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靑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다.
922년(고려 태조 5)에 도선(道詵) 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하여 사호를 청룡사라 하였다.
1036년(정종 2년)에 만선 비구니스님이 퇴락한 절을 창건 이후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하여 10차의 중창 역사를 갖고 있다. 1923년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불리게 되었고 1950년대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며 1973년에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업원 터 비각 현판 전봉후암어천만 이란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라라는 의미이다
비각안 비석에는 앞면에 정업원구기 뒷면에는 정업원 옛 터 신묘년 9월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라는 라는 내용으로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정업원 터는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비(妃)인 정순왕후가 단종의 죽음 이후 평생을 보냈던 곳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하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각 옆면의 모습
정업원 터에는 정순왕후의 애달픈 삶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있다.
이 비석은 조선 영조 47년(1771)에 영조가 직접 세운 것으로, 비문 일부와 비각 현판의 글씨를 영조가 직접
썼다고 한다. 특히 비석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는 뜻의 '음체서(飮涕書)'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영조가 정순왕후의 비극적인 삶에 깊이 공감했음을 보여준다. 비각 현판에는 '앞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년이나 영원하리라(前峯後巖於千萬年)'라는 글이 쓰여 있어, 정순왕후와 단종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조선의 왕 자리는 언제나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 찬 주위의 권력다툼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조카의 보위를 노렸다. 문종은 집현전의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의 신하에게도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물거품처럼 허사가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 김종서를
살해한 뒤 영의정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의정 정분 등을 유배시킨다.
이 모든 일은 왕명으로 진행됐으나 단종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문종의 동생(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된 뒤 교동도로 옮겨져 죽임을 당하고 만다.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에
단종은 2년 뒤인 1455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고 수양대군(세조)이 조선 7대 왕에 오른다.
정순왕후는 사정 전을 나와 수강궁에 머문다. 왕대비의 그때 나이는 16세였다

슬픈 역사는 계속됐다.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됐고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다시 숙부인 금성대군(수양대군 동생)이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에서 대역죄인으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추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왕대비에서 대역죄인으로 몰린 정순왕후도 더 이상 수강궁에 머물 신세도 못 되어 삼각산 청룡사로 오게 됐다.
평소 궁에서도 정업원(淨業院-궁 안에 있는 법당으로 처음에는 내불당이라 불렀으나 유생들의 항의에 의해 신(身)
구(口)의(意) 삼업을 청정히 한다는 의미)에 가서 부처님께 예불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죄업을 참회했던 정순왕후는
궁 밖으로 나서면서 출가를 결심했다.
“나는 청룡사로 가련다. 너희들도 나를 따르겠느냐.” “예. 저희들도 마마님과 함께 하겠나이다.” 함께 동행했던 시녀
3명과 후궁 2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른 새벽 궁을 나선 이들은 총총걸음으로 청룡사로 향했다.
정순왕후 일행이 먼저 궁을 떠나 청룡사에 당도하자 점심 나절이 넘었다. 절에서는 벌써 왕후를 맞을 준비를 해 놓고
우화루에 머물 처소를 마련해 놓았다. 어수선했지만 정순왕후의 마음은 편했다. “이 생을 청룡사에서 부처님을
시봉 하며 마감하리라….”
저녁나절이 되자 단종이 궁을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정순왕후는 담담했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화루는 정순왕후와 단종이 영월로 귀향 가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다

마음을 추스르고자 경내를 거닐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울렸다.
“마마. 상왕전하가 도착하였나 보옵니다.” 초췌한 모습을 한 단종이 청룡사로 들어왔다. 날개가 부러진 새같이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었고 곧장 왕후에게 쓰러질 듯했다. “상왕전하. 오셨사옵니까. 어서 드시지요.”
단종이 입을 열었다. “그럴 시간이 없소. 내 영월이라는 곳으로 떠나야 하는 처지라 부인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가려고 이리 들렸소.” 마음 한편이 쓰라리며 목젖에서 신물이 넘어왔다.
정순왕후는 이것을 참기 위해 마른침을 삼키면서 말을 건넸다. “그래도 밤이 이슥해지는데 하룻밤을 지내시고
가심이 어떠할는지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단종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부인의 간곡한 청이었다.
“그럽시다.”
방안에 든 단종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의 편에 서 주었던 숙부 금성대군과 안평대군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무서운 생각이 뇌리에 자꾸 파고들었다.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부인의
흐느낌이 어깨에 와닿았다. “부인. 미안하오.”
다음날 새벽 일찍 단종 일행은 떠날 채비를 했다. 우화루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정순왕후는 주변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마지막 이별인사를 나눴다.
“상왕전하.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어 기력을 되찾으시옵소서.”
“내 그리 하리다. 비록 궁을 떠나는 몸이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리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마을 다리까지 배웅했다. 후세에 그 다리는 ‘영원히 이별을 나눈 다리’라 하여 영리교(永離橋)라 불렀고
다시 ‘영미다리’로 불렸다고 한다.
단종을 떠나보낸 정순왕후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삭발염의를 했다. 함께 왔던 시녀 3명과 2명의
후궁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시녀는 희한 지심 계지라는 법명을 각각 받았고 정순왕후의 상좌가 되었다.
후궁 김 씨는 원경, 후궁 권 씨는 혜경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왕후의 사제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청룡사의 노 비고
지진스님으로부터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삭발하는 동안 정순왕후의
뇌리에서는 양반집 규수에서 왕비에서 비구니스님으로 이어지는 기구한 운명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허경스님이 된 정순왕후는 일체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고 매일 동망봉에 올라 오로지 단종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나 이 애절한 기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10월 말 영월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스님. 상왕전하께서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소식을 들은 허경스님은 조용히 동망봉으로 향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세속과의 인연을 끊었다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이 생의 질긴 업연을 녹이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일설에는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가 아침저녁 이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네들이 땅 한번 치고 가슴 한 번을 치며 동정(同情)하는 곡(哭)을 해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은 근처에 ‘영빈 전’(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고도 전함)이라는 아담한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허경스님은 끝내 거부하고 청룡사에서 82세까지 살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불교가 배척당하는 시대라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청룡사 비구니 스님들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하며 그 흔적은 지금도 인근 원각사 옆 바위에 ‘자주동천’이라는 글귀로 남아있다. 우물도 복원돼 있다. <한경지략>에는 허경스님을 동정한 성 안팎 백성들은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갖다 대주곤 했는데 부녀자들의 많아 긴 행렬 이룰 정도였다고 전한다.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여인들은 지혜를 모아 청룡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푸성귀를 파는 척 모여들어 몰래 허경스님에게 갖다 주곤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동묘 남쪽 마을인 ‘여인시장 터’의 유래가 됐다.
허경스님은 입적 후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의 시집인 정 씨 집안의 묘역(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묻혔다가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 복위와 더불어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를 사릉이라 했다.
후대왕인 영조는 1711에 창덕궁을 들렀다가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청룡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 후 암어 천만년)”이란 친필을 내렸다. 또 ‘동망봉(東望峰)’이는 글자를 바위에 새기게 했으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숭인근린공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동망산에 있는 공원이다. 동망산공원이라고도 한다.
1980년에 개원한 도시공원으로 주민들이 휴식과 산책,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면적 45,615㎡로서 주민들이 휴식과 산책,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공간이다.
공원 안에는 정자와 체력단련시설, 관리사무소, 화장실 등이 있다.
공원이 있는 동망산의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부르는데, 단종이 영월로 귀양을 가자 단종비 정순왕후가
초가 암자인 정업원을 짓고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08년 4월 이 공원에서 정순왕후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동망봉동견각


동망정
동망정은 정순왕후를 기리기 위해서 후대 사람들 이지은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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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진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 작은 초막을 짓고 살면서, 매일 아침 동쪽 산에 올라 단종이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녀는 평생을 단종의 명복을 빌며 어렵게 살았고, 염색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동망봉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일부는 헬스장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비우당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 중기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이 살던 곳이다. 낙산 동쪽 상산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 지봉이 여기에서 나왔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 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비우당은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민
가옥 형태를 하고 있다. 원래 이수광의 외가 쪽 인물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유관이 살았던 집을 이수광이 고쳐지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다. 집터 뒤편에는 단종비 정순왕후가 폐위된 뒤 빨래를 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주동샘과
거북 모양의 바위가 남아 있다. 비우다 뒤뜰에는 아래와 같은 자지동천이 있다

한양도성 낙산공원에서 500m가량 동쪽으로 가면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해석하면 '자줏빛 풀의 계곡에 있는 샘물'이라는 뜻이다.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우물터가 바로 그 샘물이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그리며 왕비인 정순왕후 송 씨가 살았던 곳이다.
생활이 곤궁해 옷감에 염색하는 일을 했는데 이 근처에는 자줏빛 색을 들일 풀이 많았다고 한다.
송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1457년으로 한양도성이 건설된 지 6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영도교
1457년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향 갈 때 그의 비 정순왕후 송 씨가 이 다리까지 따라와
눈물로 영영 이별을 한 곳곳이라 하여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뒤에 붙은 영미교라는 이름 역시 영이별교가 병음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콘크리트 다리로 견고하게 건설이 되어 있다

2016년에 다녀왔던 정순왕후 태생지를 올려봅니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동편마을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성서원 부근에 있다)



정순왕후여산송 씨 태생지비

사릉(이해를 돕고자 캡처한 사진)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홍유릉 인근에 있는 사릉은 비운의 왕인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1440~1521)의 능이다.
사릉은 왕릉보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 사업소 묘포장으로 유명하다.
과거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적이 있으나 방문객이 적어 비공개 왕릉으로 분리되었다가 2013년 1월 1일부터
태강릉의 강릉, 동구릉의 숭릉과 함께 공개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즐기고 있는 파크골프장에 핀 애기동백 산당화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윤윤서 - 어머니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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