길이는 약 22m이다.
물길의 폭은 최소 24 cm에서 최대 40 cm로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30 cm 정도이다. 깊이도 평균적으로 22 cm
정도이며 물길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 cm 정도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각 위치마다 속도가 천차만별이다.
뒷산에서 물을 받아 토하는 거북 모양 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1871-73년 사이에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갔다고
전할 뿐 소재를 모른다. 만약 정말로 물을 토하는 거북이가 있었다면 곧 그 거북이 돌 밑에 배수로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무위크에서

포석정을 둘러싸고 있는 느티나무(팽나무로 보인다)는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목만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다

포석정 입구에 매표소가 있으나 겨울이라 찾는 관광객이 많지 않아 실내에서만 매표를 한다
경주에는 어느 유적지를 가던 소나무 숲은 조성이 되어 있다

포석계 포석곡 1 사지의 석재 유구


신라왕경도

후삼국시대의 견훤과 궁예 마의태자를 만화형식으로 엮어놨다

포석정에서 바라본 남산줄기
서울에 또 올라가는데 추워서 걱정입니다 다녀와서 찾아보릴께요
백미현 - 눈이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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