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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친구와 헤어져 수성동계곡을 돌아보고 걸어 내려와 세종마을과 음식문화거리를 둘러봤는데도 

오후 5시에 모임시간 맞추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경복궁 돌담길을 걸으며 경복궁 경회루가 있는 서문으로 입장 경복궁을 대충 돌아본다 (12/28)

경복궁 돌담길 

경복궁서문

화장실에 다녀와 청와대 쪽으로 한바퀴 돌으려 했으나 마음이 바뀌어 경복궁을 돌아보기로 한다

못에 비친 그림자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회루. 여기에는 특별한 과학이 숨어있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연못 전체를 순환하게 되어 있어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경회루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세 곳이 있다. 하나는 북쪽 호안에 조각된 용머리로, 그 입을 통해 물이 들어온다.

동쪽 돌다리 밑으로또 다른 물줄기가 흘러들어온다. 북쪽 연못 바닥에서도 지하수가 솟아 나온다.

못의 바닥이 약간 기울어져 있어, 강제순환 장치 없이도 연못을 맑고, 잔잔한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 근정전 서편에 위치한 누각으로,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 행사에 사용하던 건물이다. 연못 안에 석재 기단부, 정면 7칸, 측면 5칸의

목조 중루(重樓)와 팔작지붕을 갖춘 무출목 이익공계(二翼工系)의 구조이다. 기둥 상부 주두(柱枓) 아래

날개처럼 생긴 공포 두 개를 두고 그 위에 보가 얹히도록 한 양식이다. 단일 건물로서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큰 전통 목조 건축물이기도 하다.
그 풍경은 경복궁 안에서도 백미로 꼽혀 만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으로 나오기도 한 상징적 건물이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해외 어느 일간지에서는 이 경회루가 물에 가라앉은 그림을 기사로 내면서 '한국 경제

침몰'이라는 글귀를 달기도 했다.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에 달하는 사각형 연못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당시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이 건설을 맡아 8개월 만에 경회루를 완공했다. 당시의 경회루는 현재의 경회루보다

크기는 더 작았으나 더 호화로웠으며, 3층 높이의 중층 지붕 전각이었다.

 1474년(성종 5년) 3월과 8월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는데, 이때 경회루를 헐고 다시 지으면서 돌기둥에

아름답게 꽃과 용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유홍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건물을 짓는데 8개월 걸렸다고 하며 총면적이 298평 300평에서 2평이 모자란다고

하며 천명이 잔치를 벌였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은 네모나고 안쪽 돌기둥은 둥근데, 이는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圜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체 기둥은 총 48개로 바깥기둥이 24개 안쪽 기둥이 24개인데, 이는 24 개절과 24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회루 주위에는 네모난 인공 연못과 둥근 모양의 섬 2개를 만들었는데, 이 또한 천원지방을

형상한 것이다.

거기다가 연못 주변에 담장을 둘러서 일반인들이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훼손했고

국가유산청에서 2000년대에 북쪽과 동쪽 담장을 복원했으나 서쪽과 남쪽 담장은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복원하지 않았다.

각 지붕 끝에는 잡상이 11개 올려져 있다. 이는 옆에 위치한 법전인 근정전에 올려진 잡상 7개보다 더 많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근정전에는 잡상 11개가 올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7개만 있다

 

저 뒤에 보이는 정자는 하향정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낚시를 즐겼던 곳이며 마지막목수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 배희한이 건축했다고 한다 광복 후에 지어진 정자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되었다.

이후 약 300년 뒤인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세워졌다.

이때 경회루는 단층 지붕으로 바뀌고 누각을 지탱하는 용 조각 돌기둥이 무늬 없는 것들로 바뀌어 세워졌으며,

크기 자체는 더 커지는 변화가 생겼다.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못에 청동 용 2마리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 연못 공사를 위해 연못의 물을

뺐을 때 하향정 근처에서 1마리가 발견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돈이나 물건 따위를 함부로 마구 써 버린다는 단어 '흥청망청'이 경회루와 연관 있다.

조선 시대 연산군이 '흥청'이라는 기생들을 모아놓고 경회루에서 술잔치를 벌이던 것이 유래이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 정전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경복궁에 입궐했을 때 근정문을 통해 들어가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며, 좌측에는 수정전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궁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정도전이 《서경》(書經)의 구절을 이용하며 왕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勤)

잘 다스려진다(政)"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유홍준 교수의 말에 따르면 근정전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은 근정전 남동쪽 행각(行閣) 모퉁이라고 한다. 

 서쪽의 인왕산과 북쪽의 북악산의 스카이 라인이 근정전의 지붕 선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용상 뒤에는 용과 연꽃문양의 장식을 한 삼절곡병이 둘러져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 해와 달

다섯 개의 봉우리(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와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으로 나라안이 두루 평화롭게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일월오봉도는 왕 그 차체를 의미하며 왕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든 

따라다니는데 김건희가 여기에 앉았다니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다

특이한 건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조각의 발톱이다.

발톱이 7개인데 당시 중국의 질서에서 왕세자의 용은 발가락이 3개, 왕(제후)과 황태자는 4개, 황제(천자)는

5개로 규정했다.

따라서 발톱이 7개인 용은 황제보다 높음을 뜻한다. 소심한 반항 7 조룡이 언제 나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경복궁을 처음 만들 때부터 있었다는 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만들었다는 설 정도가 있다.

이 중에서도 좀 더 지지받는 쪽은 후자인 흥선대원군설. 중국 사신이 왕을 알현할 때 기본적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기 때문에 천장의 용을 볼 일이 없어서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으리란 것이다.

드므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써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함으로써

화재 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

강녕전

경복궁의 건물로,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도 사람이므로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했다.

강녕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쉽게 말해 왕의 이다.
편전인 사정 전의 북쪽중궁전인 교태전의 남쪽에 있다.

조선 초 재상이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강녕(康寧)'은 말 그대로 '편안함'을 뜻한다.서경(書經)》 - 〈홍범〉편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원칙

나오는데, 거기서 언급한 다섯 가지 복(오복: 五福)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에서 따왔다.

 

부속 건물로 연생 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연길당(延吉堂)응지당(膺祉堂)이 있다. 원래 각 건물과 강녕전

본전을 연결하는 복도각이 존재했었는데 그 흔적이 측면 양쪽 가장자리 툇간 부분에 창문이 아닌 이 달려있는

것이다. 처음엔 창호문과 기와를 갖춘 일반적인 건물 형태로 있었는데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화재로 고종이 복도각의 모습을 만 피할 수 있게끔 바꾸라고 지시하면서 지붕도  지붕으로 바뀌고 벽체

사라졌다. 1876년(고종 13년) 화재 때 없어진 뒤 1888년(고종 25년) 강녕전과 함께 재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복도각은 다시 복구되지 못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강녕전을 복원할 때도 지어지지

못한 채 현재까지 이어진다

평상시엔 의 침전으로 쓰였지만 이따금씩 주요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왕비가 신하들 및 , 외명부와 왕족들에게 조회를 받는다던가, 궁중 잔치라던가, 또는 왕실 혼례의 일부 의식 등

여러 행사들이 이곳에서 많이 열렸다. 이럴 경우, 대청에 앉을자리를 마련하고 월대까지 한 공간으로 묶어

활용했으며 좌, 우 온돌방은 행사 핵심 인물들의 준비 공간으로 사용했다. 1890년대 고종 재위 중반에 서양과 

교류를 시작하던 시기엔 각 나라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했다

왕과 왕비의 침전에 있는 우물, 어정(御井)  
어정에 대한 기록은 태종 때에 처음 등장힌다.

기록을 보면 경복궁에는 모두 24 곳에 우물이 있었는데, 음식 짓는 수라간 우물, 빨래하는 세답방 우물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매몰되었다. 임금에게 올릴 물 어수는 반드시 어정에서 길어야 했으며 수부는 궁중에서 어정의 물을 길어

어수를 바치던 주방(酒房)의 종이다. 태종 때에는 어수 바치는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내시를 벌주었다고 한다.

강녕전 서쪽에 있는 왕의 어정은 두터운 돌 뚜껑을 씌운 것으로 보아 평소에 식용수로 쓰였을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교태전

경복궁의 건물로 왕비의 정식 침전, 즉 중궁전이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의 북쪽에 있다. 광화문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심축의 제일 끝을 장식하는 건물이다.
현판 글씨는 고종의 사촌형이자 문신인 완림 군 이재원(1831 ~ 1891)이 썼다. 1994년에 옛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름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11괘'인 '태괘(泰卦)'의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했다.
태괘는 위에 음(陰)을 상징하는 곤(坤, 땅), 아래에 양(陽)을 상징하는 건(乾, 하늘)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내려가고 올라가면서 만나 교통(交通)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남자, 양)과 왕비(여자, 음)가 서로 잘 지내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교태전은 원래 중궁전으로 기능했던 곳이 아니다. 조선 초기에 처음 지을 당시에는 임금과 신하가 만나 정사를

돌보고 유희를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저기서 말하는 음양을 여성, 남성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신하와

군주로 풀이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나무위크에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25)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는데,

1876년 다시 불탄 것을 1888년 재건했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강제로 옮겨온 석탑·

부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교태전은 뒤뜰의 아미산에 남아 있는 굴뚝에 새겨진 십장생·매난국죽과 길상의 무늬로

보아 150여 채의 궁궐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1920년 당시의 사진과 평면도가 실려 있어 원형추정이 가능하다.

자경전은 대비가 사는 곳이다. 구중궁궐 한복판에서 겉은 화려해 보여도 속은 많이 외로웠을, 더군다나

(별 일이 없는 한) 평생 한 곳에서 살아야 했던 대비를 위로하려는 뜻인지 자경전의 과 굴뚝은 굉장히 아름답다.

그것도 그냥 예쁘게 만든 게 아닌, 상서로운 기운과 장수를 상징하는 문양들로 조성하여 깊은 의미까지 담았다.

 

자경전 담장은 꽃담으로 유명하다.
사괴석 3단 위에 벽체가 있고 그 위에 기와가 올려져 있는 전형적인 궁궐 담장의 모습이다. 하지만 벽체는 주황색

벽돌과 삼화토로 마감하여 따뜻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이 벽돌 색은 서울특별시에서 '꽃담황토색'이라 하여

'서울의 10대 대표 색' 중 하나로 꼽아 현재 서울택시의 색으로 쓰인다.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친근해진 모양이다.

자경전

경복궁의 대비전 중 하나이다.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 씨가 머물던 곳이다. 위 설명문 참고
위치는 교태전의 동북쪽이며 남향을 하고 있다.
이름은 정조가 혜경궁 홍 씨를 위해 지었던 창경궁 자경전에서 따왔다. '자경(慈慶)'이란 말 자체는 '자친(慈親,

 (왕의) 어머니)이 복(慶)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경복궁에서 '전(殿)'이 붙은 침소 중 고종 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했다.

 천장은 우물 반자로 막고 단청을 모로 단청으로 칠하여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을 뽐냈다.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의 협칸과 측면의

칸들을 모두 마루로, 뒷면의 협칸은 쪽방으로 구성했다. 서쪽 방의 경우 대청 쪽의 2칸을, 동쪽 방의 경우 1칸을

남, 북 축으로 뚫어서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서쪽과 동쪽의 끝 칸은 누마루로 조성했으며 서쪽 누마루

후술 할 부속건물 복안당과, 동쪽 누마루는 청연루와 통한다

景福宮 淸讌樓(사진 우측)
자경전 동쪽에 딸려 있는 누마루이다. 이름은 '맑고(淸) 한가함(讌)' 또는 '조촐한(淸) 연회(讌)'라는 뜻이다.

원래 세종 때에 지었으나 그때는 자미당과 나란히 있었던 누각의 모습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족들의 부인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도 하고 인종이 이곳에서 승하하는 등의 활동들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옛 자미당 터에 자경전을 크게 지으면서

청연루는 자경전의 누마루가 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자경전과 같다.

국립민속박물관

청와대 뒷산 북악산

건청궁으로 가는 향원정옆 소나무 

건청궁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내탕금으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고종 10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또 명성황후가 교태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공간을 원해서 지었다는 의견도 있다.

고종은 이곳을 처소로 주로 사용했으며, 양반가 저택의 형식으로 세운 건물이어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등이 설치된 곳이다 내용은 향원정에서 다시 기록을 한다

또한, 건청궁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고종

 왕실이 경복궁을 떠나자 건청궁은 빈 건물이 되었다. 

1909년(융희 3년) 이후 철거되었다가 훗날 복원수리 작업을 거쳐서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어 오늘에 이른다.

 長安堂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북서쪽에는 침방인 정화당(正化堂)이 남서쪽에는 누마루인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가 붙어 있다

장안당 서쪽의 누마루 추수부용루

坤寧閤
역사는 장안당과 같다. 북동쪽에 침방인 정시합(正始閤)이 서쪽의 장안당과 연결되는 복도가 붙어있고 동쪽의

 누마루는 동쪽에 사실항루(四時香樓), 남쪽에 옥호루(玉壺樓) 현판이 붙어있다. 

명성황후 민 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에게 명성황후 민 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동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황후는 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 이곳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당했다.

을미사변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45세였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복원할 때 현판이 원형과 달라 논란이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원본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인데, 복원한 모습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바뀌었다.

곤녕합동쪽의 누마루 (사시향루)

곤녕합 뒤에 있는 침실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경관,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부 일본인 낭인들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 궁중 인사들을

살해한 테러 사건.

국내 학계의 다수 견해는 을미사변의 배후가 이토 히로부미 당시 일본 총리 내각의 각료 및 원로들이었고

미우라 고로 직전에 조선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으로 러시아 제국을 통해 일본 제국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고종의 가장 큰 조력자인 명성황후

살해하고 다시 친일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해 

을미의병이 발발하고 건청궁 내에서 감시받으며 감금 상태였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을미사변을 조선의 내부 분쟁 사건이고 살해범은 우범선으로 꾸미려 했지만 미군

다이 대령과 러시아 건축 기사 사바틴 등 외국인들이 현장을 목격하고 공사관과 외신에 사실을 알렸고 각국의

공사관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우범선이나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장교와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했음이

밝혀졌다

건청궁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가설되었다.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7년 만인 1887년에 건청궁에 전등을 달고 불을 밝혔다. 동양에서 최초이다.

일본이나 중국보다도 2년이나 앞섰다.

향원정

향원(香遠)' 뜻은 '향기(香)가 멀리(遠) 간다'로, 북송 시기 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香遠益淸)'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조선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년)에 경복궁 후원에 지은 취로정(翠露亭)이 향원정 자리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재 향원정은 경복궁 중건 이후에 처음 세운 것이지만,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한때 1873년(고종 10년)에

 건청궁과 같이 건립했다는 설이 유력했었다. 그러나 하술 할 2017년 ~ 2021년 보수 공사 때 문화재청에서 목재

연륜 연대 조사를 통해 1881년(고종 18년)과 1884년(고종 21년) 두 번에 걸쳐 벌채한 목재를 사용한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현재는 건립 시기를 1885년(고종 22년) 안팎으로 추정한다.
이후 과 왕실 가족들이 휴식처로 활용했다.

취향교,
취향교는 건청궁 영역과 연못 안에 있는 향원정을 연결하기 위한 둥근 나무다리이다. 
원래 향원정 북쪽에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자 1953년 향원정 남쪽으로 옮겨 세웠다. 2017년 발굴조사를
거쳐 취향교 원래의 위치를 확인한 후 남쪽 다리는 철거하고, 사진 등을 참고하여 2019년 복원하였다.

 향원지
향원정의 연못이다. 역사는 향원정과 같다.
천 원 지방 사상에 따라 사각형으로 지었으나 가장자리 부분만 둥글게 마무리했다.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고

그 위에 향원정 건물이 들어서있다. 넓이 5,438㎡로, 수심은 평균 0.7m, 제일 깊은 곳은 1.1m이다

 

한반도 최초의 스케이트 공간이기도 하다.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조선과 이웃나라들》

에 따르면, 1894년(고종 31년) 겨울에, 서양 선교사들이 얼어붙은 향원지 연못에서 피겨 스케이팅 시연회를 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했는데 고종은 선교사들이 미끄러질 때마다 엄청 웃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때 스케이트를 ‘얼음발굿’ ‘삥예(氷藝)’ ‘빙족희(氷足戱)’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이성끼리 서로 손을 잡았다 놨다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으나 얼음판 위에 놓인 의자를 훌쩍 뛰어넘는

곡예를 부릴 때는 어린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몇 번 더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했으며 1895년 1월에는 아예 두 차례에 걸쳐 스케이트 파티를 열었는데

 서울에 살던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모였다.

이곳은 아시아 최초로 에디슨식 전기 가로등이 켜진 곳이다. 

1882년에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보냈는데, 이때 미국을 다녀온 보빙사

미국은 밤이 대낮 같다고 고했다.

 

이는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미국 대도시 전구로 된 가로등이 설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빨리 미국에 연락해 전기 가로등을 설치하라고 명했고, 이에 1887년 3월 6일에 아시아 최초로 에디슨전기회사

직원들이 조선에 와서 발전기로 전력을 얻는 전기 가로등을 건청궁에 설치했다. 이때 경복궁에 설치된 가로등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한성을 근대도시로 바꾸는 한성개조사업을 진행할 때 거리에 가로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총 설치 비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만 4525달러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재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이 가로등의 발전기는 향원정의 연못 물을 끌어와 증기로 발전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발전기에서 배출된 고온의

발전용수가 향원정 연못에 배출되자 그곳에 살던 비단잉어 등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사람들이 증어망국(蒸魚亡國)이라며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가로등의 불빛이 켜졌다

꺼졌기를 반복하는 통에 '건달불'이라는 오명도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기록도 있는 반면, 하인들이

온갖 핑계를 대어 가로등 근처를 지나가면서 전기를 구경했다고도 한다.

열상진원샘

우물의 형태는 천 원 지방을 따라 만들었다.

뚜껑 옆면에 보면 열상진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고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열상이란 열수의 윗 쪽이라는 말로 열수는 곧 한강이었으니

열상진원이란 한강의 발원지라는 뜻이 된다.

한강의 발원지는 물론 태백 검룡소이지만

궁궐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

이 우물을 한강의 발원지 샘이라고 한 것이란다.

샘은 총 3층 계단식이다. 솟아난 물이 2번 직각으로 꺾여 향원지로 들어가게 했고, 특히 연못과 만나는 부분은,

동그란 홈에 물이 고이게 하여 향원지 물 높이보다 아래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한 번에 물이

내려올 때 생길 수 있는 연못의 파동을 최대한 줄여 향원지의 물을 잔잔하게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경복궁에 있는 중국풍 전각이다. 어진과 도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의 동남쪽, 건청궁의 서쪽에 있다.
건물 3채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에 팔우정(八隅亭), 가운데에 집옥재(集玉齋) 본채, 그리고 동쪽에 협길당(協吉堂)이

있으며, 전각끼리 복도로 붙어있다. 집옥재 본채와 달리 팔우정과 협길당은 전통 한국 양식이다.
이름은 ‘(玉)과 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集)’는 뜻이다. 현판은 중국 북송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미불의 글씨를 조합하여

만들었다. 전에 왔을 때는 내부를 다 돌아봤으나 오늘은 외부만 보고 지나친다

고종은 이곳을 어진을 모시고, 을 보관하며,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서 사용했다.

 고종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서양 문물과 관련된 책을 청나라에서 대량으로 구입했다.

고종은 조선 고유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는 중국, 일본, 서양에서 출판한 다양한 서적과 지도를 들여와 약 4만여 권을 경복궁 집옥재에 수장하고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혀갔다.

 

이러한 서적의 수집과 유통경로는 영선사 등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나 사절단을 통해, 일본을 다녀왔던 조사

시찰단에 의해, 박문국을 경유한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수집되었는데, 국제적 동향과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알려주는 인문학 중심의 교양서를 비롯하여 자연현상을 폭넓게 배울 수 있는 자연과학 분야의 서적까지 다양한

학문 범주에 속하는 서적들이 망라되어 있다.

 

고종의 서적 수집은 1880년대 개화 정책 추진의 실무에 기초자료가 되었음은 물론, 대한제국기에 가서도 사회적,

교육적으로 활용됨으로써 지식인들이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는데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복궁은 내국인 보다 외국관광객들이 더 많다 

저녁 모임시간에 맞추다 보니 세세히 다 돌아보지 못하고 대충 한 바퀴 돌아보았다 

수성동계곡에서부터 걸어 내려와 경복궁을 거처 광화문전철역까지 만팔천보를 걸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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